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04
약먹는 천재마법사 904화
운명을 보는 눈(40)
거대도시 생활권을 벗어난 도시 외곽.
미개발지구로 규정되는 경계선을 벗어나, 위성도시가 더 가까워진 거리.
모래사막 위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낡은 함선 아래서, 레녹이 모닥불을 지피고 있었다.
타닥, 타닥!
말라붙은 나뭇가지 위로, 작은 불씨가 금세 옮겨붙어 타오른다.
붉은 빛으로 얼굴을 물들이는 모닥불을 두고 물러선 레녹이, 모래 언덕 위에 걸터앉았다.
주변에는 두 사람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도시 밖으로 나오자마자 라피스가 다른 주시자들을 물리고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
“네가 나에게 불을 피워 달라고 부탁할 줄은 몰랐는데.”
레녹이 모닥불에 장작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캠핑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다. 이벨린이 있었다면 훨씬 능숙하게 해줬겠지.”
“괜찮아요.”
라피스가 대답했다.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건, 잠깐이면 충분할 테니까요.”
“……그렇군.”
숨막히는 침묵.
예전의 라피스를 상대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어색한 위화감.
하지만 레녹은 라피스와의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애초에, 라피스를 세계의 경계선 너머로 올려보낸 그 순간부터, 일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다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역시 외견이 달라진 라피스의 모습 그 자체에 있겠지.
“몸은 좀 괜찮나?”
“네.”
라피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모님이 남겨두신 인격의 일부가 제 안에 함께하고 있어요.”
“…….”
“공능이 안정화되고 자리를 잡는다면 저도 한쪽을 선택할 수 있겠죠.”
“선택이라…….”
레녹은 그렇게 대답하며 라피스의 발 아래를 힐끗 바라보았다.
불길 너머로 일렁이는 라피스의 그림자는, 어른과 아이를 오가듯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의념의 과부하가 육체의 성장도에 영향을 미쳤다면 당분간 피로감이 상당할 거다.”
“…….”
“원래대로 돌아오든, 그 모습으로 고정되든 적응기간이 필요하겠지. 가능하면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육체의 고통은 그렇게 심하지 않아요.”
라피스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마력과 술식에서 이질감이 강하네요. 의념보다는 위계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의 변화를 두고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이 담담하게 고하는 라피스의 모습.
감정이나 표정의 변화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서늘한 반응까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아두고 온 것 같은 비정상적인 차분함이 재회한 순간부터 느껴진다.
“마드레아 팔시어가 등대지기의 공능을 모두 습득한 건 승천자가 된 이후의 일이었을 테니까.”
위화감을 무시한 레녹이 말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네가 공능을 회수한 시점에서 반동이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
“어쩌면 너 자신이 기존의 위계에서 동떨어진 존재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자세한 건 생체리듬과 마력환원주기를 검사해 봐야 하겠지만…….”
레녹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서부턴 나보다는 갑선이나 그리샤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에반 님.”
라피스가 문득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반 님의 진정한 소망은 무엇인가요?”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라피스가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왜 지금까지 저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라피스.”
“죄송해요.”
라피스가 담담하게 사과했다.
“너무 늦었죠. 한참 전에 드렸어야 했던 질문인데.”
“…….”
“예전에는, 확인하는 것이 무서워서 주저했어요. 이 모든 일이 당신에게는 가벼운 여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마치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하듯이 담담하고 나직한 고백.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라피스가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에반 님은 불같아요. 관심이 있는 것에만 격렬하게 타오르고, 그 이외의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으니까.”
“…….”
“당신의 성정과 재능이 제가 바라던 이상적인 도달점에 가까워서.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어요.”
라피스가 물끄러미 레녹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에반 님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
“에반 님이 바라는 결말은 무엇인가요?”
재차, 같은 질문을 던진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글쎄.”
레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군.”
“…….”
“나는 나다. 예전에는 그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서 감추고, 마지막까지 숨기려고 했었지.”
밤하늘을 바라보며 레녹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결말이 가까워지면서…… 내 안에서 우선순위가 조금씩 바뀌고 있을 뿐이야.”
사막의 밤하늘 너머로는 별빛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는 저 빛나는 별이 단순한 열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별빛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 세계의 명운 역시, 외해 너머의 종말들에게는 고작 그 정도 의미에 불과하겠지.
“가지 않은 길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한다. 시간이 허락되는 한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하려 하지.”
“어째서인가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내놓아야 하니까.”
라피스의 표정이 살짝 변하는 것을 보며 레녹이 답했다.
“이미 정해진 세계의 법칙과 인과를 따라서는, 결국 세계를 초월하는 대답이 될 수 없을 테니.”
“…….”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겠지. 구세계에서 승천에 도전했던 이들은 세계와 동등한 격을 손에 넣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테니까.”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존재하지 않는 다음을 그리기 위해서는, 이 세계의 인과를 뛰어넘는 대답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라피스와 시선을 마주한 레녹의 입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대답이 내 안에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다.”
“…….”
“가벼운 여흥따위가 아니야. 그런 시답잖은 감정으로 목숨을 건 적은 없다.”
레녹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반 바일런에 대한 일 역시 마찬가지였지.”
“…….”
에반 바일런과 마르티네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은, 레녹이 지닌 신분 사이에서도 유독 모호한 편이다.
양지의 신분으로 사용하던 에반이 우연히 라피스와 접촉하며 청의 눈에 협력하기 시작했기 때문.
마르티네스의 성을 붙여 구분하기 시작한 것도 10사도 암리타를 토벌한 뒤의 일이 아니었던가.
애초에 나눌 생각도 없었고, 굳이 구분지어 생각한 적도 많지 않지만 라피스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겠지.
그렇기에 적어도 라피스에게는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애초에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깔끔하지 못했으니까.”
“…….”
“연구성과를 내기 시작한 시점에서 바빠졌고, 청의 눈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한동안 연락이 뜸했었지.”
레녹이 발칸이 있는 방향을 향해 눈짓했다.
“먼저 연락해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저렇게 되더군.”
발칸 외곽구역에 떠다니는 비행선의 광고판에 비춰지는 큼지막한 에반 바일런의 사진.
바일런이 교수가 연구소장 직을 위임받아, 라파엘 교수와 공용마법 연구에 돌입했다는 소식.
“이해해요.”
한참을 그렇게 침묵하던 라피스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에반 님은 결국, 완전히 제 편에 설 수는 없던 거겠죠.”
“…….”
“예전에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조용히 눈을 감은 라피스가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에반 님께 항하사미궁의 일을 부탁드리지 말걸…….”
“…….”
“진둔의 일이 아니었어도 에반 님은 훌륭한 마법사였을 텐데. 저희의 관계도 조금 더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글쎄, 레녹은 그럼에도 라피스의 말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라피스의 생각과는 별개로, 레녹은 언제나 한쪽에 묶이지 않으려 노력해 왔으니까.
하지만 레녹은 라피스에게 그런 자신의 생각을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라피스 역시 그 감상에 오래 매달리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사실,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에반 님의 선택이 진정 세계를 초월하는 대답이 될 수 있는 건지…….”
“……,”
“하지만 믿을게요. 제가 본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
“라피스……”
“그러니, 지금부터는 당분간 저희와 거리를 두는 편이 좋겠어요.”
라피스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당신께서 모든 가능성을 마주하려 한다면, 아르스노바로 향하는 저희와 함께하는 건 외려 그 반대의 일이 될 테니까.”
“…….”
레녹이 선택한 결말을 인정하고 믿으려 하기 때문에, 반대로 잠시 서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라피스의 단언.
속삭이는 라피스의 말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묻혀 있었는지.
다시 또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그 안에 담았는지.
하지만, 라피스는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결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화르륵!!
모닥불 속에 손을 집어넣은 라피스가, 그 안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구체를 하나 꺼내 들었다.
마치 인간의 눈을 화려한 보석으로 흉내 내어 조각해낸 듯한 기묘한 형태의 아티팩트.
“천혜(泉慧)의 눈동자. 조모님께서 자치령에 남겨두신 술식병장들 중 하나에요.”
라피스가 그렇게 말하며 그것을 레녹의 손 위에 올려두었다.
“에반 님께 드렸던 [정토신해진언]과 같이, 그분께서 승천자가 되기 전까지 사용하던 유물급 아티팩트죠.”
“…….”
“천지만물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힘을 가졌으며, 이 눈 자체로 열세번째 등대로 존재하는 힘이기도 해요.”
“라피스. 등대라면 난 이미…….”
“그러니까.”
라피스가 속삭였다.
“이걸 드리는 대가로, 에반 님께 드렸던 다섯 번째 등대의 권한을 가져갈게요.”
“…….”
“이게 남아 있다면, 당신이 바라는 결말을 그리는 여정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까.”
사락.
레녹의 손 위로 라피스의 손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검지 사이로 알 수 없는 어떤 감각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라피스가 다섯번째 등대의 관측권한을 거둬들이는 것임을 알았지만, 레녹은 막지 않았다.
라피스가 조용히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저희, 여기서 헤어져요. 에반 님은 아직 저 도시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잖아요?”
“…….”
“다른 주시자들에게는 제가 말해둘게요. 에반 마르티네스는 당분간 주시자의 업을 내려놓고…….”
라피스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그녀의 목소리도 모닥불과 같이 사그라들었다.
“싸움의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한 근신에 들어가겠다고.”
* * *
육방성채 외곽 시가지를 전장으로 삼아 펼쳐진 견뢰와 천번의 결전.
도시 전역에서 눈과 귀를 가진 자라면 누구나 지켜보았다는 재해가 끝난 지 나흘 뒤.
거대도시는 여전히 이번 일에 대한 여파를 수습하는 일로 한참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미개발지구 인근 시가지의 재개발 일정을 앞두고, 의회 내부에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습니다.] [고위계 초인간의 무력충돌로 인해 수십킬로미터 일대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된 지금-] [마탑이 위치한 49구역을 포함한 외곽구역의 재개발을 진행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매일 똑같은 화제를 두고 격렬한 보도와 논의를 이어가는 언론들.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반응과 소식을 놓고 의견과 설명을 보태는 전문가들.
[찬성 측에서는 사태가 벌어진 이후, 대륙 각지의 마탑에서 마법사들의 방문이 20배 이상 폭증했음을 지적하며 적극적인 투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반대 측에서는 금전적인 이득을 감안하더라도, 결국 사태의 당사자인 견뢰가 직접 책임을 져야 하는일인지 의문을 표하고 있으며…….]“…….”
어떤 채널을 틀어도, 어떤 뉴스와 소식란을 들춰도 온통 이 이야기 뿐이다.
에반 바일런 교수에 대한 가십거리조차, 근 며칠동안은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을 정도.
그만큼 발칸 외곽에서 치뤄진 결전이 시민들에게도 엄청난 화젯거리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중앙의회가 실권을 쥐고 도시를 안정시킨 이후로, 공식적으로 이만한 싸움이 도시 내부에서 관측된 적은 없었다.
시정부가 해당 사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수습하겠다 나선 시점에서 의견이 갈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견뢰와 천번의 충돌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상황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밀리에 입국했던 등대지기 라피스 팔시어의 신변을, 견뢰가 납치하면서 갈등이 극한까지 치달았었죠?]특별편성된 프로그램을 통해,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시청자들에게 설명하는 이름 모를 교수와 사회자의 모습.
[맞습니다. 찬성 측의 논리도 이에 기초하고 있는데요, 애초에 그 정도로 미친 마법사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당장으로선 최대한 그의 구역을 보존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책임과는 별개로, 실리부터 챙기자는 쪽이지요. 당장 발칸을 방문하는 마법사들의 수가 늘어난 만큼, 이 기회를 놓치면 아쉽지 않겠습니까.] [이제보니 교수님도 은근히 재개발에 찬성하는 쪽이셨군요?] [하핫, 사실 제가 아는 탑의 동기들도 이번 기회에 도시를 방문하려 한다길래…….]화면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웃음소리.
레녹은 연구실 작업대에 기대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
모든 일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사태가 수습되려면 해야 할 일이 한참 남아 있다.
당장 휴대폰에 쌓여가는 연락조차 벌써 수백 통이 가볍게 넘었을 정도.
하지만, 레녹은 다른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한참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외해의 마력을 계기로 해서 갑작스럽게 늘어난 최대 마력량의 안정화.
이번 사태를 통해 새롭게 감을 잡은 화신술식의 조작요령.
진둔의 결계술을 응용해 새롭게 만들어낸 외장 마력노심 제작 기술까지.
한참 미뤄두었던 술식의 연구와 개조, 새롭게 습득한 기술을 마음껏 연구하고 분석하며 휴식을 취한다.
아니, 이것을 휴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평소의 레녹이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발칸의 정세를 지켜보는 것을 쉰다고 말하지는 않았겠지.
라피스와 대화를 나눈 뒤로, 레녹은 고민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의 눈과 잠시 거리를 둘 것을 권고받은 뒤로.
레녹은 계속해서 그 순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충격을 받은 걸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결정조차 라피스가 레녹을 배려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레녹이 아는 라피스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 무심코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결정조차 레녹이 예상했던 결말은 아니었기에, 그 사실을 곱씹고 있었을 뿐.
라피스 팔시어가 레녹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진정으로 레녹과의 관계를 배려해 준 것이 라피스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며칠내내 그것을 고민하던 레녹이, 오늘도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작업이나 마저 끝내야겠군.”
철컥!!
작업대 위에 놓인 묵직한 대형 산탄총을 가볍게 들어올린다.
두꺼운 더블배럴 총신 전체가 새파란 마력광으로 번뜩이는 강렬한 외견.
레녹은 연구실에서 근래 사용빈도가 줄었던 총화기를 새롭게 개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애용해 온 총화기들을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은 여러 신분을 오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허용 마력량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 있다.
레녹 자신이 직접 휘두르는 주문과는 달리, 총화기에 담아내는 보조마법의 출력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다만, 이번에 새롭게 개발한 외장형 마력노심을 통해 그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외장 마력노심을 충전식 샷건의 총신으로 개조하면, 기존에 모자라던 출력의 한계를 넘을 수 있어.’
직사각형의 형태로 길쭉하게 뽑힌 더블배럴을 들어 올리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다만 무턱대고 출력을 끌어올렸다가는 균형이나 내구성을 제대로 테스트하기가 어렵다.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샷건의 커스텀 자체는 레녹의 몸에 맞춰야 하지만, 그 조정을 위해서는 기준이 되어줄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런 표준 데이터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몸이 튼튼한 육체능력자의 시연이 가장 효과적이겠지.
뛰어난 운동신경과 마력조작능력을 가지고, 총화기를 비롯한 현대장비를 다루는데 숙달되어 있으며.
레녹이 진행하는 연구에 군말없이 협조하며 비밀을 지켜줄 법한 사람이라면-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여어.”
온갖 야채와 채소들을 싸들고 온 이벨린이, 저택의 문 앞에 씩 웃으며 서 있었다.
“라피스한테 차였다면서?”
“…….”
“이제 우리 똑같이 백수네?”
본질을 호도하는 건 잠깐이지만,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열이 뻗쳐서라도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