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422
422화
묻혀있던 과거, 발굴하다 (2)
* * *
20여 년 전, 어느 봄.
20살 동갑내기 남녀가 벚나무 가득한 거리를 걷고 있다.
얼굴을 거의 덮는 잠자리 안경을 쓴 남자는 한국대 법대 수석 입학의 영광이 빛나는 우창섭.
흰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은 늘씬한 여자는 송혜진이다.
이 둘은 중·고등학교를 함께 나온 동창이자 제일 친한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들의 진로는 갈렸다.
우창섭은 법대에서 촉망받는 인재로.
송혜진은 학원에서 바쁘게 일하는 영어 보조강사로.
그런데도 그들은 이렇게 종종 만나, 서로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겉으로 좋아 보이는 이 관계는, 사실 둘의 동상이몽이었다.
송혜진은 우정이라고, 우창섭은 사랑이라 여기며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
하지만 우창섭이 송혜진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않으며, 아직은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지금도 대학교 수업이 끝난 우창섭이, 학원 수업을 마친 송혜진을 집까지 바래다주는 길이다.
송혜진은 가방이 묵직한 우창섭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너 친구 없어? 강의도 끝났는데, 애들이랑 한잔하러 안 가?”
“그건 아닌데, 어차피 법대 애들은 수업 끝나면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가기 바빠.”
“그럼 너도 얼른 도서관 가서 공부해야지. 다른 애들한테 밀리면 어떡해.”
“날 뭐로 보는 거야, 송혜진.”
우창섭이 송혜진의 뺨을 살짝 집어 흔들었다.
“나, 이래 봬도 동기 중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아이고, 잘난 척은.”
유쾌한 웃음이 가득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음을 이어 나갔다.
“너, 집에서 독립하고 싶다고 했지? 그럼 내가 도와줄까?”
“됐어, 내가 네 도움을 왜 받아.”
“날 이용해, 혜진아. 왜 날 계속 밀어내려고만 하는 거야.”
우창섭은 송혜진의 손을 꼭 잡았다.
“너, 더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그동안 너 보면서 매우 안타까웠어. 내 마음이 더 아팠다고.”
그 말에 송혜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네 마음이 왜 아파?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야.”
“그럼 일단 그 집에서라도 독립해. 너, 거기서 살면서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며, 눈칫밥 먹는 거 싫다며.”
“돈 좀 모이면 독립할 거야. 이제 정말 곧이야.”
“혜진아, 내가 너 지켜주면 안 되겠냐?”
결국 우창섭은 송혜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혼자 간직했던 진심을 내뱉고 말았다.
“혼자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넌 늘 혼자 끙끙대잖아. 그동안 내가 옆에 함께 있었는데, 나한테 좀 기대면 안 되는 거야? 날 이용하면 안 되는 거냐고.”
그 말에 송혜진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내가 널 이용해? 무슨 수로?”
“막말로 내가 너, 결혼해서 그 집에서 데리고 나오면 되지.”
“결혼? 하하, 하하하! 야, 우리가 무슨 결혼이야!”
우창섭이 회심의 카드로 던진 말이었지만, 송혜진은 웃긴다는 듯 그저 크게 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혼해서 그 집 나온다는 생각이 먹힐 거였으면, 진작에 너랑 결혼했어. 근데 우리 오빠한테 그런 패는 절대 안 통해, 알겠어?”
“그걸 어떻게 확신해? 일단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 아냐?”
한창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는 그때, 저 멀리서 다가오는 차 한 대.
운전기사가 부드럽게 멈춘 차 안에서 훤칠한 남자가 내렸다.
옅은 쌍꺼풀의 부드러운 인상인 남자의 이름은 송서진.
송혜진의 이복 오빠이자, 그녀가 독립하지 못하게 집에 묶어둔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송혜진을 보고 슬며시 웃다가, 그녀 옆에 우창섭이 있는 걸 보고 표정이 굳어버렸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송혜진은 서둘러 오빠에게 다가갔다.
“오빠, 나랑 제일 친한 친구 창섭이, 알지?”
살가운 여동생의 소개에도 송서진은 얼굴이 풀릴 줄 몰랐다.
그는 우창섭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내비쳤다.
“분명히 우리 혜진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그랬을 텐데.”
“오빠!”
그때, 우창섭은 송서진 앞에 무릎을 냅다 꿇었다.
그에겐 이성적 판단이며, 생각할 겨를 따위 없었다.
그저, 지금은 혜진이를 그 집에서 끌고 나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저, 혜진이랑 결혼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미쳤어?”
옆에서 송혜진이 기겁하며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우창섭은 막무가내였다.
“누구보다 혜진이, 좋아하고 아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 안에 사법고시 합격할 자신 있습니다. 어떻게든 혜진이 밥 굶기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혜진이 지키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송서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너 따위가?”
우창섭은 그를 힐끗 올려다보다, 자신을 향한 시선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송서진을 봐오며 그가 만만치 않은 인간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다니.
깡패 집안이라고, 졸부 집안이라고 주변에서 무시해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국대 법대 수석까지 한 그간의 노력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뱁새가 황새를 넘보면, 다리 찢어져.”
송서진은 혜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딜 감히, 너 따위가 우리 혜진이를 넘봐.”
* * *
다시, 현재.
우창섭도, 송서진도 복잡한 마음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우창섭은 송혜진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미국으로 갔다는 소리만 들었을 뿐.
그러다 겨우 소식을 듣고 다시 얼굴을 본 건, 그녀의 장례식에서였다.
우창섭과 송서진의 사이에 놓인 과거는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이 ‘송혜진’이라는 그리운 기억으로 묶였다면, 더더욱.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은 그들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건 송서진이었다.
“할 말 있으면 얼른 말해. 나는 자네랑 사적으로 볼 사이도 아니니까.”
“JABC 저녁 9시 뉴스에 최대한 빠르게 특종 하나만 내게 해주십시오.”
“특종? 그런 건 지상파에나 부탁해.”
“이건 대표님밖에 받아주실 수 없는 겁니다.”
결연한 표정의 우창섭이 작게 속삭였다.
“부형윤 검사장과 우창균 대표의 유착관계. 그리고 그 와중에 벌어진 이중협 살인사건 등등. 일명 ‘이중협 살인사건의 전말’로 단독 보도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송서진의 눈이 왈칵 커졌다.
정치계와 연예계가 이중협 살인사건으로 시끄럽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창균 대표의 친동생인 우창섭이 이렇게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자기 형을 구렁텅이에 몰아넣겠다고?”
“복수할 대상일 뿐입니다. 혜진이가 그렇게 됐을 때부터, 오래전부터 이때 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증거를 보여주게.”
“여기, 정리한 자료입니다.”
송서진은 우창섭이 건넨 핸드폰 속 자료들을 훑었다.
그곳에는 상상 이상의 추악한 정보로 가득했다.
이건 특종, 아니, 대한민국을 뒤흔들 대특종이었다.
“그런데 왜 이걸 내게?”
“믿을 분이 대표님밖에 없더군요. 혜진이의 가족이었던, 대표님밖에요.”
의문 가득한 눈빛의 송서진은 맞은편의 우창섭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우창섭 변호사.
졸부 집안의 출생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품과 매너로 중무장한 신사.
그가 우창균 대표와 이복형제인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집안을 믿지 않았기에, 그의 손에 혜진이를 쥐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에 바뀌었다.
“그래. 혜진이를 위해 집안까지 버린 자네를, 내가 거둘 수밖에.”
송서진의 말에 우창섭의 얼굴이 환히 펴지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럼, 언론에 불을 질러주시는 겁니까?”
“나한테 하루만 주게.”
송서진이 우창섭의 손을 꼭 잡았다.
“이중협 살인사건의 전말을 9시 뉴스에 꼭 내보낼 테니까.”
* * *
빨간불에 신호가 걸린 고급 세단 안.
뒷좌석에 있던 우창균은 휘파람을 불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만난 불륜녀에게 보낼 문자를 정성스레 작성 중이었다.
“그래, 우리 이쁜이. 오빠가 다음에는 더 비싼 선물 사줄 테니까 딱 기다리고 있어. 사랑한다, 쪽!”
입으로 소리를 내며 문자를 작성하던 그를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힐끗한 순간, 우창균이 그에게 불쑥 물었다.
“요즘엔 우리 마누라 손톱 발견한 적 없지?”
“예?”
“왜,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BMW 차량에서 마누라 손톱 본 적 있다고.”
그제야 운전기사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뇨, 그 후로는 발견한 적 없습니다. 제 눈이 잘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안경 제대로 쓰고 다녀. 그때 내가 얼마나 식겁한 줄 알아?”
이어지려던 대화는 우창균이 핸드폰에 온 문자를 확인하는 바람에 끊겼다.
그러나 신호가 아직도 빨간불에 머물러 있는 이때.
김 기사는 우창균 몰래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 * *
집에 도착한 고급 세단에서 김 기사와 우창균이 내렸다.
“들어가십시오.”
“어, 그래.”
곧장 집으로 들어가려던 우창균의 발걸음이 창고 앞에서 딱 멈췄다.
일전에 와이프가 트렁크에 손을 댔다는 의심이 싹튼 이후, 그가 수시로 트렁크를 확인하는 건 일상이었다.
“좀 확인해 보고 갈까?”
우창균은 왼쪽에 주차된 차로 향했다.
“김 기사, 여기 트렁크 좀 열어 봐.”
재빨리 기사가 트렁크를 열자.
우창균은 그를 밀치고 상자를 확인했다.
하나하나 물건들을 확인하던 그의 얼굴에 점점 안도감이 차올랐다.
“다 있네. 다시 닫아, 김 기사.”
우창균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가자.
뒤에 남은 운전기사는 그가 시야에서 없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 핸드폰을 꺼내 들어 문자를 남겼다.
-사모님, 방금 대표님께서 차 트렁크 열어서 내용물들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울리는 알림음.
-알겠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잘 대처했어요.
그를 미리 포섭해둔 우창균의 부인에게서 온 문자였다.
일전에 트렁크를 뒤졌다는 의혹을 받은 후, 진작에 운전기사를 제 쪽으로 회유한 그녀였다.
우창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하고, 수상한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 했다.
남자가 우창균의 부인에게 협력하게 된 건. 그녀에 대한 연민, 그리고 우창균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이중적이고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으며 불륜까지 한 주인에게 실망해서.
물론 이 길이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건 알았다.
“하…….”
저 멀리 하늘을 보며 담배를 한 대 문 김 기사.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권선징악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폭풍 전야 속에서 왠지 심장이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오후 8시 50분.
늦은 시각임에도 퇴근하지 않은 강승민은 여러 서류에 뒤덮여 있었다.
“드림액터스를 배임, 횡령 혐의로 일단 묶어두길 잘했군. 조만간 장희재 대표부터 조사 들어가면 되겠어.”
피곤한 눈두덩을 이리저리 문지른 그의 시선에 띈 화이트보드.
이번 ‘이중협 살인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눈에 띄는 이름 세 개가 있었다.
“이중협, 한태주, 부형윤.”
이 세 명이 엮인 기가 막힌 상황과 세월, 그리고 사건.
강승민은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엮였냐, 도대체.”
한태주의 부모를 죽인 이가 부형윤의 전부인이라는 것.
그녀를 죽인 이가 남편이었던 부형윤이었다는 것.
심지어 이중협을 죽인 사람 또한 부형윤이라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추악한 사건의 진실이 이중협 사건의 재조명으로 인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도,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이중협도 하늘에서 정말 기가 막힐 거야. 그럼 이중협의 납골묘에 있는 그 몸은 누구 거냐고, 대체.”
DNA 재검사에 들어간, 그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조사해야 했다.
그때.
“검사님, 검사님!”
밖에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온다던 수사관이 헐레벌떡 문을 발칵 열고 들어왔다.
“지금 JABC에서 부형윤 검사장의 별장 사건으로 단독 보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뭐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에 강승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렇게 큰 건을 JABC에서 어떻게 입수한 거지? 설마, 우창섭이 그쪽에 붙은 겁니까?”
“JABC의 모기업이 경진일보 아닙니까. 그곳의 송서진 대표와 우창섭 변호사가 같은 대학교 선후배 관계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이런 정보를 공유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팟!
티비가 켜지자마자 JABC의 로고가 보이고.
진지한 얼굴을 한 아나운서의 보도가 크게 흘러나왔다.
“JABC에서 단독 입수한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최근 연예계에서 이중협 살인사건이 이슈가 됐습니다. 그런데 7년 전 촬영장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이중협 씨가 사실은 건설회사 대표인 우창균 씨의 별장에서 부형윤 검사장의 지시로 살해당했다는 정황을 저희 쪽에서 입수했습니다. 여병래 기자입니다.”
귀신 보는 배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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