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Beyond Fantasy Smartphones RAW novel - Chapter 152
탁류 (2)
눈을 떠보면 짙은 어둠이 펼쳐져있었다.
검은 빛의 아지랑이들이 흩어져 무너지며,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져있는 미증유의 공간.
그 속에서 나 혼자만이 자리에 선 채 깊은 어둠속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멍하니 어둠속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온몸에서 찌뿌둥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나는 눈앞의 어둠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기억을 되새겨보면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 오늘은 좀 힘들었지.”
오늘 하루는 평소보다도 더 피곤한 편이었다.
일도 많았고, 잔소리도 많았고, 몸마저도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는, 곧장 짐을 내려놓고 침대에 뻗어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다음에 처한 상황이 눈앞에 보이는 어둠이었다.
나는 눈앞에서 일렁이는 어둠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뻗어보았다.
“이건 그냥 꿈인가.”
내 손짓을 따라 아지랑이들이 움직이며 선명한 궤적이 만들어졌다.
짙은 어둠을 내 마음대로 조각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어둠밖에 남지 않은 세계가 내 손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네.”
마치 이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신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눈앞의 어둠을 휘두르며 혼자 서있던 것도 잠시.
갑작스럽게 몸이 기울어지는 듯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속에서 홀로 지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져내렸다.
세계가 기울면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신체의 옆면에서 작용하는 커다란 중력이었다.
“재미있어?”
검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살랑이는 것과 동시에, 귓가에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늘 이맘때가 되어서야 나와 마주했던 사람의 목소리였으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향한 방향에서 보이는 것은, 검은 옷을 입고서 나를 내려다보는 에스텔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텔······?”
“응. 오랜만이야.”
에스텔이 나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오늘도 평소와 같은 자각몽이었다.
다만, 평소와는 다른 사실 하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뭐야. 오늘도 그런 꿈이었나.”
“그런 설정이었지. 아마도.”
“그래서, 내가 왜 이러고 누워있는건데?”
누워있는 내 머리위로 에스텔의 시선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베고 있는 머리에서는 푹신한 감각이 전해져오는 중이었다.
중력의 방향으로부터 자신의 자세를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에스텔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내 얼굴을 내려다보는 에스텔의 차분한 시선을 받으면서 말이다.
“조금 쉬게 해주려고 생각중이야. 오늘은 피곤해보였으니까.”
“내가 피곤해보였다고?”
“응. 피곤한거 아니었어?”
에스텔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갈라지는 머리카락 너머로 칠흑빛의 강렬한 눈동자가 보인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몸이 지치고 나른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냥 평소와 같아보이는 내 모습이었다.
꿈속의 나는 전혀 피곤해보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뭐, 피곤하긴 하지.”
“그럼 됐네.”
“그래. 어차피 꿈인데, 내가 피곤하면 너도 피곤하겠지.”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에스텔은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던가.
지금의 내 상태를 읽는 것쯤이야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 무의식이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했던 모양이었다.
꿈속에서 에스텔과 이런 모습으로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평소처럼 게임을 하는 것을 대신해, 이런식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거겠지만 말이다.
“그건 아니긴 한데······.”
물론 내 이야기를 들은 에스텔은 고개를 저어 그것을 부정했다.
아무래도 피곤한건 나 혼자만이었던 모양이다.
몸이 피곤하니까 꿈속에서도 피곤하다니, 생각해보면 퍽 우스운 일이었다.
지쳐버린 몸은 꿈속에서조차 편해지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안피곤하면 어때. 오늘은 게임 대신에 이런식으로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대화하는거 좋아해?”
“싫어하진 않지. 상대가 꿈속의 존재만 아니라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에스텔은 내 앞머리를 천천히 비틀면서, 나를 향해 그 이유를 물어왔다.
“왜? 꿈속의 존재랑 대화하는건 싫어?”
“뭔가 이상하잖아. 내 안의 무의식이랑 대화하는거면 결국은 혼잣말하는거랑 똑같은거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 안에 잠들어있는 잠재의식과 대화하는 행위는, 결국 나 혼자 자문자답을 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내가 평소에 혼잣말을 전혀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에스텔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옆머리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이야기했다.
“내가 꿈속의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뭐?”
“내가 만약 꿈속의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래도 전부 쓸모없는 대화라고 생각해?”
만약 에스텔이 꿈속의 존재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나는 그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에스텔이 나에게 건넨 것은 그러한 부류의 질문이었다.
물론 그런 경우라면 이런식으로 태연하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지만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부질없는 질문에 불과했다.
꿈속의 존재가 자신이 꿈이 아니라고 한들, 누가 그것을 믿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원래 바보들은 자기가 바보 아니라고 말하더라.”
톡.
에스텔의 손가락이 내 이마를 살짝 두드렸다.
손가락에 제법 힘이 실려있음에도 딱히 아픈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감촉만이 이마에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내 이마를 살짝 두드린 에스텔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어떤데? 너는 바보야, 아니야?”
“나는··· 바보라기보단 그냥 가능성을 잃어버린 천재지.”
“······그래?”
“내가 제대로 공부했으면 아인슈타인은 진작에 뛰어넘었어. 너 대신 피타고라스가 앉아서 이러고 있었겠지.”
대놓고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에스텔이 한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푸흡.
짧은 웃음을 터뜨린 에스텔이 다시 내 앞머리를 넘겼다.
왼쪽으로 치우쳐있던 가르마가 이번에는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나 대신에 세계적인 석학이 이러고 있는 편이 좋은거야?”
“그건 아니고. 그런 사람들보다 네가 낫긴 하지.”
“그래도 다행이네. 그런 사람들은 이길 수 있어서.”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앞머리를 내어주는 기분이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상상이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털어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대신해, 에스텔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안그래도 너한테 할말이 좀 있었는데.”
“무슨 말인데?”
“저번에 물어봤던 1등 복권번호. 지난 회차 1등으로 알려줬더라고.”
“그래? 1등이 안돼서 아쉽게 됐네.”
에스텔은 태연한 모습으로 형식적인 대답을 짧게 늘어놓을 뿐이었다.
아쉽게 됐다니. 마치 놀려먹는 태도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래도 3등에 당첨되었으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다음에는 이번 회차 1등으로 알려줘.”
“다음에 알려줄 일은 없을거야. 그런 약속이었잖아?”
“그걸 용케도 기억하고 있네.”
“복권 번호를 전부 기억하는 사람도 있는걸.”
에스텔의 반박에 나 역시 헛웃음을 지었다.
복권번호야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외울거라고 생각한다.
번호 하나에 인생이 바뀌는데, 그것을 잊어버릴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에스텔의 생각은 나와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한 번 들어볼래?”
그렇게 나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던 에스텔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이야기했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라진 에스텔의 모습에 나는 의문을 가지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이야기를 전해오는 에스텔이라니.
지금까지의 에스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보통은 게임에서 이겨야 알려주지 않았나?”
“아직은 여유가 조금 있어서, 오늘은 그냥 특별히 이야기해줄게.”
“그렇게 말한다면야······. 오늘은 운이 좋았네. 네 이야기도 공짜로 들어보고.”
평소에는 가벼운 이야기에도 게임을 요구했던 에스텔이다.
그런 에스텔에게 게임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듣는다니.
별 것 아닌 일인데도 불구하고, 커다란 이득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에스텔이 내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폭풍이 다가올거야. 앞으로 조심해야해.”
폭풍이 다가온다.
그 한마디에 내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 * * * *
교단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성역의 위.
그곳에서 페린은 신기를 닦고 있는 플루토를 바라보았다.
요정과 흡혈귀.
서로 반대라고 해도 가까울만큼 다른 종족이었지만, 페린은 플루토와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사도들에 비해 사이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두 사도였다.
어쩌면 페린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플루토가 그녀를 편하게 대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플루토. 이번에는 북부쪽으로 가야할 것 같아요.”
어찌되었든 페린은 플루토와 상당히 친한 편이었다.
교단에서 플루토에게 내려진 임무를 페린을 통해 전달하려고 할 정도로 말이다.
페린이 싱싱한 사과 하나와 함께 플루토에게 임무를 전하자, 플루토가 페린의 사과를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내가? 직접? 알테리어스 지방에?”
알테리어스. 제국의 북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이었다.
페린의 이야기를 들은 플루토는 벌써부터 한기가 느껴진다는 듯, 살짝 떠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야기했다.
알테리어스 지방의 한기는 페린 역시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사도들을 태우기 위해 몇 번 이동했던 적은 있었지만, 요정과 추운 날씨는 서로 타협할 수 있을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번 임무가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플루토의 모습에, 페린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흡혈귀는 추운걸 잘 못버티나요?”
“그런건 아니긴한데······.”
“그럼 괜찮겠네요!”
“······.”
끄덕. 끄덕.
페린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긍정하자, 플루토는 살짝 어두워진 안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많은 감정이 엿보이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잘못해서 플루토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한순간 페린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혹시 제가 무언가 실수한게 있었나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알테리어스에 갈게.”
“그거 다행이네요!”
다행히 플루토는 흔쾌히 수락하는 모습이었다.
무사히 임무를 받아준 플루토의 모습에 페린은 환호하며 다시 사과를 주워 건넸다.
물론 플루토는 이번에도 사과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사과를 건네는 페린을 향해 손을 내저으면서 이야기했다.
“괜찮아. 흡혈귀는 피만 먹으면 살 수 있으니까.”
“그런가요? 지난번에는 술도 먹었던 것 같은데요?”
“그건 그냥··· 기호일 뿐이야.”
한마디로 일축한 플루토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천을 들어올렸다.
데스사이드. 푸르스름한 기운을 띄는 플루토의 신기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플루토는 천을 이용해 흙이 묻은 그녀의 신기를 정성스럽게 닦아내었다.
“페린.”
“네!”
“그런데 왜 알테리어스에 가야한다고 하는거야?”
플루토는 신기를 닦으면서 그녀에게 이번 임무의 목적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가 알테리어스로 파견되는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플루토의 이야기에 페린은 대주교 로안과 엘본이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번 임무의 시작은 엘본이 꺼낸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위대한 존재의 육신을 빚어내는 일에 용종의 피가 필요하며, 문헌에 따르면 제국의 북부에 용종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알테리어스에 용종이 살고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그런 용종을 찾아서 데려오는게 이번 작전의 목표라고 했어요.”
“용종이라면··· 오래된 도마뱀들 말이야?”
보통은 플루토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파충류의 모습을 띄고는 했다.
허나 자연에는 그렇지 않은 예외도 존재하는 법이었다.
오래된 용종들 중 일부는 타고난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했다.
용종은 그런 동족을 향해 영성을 얻었다는 표현을 사용해 격을 높여주고는 했다.
“영성을 얻은 용은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할 수도 있다고 해요. 오래된 문헌에서 찾은 정보니까, 아무래도 사람으로 의태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래된 용종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레어라고 부르는 본거지만큼은 쉽게 버리지 않겠지만 말이다.
페린의 이야기를 들은 플루토는 고심하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사람처럼 생겼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맞아요.”
“그 도마뱀들은 강해?”
“영성을 얻은 용이면 엄청 강할거에요. 그야, 전설속에 나오는 용들만 하더라도 무척이나 강해보이는걸요!”
용들이 강하다는 이야기가 플루토의 관심을 잡아당긴 것일까.
플루토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데스사이드의 날부분을 두드렸다.
퉁. 청명한 소리가 데스사이드의 날에서 전해져왔다.
푸른 아우라가 데스사이드 주변을 넘실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느새 신기를 전부 닦아낸 플루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기를 어깨에 짊어지고서 말했다.
“용과의 싸움이라··· 그거 재미있겠네.”
휘이잉.
결계가 거두어진 성역의 너머로 찬 바람이 두사람을 향해 휘몰아쳤다.
겨울이 다가오는 탓에 바람에는 한기가 가득 차있는 모습이었다.
파르르르르.
플루토는 갑작스럽게 자신을 휘감는 찬바람에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날씨만 좋으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