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178
178. 호구를 하나 더 벗겨먹었네.
“부사장님. 도착했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던 재성은 조수석에 탄 권혁재 과장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잠깐 졸았네요.”
“요즘 많이 피곤해 하시는 거 같은데요.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권혁재 과장이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역시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은 권 과장뿐이네요.”
“올해는 휴가도 안 가셨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어쨌든 일단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내립시다.”
재성이 차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 단가연의 비서인 고승희였다.
“어서 오십시오, 부사장님.”
그녀는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정장 치마에 쉬폰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얼핏 단정함이 지나쳐 고리타분해 보일 수도 있는 옷이었지만 벨트로 허리 라인을 살리니 세련된 느낌이 났다.
딱 어머니 단가연이 좋아할 법한 정갈하면서도 지적인 패션이다.
“오랜만이에요.”
재성은 고승희와 살짝 눈인사를 한 뒤 그녀의 뒤를 따라 석암 갤러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는?”
“오늘 재계 사모님들과 모임이 있으셔서요. 빠질 수가 없는 약속이라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흠. 온 김에 인사라도 드리려 했는데.”
하지만 한편으론 빠르게 볼일만 보고 갈 수 있어서 내심 잘됐다 싶기도 했다.
만약 어머니가 자리에 있었다면 족히 1시간은 붙잡혀서 차를 마셔야 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고승희는 그를 전시 공간이 아닌 본관 깊숙한 곳에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했다.
문 앞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고, 머리 위에선 CCTV가 24시간 돌아갔다.
엘리베이터는 등록된 카드키가 없으면 아예 버튼이 눌려지지 않는 방식이었다.
지하층에 위치한 수장고로 내려가자 제복을 입은 건장한 덩치의 경비원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고승희를 알아보곤 목례를 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보안이 엄중하군요.”
“네. 고가의 미술품들을 보관하는 곳이니까요.”
고승희는 방금 지나온 출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무장한 경비원 두 명이 입구를 항상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 설치된 방법 시스템은 만약 문제가 생기면 5분 안에 인근 경찰서와 사설 경비업체 쪽으로 동시에 연락이 가게 되어 있고요. 그리고 수장고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금고라서 외부 침입은 물론 화재나 각종 재해로부터도 안전하답니다.”
하긴 보관된 미술품 가격만 수백억은 훌쩍 넘어갈 테니 당연한 조치였다.
한쪽이 열려 있는 두꺼운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상당히 넓은 공간이 나왔다.
“전시장으로 올라가기 전에 미술품을 확인하고 보존 처리도 하는 장소입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내부를 둘러보자 한쪽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부사장님께서 보내신 문화재들을 지금 감정하는 중입니다.”
재성은 눈을 반짝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막 작업을 시작했는지 발치에 포장지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그들은 에어캡으로 전체를 꽁꽁 둘러싼 물건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꺼낸 뒤 널찍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오오.”
“대단하지 않아요?”
바로 일본 정부와 계약을 하면서 소유권을 넘겨받기로 한 우리 문화재들이었다.
전부 일제 강점기 때 무단으로 가져가 제 것인 양 도쿄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계약을 맺자마자 일본 정부가 보낸 화물 비행기에 실려, 드디어 오늘 새벽에 다시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문화재들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무진동 트럭에 실려 보관과 관리가 용이한 석암 갤러리로 옮겨왔다.
“이건……!”
“백제관음보살입상이네요.”
“아름다워.”
국보급 문화재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감탄을 흘렸다.
이들은 문화재에 손상을 가하지 않기 위해 마스크와 장갑을 낀 상태였는데 손놀림 또한 매우 신중했다.
마스크 때문에 거의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문화재가 테이블 위에 놓일 때마다 흥분해서 열기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특히 그중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건 백제관음보살입상이었다.
높이 28cm.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한쪽 손엔 보병을 든 관음보살이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해서 만든 것이다.
세심한 조형미와 완벽한 균형감은 예술품에 대해 잘 모르는 재성도 시선을 떼기 힘들 정도였다.
“권 교수님.”
고승희가 백제관음보살입상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 중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음?”
흰머리가 새치처럼 듬성듬성 나 있고 안경을 낀 사내가 몸을 돌렸다.
“저희 갤러리 감정위원으로 계시는 권경열 교수님입니다. 한국대학 사학과 교수로 계시며 국내에선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실력이 좋으신 고유물 감정 전문가시죠.”
고은희의 말에 권경열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칭찬해 주니 고맙긴 한데…… 무슨 일이오?”
난데없는 소개에 영문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박재성입니다.”
재성이 먼저 한쪽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엉겁결에 손을 맞잡은 권경열 교수는 어어, 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 관장님하고…….”
“제 어머님 되시죠.”
“역시!”
권경열 교수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문과 뉴스에 나오신 걸 봤습니다. 이야, 실제로 뵈니 더 잘생기셨는데요. 이렇게 훤칠한 아드님을 두셨으니 원장님이 매일 자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로군요.”
그는 의외로 사교성이 좋은 성격인지 금방 친근한 태도가 되었다.
재성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문화재들을 보면서 물었다.
“문화재들을 보시니 어떻습니까?”
그러자 권경열 교수가 잔뜩 고무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두 다 진품일 뿐만 아니라 보관 상태도 아주 좋습니다. 하나같이 가치가 아주 높은 국보급 문화재들입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특히 여기 있는 백제관음보살입상은 백제 불교예술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 미소와 몸을 살짝 비튼 자세로 천의를 두르고 구슬 장식을 걸친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까지. 당대 장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걸작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동안에도 권경열 교수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고 귀한 문화재라는 뜻이었다.
“일본 자산가가 소장하고 있는 걸로 알려졌는데 이걸 어떻게 가져오신 겁니까?”
“신종 플루 치료제와 백신을 적당한 가격에 넘기는 대가로 일본 정부에게 받은 겁니다.”
“아. 그렇군요!”
여러 차례 환수 시도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문제가 생겨서 좌절됐었다.
국보급 문화재인 만큼 일본 당국의 반출 방해도 있었다.
그런데 훼방을 놓던 일본 정부가 나서서 거래가 이뤄졌으니 그런 문제 따위는 아예 없었을 터였다.
머리를 끄덕인 권경열 교수는 재성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하나같이 국보급이 아닌 것이 없는데 여기 있는 문화재들을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백제관음보살입상뿐만 아니라 감정을 받고 있는 마흔 점 모두 아주 귀하고 훌륭한 문화재들이었다.
그런데 만약 개인 수장고로 들어가게 된다면 앞으로 이 문화재들을 보기 어렵게 될 가능성이 컸기에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런 권경열 교수의 생각을 눈치챈 재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개인 금고에 들어가서 깊이 잠들어 있을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감정이 다 끝나면 전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할 계획입니다.”
“이걸 모두 말씀이십니까?”
“네.”
권경열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제관음보살입상 하나만 해도 수십억이 넘는 가치를 지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문화재들까지 합치면 액수가 더욱 올라가는데 그걸 전부 기증한다니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옆에 있던 고은희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상들이 남긴 귀중한 문화재들인데 혼자 가지고 있는 것보단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감명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요.”
재성의 말에 권경열 교수는 크게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단하신 생각입니다. 아주 훌륭하세요!”
그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재성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당황한 재성이 고은희를 돌아보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원래 좀 감정기복이 있으신 분이라…….”
특히 문화재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 저런다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국보가 될 것이 분명한 귀한 문화재들인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열렬히 배웅하는 권경열 교수를 놔두고 재성은 권혁재 과장과 함께 수장고를 나왔다.
“다음에 또 들러주세요. 원장님께서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고은희가 인사하며 재성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렇게 다시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탄 재성은 갤러리가 뒤로 작게 보일 때쯤 핸드폰의 착신음이 울리는 걸 듣고 액정을 확인했다.
“지금쯤 연락이 올 줄 알았지.”
상대는 화젠민 부주석이었다.
재성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평소와 같이 그를 대했다.
“형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화젠민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듣자마자 왜 이러는지 알아차렸지만 그는 시치미를 떼며 모르는 척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신종 플루 치료제와 백신 말일세. 일본한테는 대량으로 판매하면서 우리 중국에는 약품을 주지 않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나!]살짝 언성까지 높이는 모습이 이만저만 화가 많이 난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재성은 당황한 기색 없이 여유 가득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아. 그것 때문에 그리 화가 나셨군요.”
[오늘 하루만 새로 나온 환자 숫자가 몇 명인 줄 아나! 2천 명이야. 2천 명! 병원마다 수용 인원을 초과해서 복도에 환자를 그냥 눕혀 놓고 있는 지경이란 말일세.]중국 정부가 새로 발생했다고 공식 발표한 확진자 숫자는 5백 명이었다.
그런데 화젠민 부주석의 이야기를 들으니 역시나 확진자 숫자를 축소해서 발표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의료 체계도 낙후되어 있고 인구도 훨씬 많은데 중국에서 일일 확진자 숫자가 그것밖에 안 나온다는 게 말이 안 되지.’
[한국 정부에 먼저 납품한 건 그렇다고 쳐도 그다음은 당연히 우리 중국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아주 단단히 화가 나고 서운한 목소리였다.
홍콩을 시작으로 북경을 비롯한 중국 대도시들로 신종 플루가 빠르게 번져 나가자 당연히 중국 정부도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유니콘 제약을 찾아왔다.
‘확산세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에 이어 일본까지 물량을 가져가니까 조바심이 났겠지.’
그러다 보니 유니콘 제약 주인인 자신과 좋은 관계로 알려진 화젠민 부주석한테까지 압박이 갔을 거라는 건 안 봐도 뻔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직접 전화를 해올 리가 없지.’
그리고 당연히 중국을 먼저 생각해 줄 거라 생각했을 화젠민으로서는 배신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계속 뒷배가 되어줘야 될 화젠민의 마음이 더 상하기 전에 핸드폰을 고쳐 쥐며 말했다.
“저도 지금 중국 상황에 대해선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큰 그림을 위해 형님 전화를 기다렸지요.”
[그게 무슨 소린가?]“제가 요청을 받고 바로 팔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히 그걸로 끝 아닙니까.”
[…….]“하지만 중국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형님께서 나서서 치료제와 백신을 구해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공이 전부 나한테 오겠군.]재성이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형님의 위치는 지금도 굳건하시지요. 하지만 이걸로 북경에서 입지를 더욱 단단히 다질 수 있게 될 겁니다.”
잠시 말이 없던 화젠민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듣고 보니 그렇군. 그런 깊은 뜻이 있었다니 이거 내가 또 자넬 오해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하네.]“아닙니다.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지 못해 생긴 오해인걸요.”
[그래, 아우가 그럴 리가 없지. 아우를 믿었어야 되는데 이거 의형으로서도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걸로 화젠민에게 빚을 하나 더 씌워놓은 셈이었다.
“내일 회사로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약품은 물론이고 치료제인 타미플루 라이센스까지 얹어서 드리겠습니다.”
[라이센스까지?]놀란 기색이 전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형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는데 그 정도는 받아가셔야죠. 그래야 체면이 서시지 않겠습니까.”
벗겨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돈을 뽑아내려는 것이었지만 교묘하게 도와주는 걸로 둔갑시켰다.
화젠민은 설마 치료제 라이센스까지 넘겨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지 크게 감동한 눈치였다.
[역시 자넨 진정한 내 의동생이네.]만약 그가 눈앞에 있었다면 포옹이라도 할 기세였다.
“형님께 작으나마 도움이 됐다면 저야말로 기쁜 일이지요.”
재성은 마지막까지 화젠민을 흡족하게 만든 후 전화를 끊었다.
“이걸로 호구를 하나 더 벗겨먹었네.”
입가에 절로 싱글벙글 웃음이 떠올랐다.
재성은 시트에 몸을 기대며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