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153
153. 자네가 입이 닳도록 자랑하던 그 아들놈인가.
일주일 뒤.
재성이 책상 앞에 앉아 결재 서류를 살펴보고 있을 때 비서인 정효정이 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부사장님. 만찬에 늦지 않으려면 이제 출발하셔야 됩니다.”
“벌써 그렇게 됐어요?”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하자 막 4시 정각이 넘어가고 있었다.
퇴근 시간에 걸리면 도로가 엄청 막힐 테니 청와대에서 열리는 국빈 만찬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회사를 나가야 했다.
몸을 일으킨 재성은 옷걸이에 걸어둔 윗옷을 챙겨 들며 말했다.
“난 청와대에 밥 먹으러 갈 테니까. 효정 씨도 오늘은 일찍 퇴근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재성이 부사장실을 나가자 정효정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쩜 저렇게 멋지시담.”
그 청와대를 고작 밥 먹으러 간다며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재성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정효정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컴퓨터 화면 아래에 내려놨던 메신저를 띄웠다.
그룹 내 여비서들끼리 연결된 단체 채팅방에 방금 재성이 했던 말을 올리자 금방 열광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역시 부사장님 클래스. 대단하네.] [9층엔 혹시 내려올 일 없으시다니? 팍팍한 회사 생활에 유일한 낙인데 벌써 얼굴 뵌 지 일주일도 넘었어…… ㅠㅠ] [이번에 외국 출장 다녀오시면서 또 효정 씨한테 명품 사다 주셨다며?] [헐, 부럽다. 우리 상무님은 예전에 립스틱 하나 사주시고 땡이었는데. 심지어 아직도 그걸로 우려먹으신다니까!] [이것아, 고마운 줄 알어. 난 립스틱은 고사하고 초콜릿 하나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50대 상무님한테 초콜릿 받는 게 더 큰일이지 않아요?] [와 미친. 방금 상상해 봤는데 소름 돋았어.]주르륵 올라오는 부러움 섞인 대답들을 보면서 정효정은 절로 입가에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로비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재성은 박경수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지금 어디냐?]“만찬장에 가려고 이제 사무실에서 나왔습니다.”
[잘됐구나. 로비 앞에 차를 세워놨으니 같이 가도록 하자.]회사에 와 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바로 대답했다.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그래.]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회사 정문 앞에 검은색 대형 고급 세단이 한 대 서 있었다.
바로 박경수 회장이 애용하는 마이바흐 62S 모델이었다.
뒷좌석에 타자 박경수 회장이 조수석에 있는 정태규 실장을 보며 말했다.
“출발하게.”
“예.”
미끄러지듯 차가 출발하자 박경수 회장이 옆에 앉아 있는 재성을 보며 입을 뗐다.
“메가시티 리츠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면서?”
“처음부터 제가 맡은 일은 분양까지였으니까요.”
“하지만 리츠 사업은 네가 기획해서 진행한 일이지 않냐.”
기껏 판을 다 깔아놓고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는 것이 아깝지 않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재성은 크게 상관없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건설 쪽 일이잖아요. 하루 이틀 안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전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습니다.”
작은 것 하나도 욕심을 내며 빼앗기기 싫어하는 둘째 아들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박경수 회장은 기가 찬다는 시선으로 그를 봤다.
‘알뜰하게 제일 데이터까지 챙겨간 걸 보면 물욕에 초탈한 것 같지는 않고.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녀석이군.’
박경수 회장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설에는 관심이 없는 거냐?”
그러자 재성이 고개를 돌려 박경수 회장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되물었다.
“욕심이 난다면 저한테 주실 거예요?”
당돌한 말에 박경수 회장은 내심 어이가 없어 하다가 이내 이놈 봐라 하며 말했다.
“아예 생각이 없진 않은 모양이구나.”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데 욕심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억지로 제 것으로 삼을 만큼 탐이 나진 않습니다.”
“뭐라고……?”
“솔직히 형들하고 소모적인 싸움을 벌이는 것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사업체에 신경을 쓰는 것이 더 이익이니까요.”
“허어.”
“지금은 건설보다 못할지 몰라도 오래지 않아 훨씬 크고 돈을 많이 버는 회사로 키울 자신이 있습니다.”
헛웃음을 내뱉던 박경수 회장은 막내아들의 대찬 포부에 금방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녀석들은 있는 걸 서로 가지려고 난리인데 이놈은 자기 회사를 키워서 날 넘어서겠다니.’
스스로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려는 모습에 대견하고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네오픽스라고 했나? 거기에서 게임을 팔아 1년에 1조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고 했으니 아예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구나.”
“게임 타이틀을 하나 더 출시해서 내년에는 수익이 더욱 크게 늘어날 겁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아버지도 분발하셔야 될 거예요.”
재성의 말에 박경수 회장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어디 한번 따라와 봐라.”
그런 박경수 회장을 보며 재성이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위기를 넘겼지만 앞으로 계속 건설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큰 메리트가 없지.’
물론 순환 출자 구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그룹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꼭 가져야 되는 중요한 계열사가 바로 건설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룹 총수 자리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거지.’
다른 형제들과 제일 그룹을 두고 머리 터지게 싸우는 것보다 바깥에서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훨씬 쉽고 빨랐다.
이미 그러기 위한 기반을 착실하게 닦아두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내 몫은 확실히 챙겨서 나와야 되겠지.’
그렇게 박경수 회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오늘 국빈 만찬이 열리는 청와대 영빈관에 도착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워진 가운데 영빈관 주변은 조명을 환하게 켜서 대낮처럼 밝았다.
고급 세단이 멈춰 서자 대기하고 있던 청와대 직원이 얼른 뒷좌석을 열어줬다.
재성이 박경수 회장과 함께 차에서 내리자 의전실 보좌관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작게 머리를 끄덕인 박경수 회장과 재성은 보좌관의 안내를 받아 간단하게 소지품 검사를 받고는 행사가 열리는 영빈관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홀 천장에는 반짝거리는 빛을 발하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여러 개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 원형 테이블들이 간격을 맞춰 놓여 있었다.
차분한 느낌의 베이지색 벽은 은은한 조명과도 잘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안으로 발을 들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다.
“이쪽입니다.”
보좌관이 두 사람을 지정된 좌석으로 안내했다.
박경수 회장은 당연히 양국 정상들이 앉는 메인테이블과 가까운 자리였다.
근처에 십대 그룹 총수들과 주요 경제단체장들의 얼굴이 보이는 걸 보니 그들과 같은 테이블을 쓰게 될 것 같았다.
“어?”
앞에 놓인 이름표를 슬쩍 쳐다보던 재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재성의 이름이 박경수 회장 옆에 나란히 붙어 있었던 것이다.
마침 다른 사람과 인사하느라 한눈팔고 있던 박경수 회장 역시 뒤늦게 이름표를 보고선 얼굴에 놀란 기색을 띄웠다.
보통 이런 행사에서는 격에 맞춰서 자리를 배치하기 때문에 아무리 부자지간이라도 같은 테이블에 배정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박경수 회장을 먼저 앉히고 자신은 제 자리를 찾아 떠날 생각이었는데 같이 앉게 되어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자리가 맞는 건가?”
재차 물어보는 박경수 회장에게 보좌관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긴 이름표까지 당당하게 놓여 있으니 실수일 리는 없었다.
다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보좌관이 허리를 숙이고 떠나자 옆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제대로 온 게 맞는 거 같으니까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앉게.”
그는 사성 그룹 손무성 회장이었다.
“자네 아들 키가 커서 올려다보려니 힘들어 죽겠구만.”
그러자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다른 회장들 사이에서 와하하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흠.”
박경수 회장은 재성에게 앉으라고 손짓한 뒤 표정을 가다듬었다.
“다들 오랜만이군요.”
“무슨. 지난 달 전경련 모임에서도 얼굴을 보지 않았던가?”
평소 직설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TG 그룹 구자민 회장이 곧장 말을 받았다.
“그것보다 옆에 있는 청년이 바로 그 막내아들이야?”
“음. 그렇네.”
“오오, 바로 그 소문의.”
그러자 박경수 회장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슨 말인가?”
“자네가 입이 닳도록 자랑하던 그 아들놈인가 싶어서 하는 말이지.”
“내가 언제 자랑을 했다고 그래?”
“쯧쯧. 자식 앞이라고 오리발 내미는 것 좀 보소.”
구자민 회장이 안 그러냐며 옆을 보자 이번엔 손무성 회장이 한 소리 거들었다.
“워싱턴 포스트를 인수하고 게임으로 중국에서 1조 넘게 벌었다며 그렇게 자랑질을 해대더니 이제 와 아니라고 말하긴가.”
“그렇지요? 이것 보게. 자네 아버지가 이렇게 앞뒤가 다른 사람이라네.”
박경수 회장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놀려대는 말에 뚱한 얼굴로 딴청을 부렸다.
평소 엄격한 아버지인 박경수 회장이 밖에서는 저렇게 다른 회장들에게 자식 자랑을 하고 다닐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재성은 놀라면서도 속으로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에잇, 그만들 해!”
“어이쿠. 화났나?”
박경수 회장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곤 재성에게 말했다.
“얼른 인사하지 않고 뭘 해. 재계 어른들이니 깍듯하게 모시도록 해라.”
“예.”
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바로 했다.
“박재성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재계 거물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에 다들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특히 보통은 그룹을 앞에 내세우기 마련인데 그러지 않고 자기 이름만 밝혔다는 건 그만큼 스스로한테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허우대만 멀쩡한 것들하고 달리 제법 강단이 있는 것 같구만. 반갑네. 현우 자동차 그룹의 홍종경이라고 하네.”
테이블 앉아 있는 회장들이 다 그렇지만 국내 굴지의 자동차 회사인 현우 그룹 총수인 홍종경은 여러 언론을 통해 자주 노출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학창시절 럭비부 주장까지 했을 정도로 운동을 즐긴 홍종경 회장은 카리스마 있는 외모와 체격답게 손이 아주 크고 두툼했다.
“TG 그룹 구자민이네. 예전에 자네 부친하고 골프 약속을 잡았는데 바람맞은 적이 있지.”
“죄송합니다. 그때는 다른 선약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는 들었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을 받아서 갔다지.”
“그렇습니다.”
“라운딩을 돌면서 박 회장이 얼마나 자랑을 해대는지 아주 듣기 싫어 죽는 줄 알았네.”
그러자 박경수 회장이 발끈해서 말했다.
“내가 언제 그랬나.”
“허어. 기억 안 난다 이 말이야?”
구자민 회장이 박용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보게. 자네도 들었지?”
그러자 박 회장이 암,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8홀에 도착할 때까지 아주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내가 증인일세.”
“어허! 이 사람들이!”
박경수 회장이 무안한 얼굴로 혀를 찼다.
적당히 그를 놀려먹은 구자민 회장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재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에 시간 나면 자네도 함께 라운딩을 돌아보세. 사람이 젊어서부터 운동을 꾸준히 해야 건강에 좋아.”
“조만간 제가 한번 모시도록 하지요.”
그렇게 번갈아가며 재성은 다른 회장들하고도 인사를 나눴다.
재계 거물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막내아들을 보고 있으니 박경수 회장은 내심 뿌듯해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손무성 회장이 힐끔 그를 쳐다보고는 허헛,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만 웃게. 그러다 입 찢어지겠어.”
오래된 라이벌이지만 그만큼 자주 본 사이라 서로 얼굴만 봐도 기분을 읽을 줄 알았다.
“자네 막내를 보니 나이가 찬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장가보낼 생각은 있나?”
슬쩍 옆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속닥이는 말에 박경수 회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우리 사촌 조카 중에 괜찮은 아이가 있는데 어때?”
은근한 목소리로 찔러대는 걸 홍종경 회장이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중간에 끼어들었다.
“허허, 손 회장님. 조금만 괜찮아 보이는 인재다 싶으면 욕심을 내시는 건 여전하시군요!”
그러면서 홍종경 회장이 앞으로 몸을 내밀어 말했다.
“사촌보다는 우리 집안 큰 손녀가 더 낫지. 이제 스물다섯인데 서로 나이도 딱 맞고 얼굴이나 몸매로도 어디 빠지지 않는 미녀라네. 기왕 짝을 찾아줄 거면 우리랑 사돈을 맺는 게 어떤가.”
“허어, 다들 왜 이러십니까?”
가만히 있던 TG 그룹 구자민 회장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 손녀를 먼저 소개해 주기로 벌써 얘기가 됐으니까. 중간에 새치기 할 생각일랑 하지들 말세요!”
그러자 홍종경 회장이 황소처럼 단단한 턱을 치켜들었다.
“누구든 먼저 차지하는 게 임자지. 순서가 어디 있나!”
점차 소란스러워지는 와중에 박경수 회장은 싸움을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콧대를 높이 세웠다.
“글쎄 우리 막내한테 어울릴 만한 며느리감이 있을지 모르겠군.”
워낙 잘난 놈이어야 말이지! 하는 말은 속으로 삼켰으나 다들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아들 가지고 유세 떠는 거야?”
“아이고 배 아파서 어디 살겠나.”
중년인들 특유의 능청과 허세가 섞인 대화가 쉴 새 없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정작 장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회장들끼리 하는 말에 재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정상회담을 하고 공동기자회견까지 끝낸 양국 정상이 행사장이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재성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