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537
537. 너 또 뭔가 꾸미는 게 있지?
며칠 뒤.
어둠이 짙게 깔린 가운데 평창동 박경수 회장의 저택 서재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박경수 회장을 중심으로 해서 큰 형인 박재현, 재경 3남매가 붉은빛이 도는 마호가니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았다.
박경수 회장은 왼편에 있는 재성을 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중국 정부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소리냐?”
그러자 재성인 가지고 온 신문 한 부를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오늘 나온 환구시보(環球時報)입니다.”
1면에 큼지막하게 인쇄된 기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면 이번 사드 배치 결정을 네덜란드 헤이그 중재 재판소에서 진행 중인 남중국해 영유권 결과 발표와 연결해 중국의 외교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승인지위(乘人之危) 전략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승인지위라면 상대의 약점을 쳐서 주의를 돌리는 포석이라는 뜻이군.”
맞은편에 있던 박재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북한 핵과 탄도 미사일 때문에 사드를 배치하는 건데 얼토당토않게 남중해는 왜 갖다 붙이는 거야?”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북아 안정 문제가 아니라 이번 일을 미중 패권 전쟁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일 거야.”
“이거 완전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네.”
말도 안 되는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듯 박재현이 인상을 썼다.
“여기서 끝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진짜 문제는 다음 문구예요.”
“……?”
“미국의 간악한 행동에 대응하기 위해 무역 보복 조치 등 한국에 대한 분명하고 대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어요.”
표정이 더욱 굳어진 박경수 회장과 재현, 재경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환구시보가 인민일보와 함께 중국 공산당의 의중을 대외적으로 밝히는 입이라는 걸 알고 계실 거예요. 그럼 이 기사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겠어요?”
“곧 중국의 강한 보복이 있을 거라는 예고라는 뜻이구나.”
박경수 회장의 말에 재성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직접적인 보복이 없다고 하겠지만 조만간 한국 정부와 기업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박이 가해질 게 분명해요.”
“그럼 강도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
박경수 회장의 물음에 재성이 바로 대답했다.
“몇 년 전에 센카쿠 열도 문제로 중국이 일본에 희토류 보복을 한 걸 기억하시죠?”
“그래.”
2010년 일본과 중국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센카쿠 열도 인근에서 불법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을 일본이 나포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중국이 강력 반발하면서 최첨단 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희토류의 대일 수출을 전면 중단하는 보복 조치를 취했다.
‘희토류 수출 금지뿐만 아니라 공산당 정부의 방조 아래 중국 전역에서 과격 시위대가 일본 기업과 국민들을 공격하고 테러까지 가하는 일이 벌어졌지.’
산업의 비타민이라고 불리는 희토류는 전 세계 생산량의 97%를 중국이 쥐고 있었기에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일본 정부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중국을 글로벌 생산 체인의 핵심 거점으로 여기던 전 세계 각국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과도한 중국 의존율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은 이런 일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놓고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다가 몇 년 뒤에 요소수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되지.’
이러다가 나중에 요소수까지 만들어야 되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됐다.
잠깐 떠오른 잡념을 지우며 재성이 말했다.
“그때보다 더 폭넓은 분야에서 장기적으로 보복이 이어질 거예요.”
“으음.”
당시에도 중국의 보복으로 인해 일본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것보다 심할 거라고 하자 박경수 회장의 얼굴에 우려가 가득 떠올랐다.
“일본이 당했던 것처럼 중국 내부에서 반한 감정이 크게 고조되며 현지에 있는 한국 기업의 운영과 수출에 타격이 불가피할 거예요. 그리고 최근 몇 년간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중국인들의 한국 단체 관광 역시 중단될 가능성이 크고요.”
“관광객들까지 막는다고?”
재경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다그치듯 말했다.
“한국을 찾는 관광객 1위가 중국인이라는 건 알고 있지? 그런 만큼 중국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한국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인데 안 쓸 이유가 없지 않겠어.”
이해는 했지만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재경이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관광객을 제한하면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사업체들이 바로 타격을 받을 테니 받아들이기 싫은 마음도 이해가 갔다.
“작년 한해 한국을 찾은 중국 관광객이 611만 명에 달하고 이들이 쓴 돈이 무려 220억 달러나 된다는 걸 누나도 잘 알고 있을 거야.”
폭증하는 중국 관광객을 상대하기 위해 얼마 전까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대거 뽑았었기에 재경이 머리를 끄덕였다.
“명동과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의 관광지를 가득 메우던 중국 관광객들이 갑자기 싹 사라진다고 생각해 봐. 어떻게 되겠어.”
“국내 관광 산업이 큰 충격을 받게 되겠지.”
재경은 심각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바로 그거야. 중국이 화가 났다는 걸 한국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동시에 실질적인 피해까지 입힐 수 있으니 중국 입장에선 일석이조지. 무엇보다 여행사에 간단한 행정 지시만 내리면 바로 단체 여행을 중단시킬 수 있으니까 얼마나 편해.”
중국 정부 입장에선 장점뿐이니 손을 안 댈 이유가 없었다.
“중국의 고위 인사를 통해 알아봤는데 이미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걸 확인했어.”
재성은 긴가민가하는 가족들의 생각에 바로 쐐기를 박았다.
화젠민 주석과 의형제를 맺고 있는 재성보다 중국에 대해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사드 보복이 확정적이라는 믿음이 모두의 머릿속에 뿌리박히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재성이 말대로 된다면 피해가 얼마나 될 것 같냐?”
재성은 벌써 대비를 다 해놨고, 미리 조언을 받아들인 덕에 제일 그룹도 타격이 있긴 하겠지만 크게 흔들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호텔과 백화점, 면세점이 주력 사업인 재경은 달랐다.
어떤 분야든 다 관광과 연계가 되어 있는 데다 어디서든 큰손으로 통하는 중국인 관광객이 막혀 버리면 매출이 반 토막이 날 건 기정사실이었다.
“제가 운영하는 사업 전부 매출에 심각한 타격이 있을 거예요. 백화점은 내수로 어떻게 한다고 해도 호텔과 백화점은 관광객이 들어오지 않으면…….”
재경이 마른침을 삼켰다.
“특히 면세점은 중국 관광객의 비율이 절반이 넘어요. 작년만 해도 매출의 64%를 차지할 정도인데 만약 예상대로 된다면 그야말로 치명적이라고요. 최소 6천억에서 1조 원까지 마이너스를 찍을 각오를 해야 할 수도 있어요.”
세 남매 가운데 사업체 규모가 가장 작은 걸 생각하면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대책은 있느냐?”
힐끗 동생을 쳐다보고는 재경이 대답했다.
“일단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당장 다른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걸 박경수 회장 역시 알았기에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계열 분리를 해서 나간 이상 경영은 오롯이 네 책임이니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재성이가 상황이 장기화될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두도록 해라.”
“네. 그럴게요.”
박경수 회장은 시선을 큰아들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넌 지난번에 결정한 대로 중국에 있는 생산 거점을 옮기는 작업을 계획보다 더욱 앞당겨서 마무리 짓도록 해라.”
“예.”
대답을 들은 박경수 회장은 마지막으로 재성을 향했다.
“넌 벌써 준비를 다 끝내놓은 것 같으니 내가 따로 말해둘 게 없겠지.”
재성을 보는 박경수 회장의 시선에 신뢰가 가득했다.
중국 리스크에 대해 미리 경고해 준 덕분에 그나마 다른 그룹들보다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됐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 뒤로도 머리를 맞대고 한참 동안 이어진 대화는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겨우 끝이 났다.
박재현은 본가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기에 재성과 재경 두 사람만 밖으로 나왔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정원을 걸어갈 때 문득 재경이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고마워.”
재성이 쳐다보자 재경은 어쩐 일인지 진지하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네 말을 듣지 않고 중국에 호텔과 백화점을 진출시켰으면 손해가 클 뻔했어. 그리고 작년부터 위기가 올 수 있으니 현금을 최대한 쌓아두라고 충고까지 해줬잖아.”
“뭐야, 웬일로 이렇게 고분고분해?”
“아 진짜. 고맙다고 할 때 순순히 받아들여, 좀.”
재경이 팍 인상을 쓰면서 흘겨보았다.
“너,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예상하고 있던 거지?”
“꼭 그런 건 아니야.”
발밑에 있던 돌을 툭툭 치면서 재성은 슬그머니 딴청을 부렸다.
“잘나갈 때 위기를 대비하라는 말이 있잖아. 원래 호황 뒤에는 꼭 함정이 있기 마련이거든.”
“하긴. 지난 몇 년간 중국 관광객들 덕분에 호텔과 면세점 사업이 엄청 잘되긴 했지. 이제 좋았던 시절도 끝이지만.”
재경은 아쉬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시내 신규 면세점 입찰에서 떨어진 게 천만다행이네. 만약 무리해서 낙찰받았다면 피해가 장난 아니었을 거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것처럼 재경이 진저리를 쳤다.
중국인 관광객 특수로 인해 면세점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자 바로 지난달에 시내 면세점 4곳을 새로 허가하는 입찰이 있었다.
제일 백화점을 비롯해 무려 11곳이 넘는 업체가 참여하며 과열 경쟁을 벌였다.
이러다 보니 5년간 유효한 면세점 특허권 낙찰 가격이 수천억대로 치솟아 오르기까지 했다.
“9월에 예정된 2차 면세점 입찰은 아예 참여하지 않는 게 좋겠지?”
진지한 물음에 재성은 잠깐 생각하고서 대답했다.
“아니. 싼값에 면세점 특허를 가져올 기회가 될 테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봐.”
하반기 입찰에는 현재 제일 백화점에서 운영 중인 인천 국제공항 면세점 운영권도 포함되어 있어 내심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재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에 네가 사드 보복으로 중국 관광객들이 막힐 거라고 했잖아.”
“그렇지.”
“그런데도 면세점 입찰에 참여하라고?”
재성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재경을 바라보았다.
“그사이에 사드 문제가 해결 될 수도 있잖아.”
“무슨 소리야, 대체.”
답답하다는 것처럼 재경이 물었지만 재성은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고 말을 빙 둘렀다.
“당장 어떻게 된다고 말해줄 순 없어. 하지만 상황은 항상 유동적인 거니까. 일이 잘 풀렸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입찰 준비는 해둬.”
그러자 눈치 빠른 재경이 바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향했다.
“너 또 뭔가 꾸미는 게 있지?”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재성은 찌를 듯한 시선을 은근슬쩍 피하면서 말했다.
“누나도 지금까지 애써 키운 인천공항 면세점을 빼앗기기 싫잖아.”
“당연하지.”
“그러니까 아무튼 여러 경우의 수를 준비해 놓으라고. 그 정도야 나쁠 건 없잖아?”
재성은 꼬치꼬치 캐묻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손을 흔들면서 성큼 걸어 가버리는 재성의 뒷모습을 재경이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분명히 뭐가 있는 게 확실해.”
재경은 팔짱을 낀 자세로 삐딱하게 서서 중얼거렸다.
숨기고 있는 게 뭔지 궁금하긴 했지만 재성이 저렇게 입을 다물어 버리면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재성의 말대로 사드 문제만 해결된다면 경쟁업체들이 다 발을 빼려고 할 때 면세점 특허권을 싸게 가져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손아영 그 계집애가 엄청 배 아파하겠지?”
인천공항 면세점을 놓고 항상 다투던 라이벌을 단숨에 제쳐 버릴 수 있는 찬스였다.
재경은 생각만 해도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성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