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46
제46화
하벤베르크 검술 제5 절기 개화.
그것 또한 조상님이 과거에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만들어낸 기술이라 하셨다.
– 상대가 너에게 겨울을 가져왔더냐.
“예. 너무나도 강력한 추위가…, 왔습니다.”
– 제5 절기 개화는 적어도 하벤베르크 검술 중급 이상은 되어야 펼칠 수 있는 기술이니라. 네가 만들어낸 그 기술은 아직 네 실력으로는 무리다.
“근데 제가 어떻게 그 기술을 만든 것입니까?”
조상님의 입이 순간 다물어졌다.
심각하게 굳은 얼굴. 고요한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관찰하듯 고정되어 있다.
– 네 녀석의 직관력이 뛰어난 탓이겠지.
“제… 직관력…이요?”
– 그래. 검의 본질을 꿰뚫고 그 최종본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너는 가진 게다.
“검의 최종본…….”
– 그걸 누군가는 검의 극의, 검신의 경지라고 하지.
초혼을 잡은 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내게 그런 재능이 있다니. 한평생 사람들에게 무시만 받으며 살아와서 그런지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조상님은 그 검신의 경지에 오르셨습니까?”
– ……그랬다면 내가 그리 허무하게 죽지 않았겠지.
조상님조차 이루지 못한 경지.
대륙 최고의 검사라고 불리는 그 하벤베르크 아르젠도 보지 못할 정도라면 그 끝은 얼마나 멀고 험난할까.
– 자만하지 마라. 난 네 나이에 이미 결전기의 대부분을 펼칠 수 있었으니.
“……예.”
– 제5 절기를 배우는 건 나중이다. 제1 절기 장막 찌르기부터 완성하거라.
“예.”
다행이다. 내 곁에 조상님이라는 뛰어난 스승이 계셔서.
나 혼자 훈련했다면 순간적으로 펼쳤던 검의 허상에 빠져 잘못된 길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 그놈들과 싸우기 전에 장막 찌르기 완성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임하거라.
“알겠습니다!”
* * *
카르 가문의 셋째와 붙는 날이 되었다.
대련장은 카르 가문의 대련 경기장.
이미 가문의 저택에는 밤에 있을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귀족들이 도착해 있는 상황이었다.
“어머, 1왕녀 전하 오셨어요?”
먼저 저택에 도착해 있던 엘리 헤르티아가 제인을 맞이하며 인사했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가문에 있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은빛 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아름다운 왕족의 자태.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고개를 숙였던 젊은 귀족들이 홀린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1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르 가문의 가주 실리안 카르가 그녀를 마중 나와 격식을 갖추고 인사했다.
“가문의 파티에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1왕녀 전하께서 오셔서 저희가 더 영광이옵니다.”
실리안은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브릴런트의 귀족 중에서 그렇게 권세가 대단하지는 않은 중간층의 귀족.
트레비스나 로저스 가문에 비하면 훨씬 떨어지는 곳이었으나, 이번에 운이 좋게 2왕녀와 연이 닿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1왕녀와도 안면을 틀 기회가 생긴 건 그들에게 꽤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상당히 여유가 있으시네요?”
톡 쏘는 듯한, 빈정거리는 말투에 고개를 돌린 제인이 그제야 엘리를 보고 방긋 웃는다.
“아, 엘리도 있었구나?”
그 말에 엘리는 속으로 제인을 욕하면서도 겉으론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럼요. 여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긴장 돼서 저를 못 보신 건가요?”
“그럴 리가. 내가 긴장할 이유가 없잖니? 어차피 결투는 우리 쪽이 이길 텐데 말이야.”
순간 엘리의 눈가가 씰룩였다.
“상당히 자신만만하신데……, 그럼 판을 조금 더 키워볼까요? 1왕녀. 전. 하?”
“그럼 나야 좋지. 나의 철부지 동생, 엘. 리. 야?”
만나자마자 숨 막히는 분위기에 옆에 서 있던 실리안 카르가 땀을 삐질 흘렸다.
“저……,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안에 들어가서 편히 이야기하시지요.”
“감사해요. 실리안 경. 그럼 실례하겠어요.”
“아닙니다. 1왕녀 전하.”
제인이 먼저 그의 말을 받고 걸어 움직였다.
“2왕녀 전하께서도 가시지요.”
“칫.”
엘리가 혀를 차며 제인의 옆을 빠르게 걸어 지나간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본 실리안이 땀을 한 번 훔치며 둘을 따라갔다.
하인들이 빠르게 두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방을 정리하고 차와 쿠키를 탁상 위에 세팅했다.
마주 앉은 제인과 엘리.
그리고 그 사이에 실리안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앉았다.
“그래, 판을 키우자는 게 무슨 소리일까?”
“자신 있다면서요? 그럼 우리 화끈하게 내기나 하자는 거죠.”
“이미 내기는 걸려 있는 걸로 아는데?”
“어머? 언니, 우리끼리 하자는 건데. 왜 모르는 척이실까요?”
눈이 많던 바깥에서의 내숭 가득한 말투는 집어던진 엘리가 웃으며 묻는다.
제인은 그런 엘리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고개를 까닥였다.
“말해 봐.”
“언니는 루이즈 오라버니를, 나는 우리 2왕자 알란 오라버니를 밀고 있죠.”
“그래서?”
“여기서 지는 사람 서로 손 떼는 거 어때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절대 이번 싸움에서 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
그에 따른 파격적인 내기를 제안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그 상황을 즐긴다.
‘네가 이 제안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제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리란 걸 확신하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저 제인이 당황하여 자신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기에.
그녀는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큭.”
제인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고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예상과는 다른 매우 여유로운 태도.
재밌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그 모습에 엘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귀엽네.”
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한마디 툭 내던진 그녀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원하는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이 내기를 수락할지 안 할지 그에 대한 답변은 저 찻잔이 다시 탁상에 올라가고 입안 가득 퍼진 찻물이 식도를 넘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는 건 엘리뿐 만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실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달그락.
그녀가 차를 기분 좋게 음미하고는 미소 짓는다.
“하자. 그 내기.”
“하, 한다고…요?”
엘리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실리안 또한 놀란 얼굴로 제인을 보았다.
“그래, 하자고. 실리안 경께서 공증을 서주시죠.”
“예? 제, 제가 말씀이십니까?”
실리안은 순간 이 자리에 참석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괜한 일에 끼어들어 버린 것이다.
왕권 투쟁에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한순간에 가문이 휘청거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실리안 경께서 저희 둘의 약속을 공증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실리안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요. 이번 카르 가문의 셋째, 로니 카르 경과 저희 렌 아르젠 경의 대결 승패에 따라, 로니 카르 경이 이겼을 경우 제가 왕위 경쟁에서 3왕자의 지원에 손을 떼고, 렌 아르젠 경이 이겼을 경우 엘리 헤르티아가 2왕자의 지원에서 손을 떼는 거예요.”
“동의할게요.”
“카르 가문의 가주, 실리안 카르는 이번 대결을 가문의 이름을 걸고 공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실리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선언했다.
“그럼 각서도 쓰죠?”
엘리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제인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럼요. 확실한 게 좋잖아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여기, 종이와 펜을 가지고 오너라!”
실리안의 외침에 하인이 바로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실리안은 빠르게 내용을 써 내려갔고, 제인과 엘리는 그곳에 지장을 찍었다.
“서로 하나씩 갖는 걸로 하죠.”
“좋아.”
종이 하나를 둘둘 말아 챙긴 제인이 싱긋 웃으며 일어섰다.
“그럼, 이따 보자.”
그녀가 나가자, 엘리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뺨이 부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던 실리안이 기겁하며 방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그를 잡았다.
“실리안 가주님.”
“예. 2왕녀 전하.”
“로니 카르 경은 뭐 하고 있나요?”
“아마 밖에서 귀족들을 맞이하고 있을 겁니다.”
“네? 지금 그딴 게 중요해요? 이제 곧 대결인데! 뭐 하고 있는 거예요!”
갑작스런 호통에 움찔한 실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녀석에게 바로 훈련장으로 이동하라 이르겠습니다.”
“확실히 하세요. 혹여나 로니 카르 경이 진다면 저뿐만 아니라 카르 가문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엘리 카르가 방을 나가고 실리안은 과거의 자신을 질책했다.
‘내가 왜 2왕녀와 엮여서는…….’
방을 나서고 로비로 내려가자, 로니 카르의 모습이 보인다.
젊은 귀족들과 이야기하며 교류하고 있었다.
실리안은 그에게 가려다 멈칫하고는 마침 위에서 내려오는 집사를 불러 세웠다.
“2왕녀 전하께서는 뭐 하고 계시지?”
“자신의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알겠네. 혹여 나오시는지 확인하고 그리하면 내게 말하게.”
“알겠습니다.”
그는 방향을 틀어 저택의 뒤뜰로 향했다.
애초에 실리안은 이번 대결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다.
데케인의 묘지기, 아르젠 가문의 사생아, 렌 아르젠.
그의 이름은 몇 번 들어보았다. 이번 일로 인해 뒷조사도 해봤지만 나오는 건 별거 없었다.
그가 이번에 새로 얻었다던 초혼이라는 명검.
그것과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걸고 내기를 시작한 이번 대결은 실리안의 의사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치기 어린 자식들의 실수였다.
“찜찜하군.”
고작 근 몇 달 전까지 렌 아르젠은 검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쓰레기였고, 최근엔 검 조금 쓸 줄 아는 준기사급의 검사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 확실하지 않은 풍문일 뿐.
아르젠은 대륙 제일의 검가이며, 그 직계들은 말도 안 되는 검의 재능을 가진 이들이다.
렌 아르젠 또한 아르젠 가문에서 쫓겨난 자식이라 해도 가주의 피를 이은 자식이다.
과연 정말 쓰레기 같은 재능을 가진 것일까?
혹여 아르젠의 가주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수를 쓴 것이면?
아니면 뒤늦게라도 재능을 개화하여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라면?
‘최근 렌의 행보는 심상치 않아.’
생전 관심도 없던 검을 만들지 않나, 트레비스와의 교류가 빈번해지지 않나, 사막 원정대에서 루이즈의 공격대와 함께 살아 돌아오지 않나.
특히나 제인 공주의 그 여유.
불길하다.
하지만 이미 가문의 보물 중 하나인 ‘메세이어의 반지’가 걸린 이상 싸움은 이기긴 해야 한다.
‘지기라도 한다면?’
2왕녀는 권력 구도에서 떨어져 나가며 끈 떨어진 신세가 될 것이고, 2왕자의 힘도 약해질 터.
2왕녀는 분명 가문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카르 가문은 그것을 버틸 힘이 없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로니가 이기는 것이지만…….’
망할 이 직감은 최대한 빠르게 발을 돌리라 말하고 있다.
분명 렌이 이길 확률은 매우 낮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렌은 준기사에게 얻어터진 적이 있었고 검술 실력은 확실히 형편없다는 게 증명되었었으니.
그 짧은 시간 안에 기사급으로 올라오는 건 불가능하다. 하물며 2왕녀가 준비한 것을 생각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 절대…….
“너무 생각이 많은 건가…….”
“무슨 생각이 그리 많으신가?”
낯선 목소리에 실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뜰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이가 웃으며 벽에 기대어 있다.
“코헨……님?”
왕령 행정관, 코헨 트레비스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실리안 카르.”
“코르미르에 계신 것 아니셨습니까? 여긴 어쩐 일로?”
“가문이 갑자기 바빠져서 말이지. 일손이 부족해서 나도 잠시 일이 있어 온 김에 이곳에 들렸다네.”
“그러셨습니까? 초대장은 제가 보내긴 했습니다만……, 오실 줄 알았으면 제가 마중 나갔을 텐데요.”
“아니네. 파티를 즐기러 온 건 아니니. 뵐 분이 있어서 온 걸세. 바쁘기도 하고 말이네.”
“뵐 분이라면…….”
“그건 차차 말해주지. 그나저나 자네가 고민이 많아 보이던데. 내가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실리안은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코헨 트레비스를 무시할 수는 없기에 어지러운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하려 애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네, 지금 저울질하고 있지 않은가?”
코헨이 눈가를 길게 늘이며 웃었다.
“그걸 어떻게?”
“눈치 빠르고 머리 잘 굴리던 자네도 많이 늙었군. 아직도 계산이 끝나지 않은 걸 보니 말이야. 흘흘.”
가벼운 웃음을 흘리던 코헨이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어떤 추가 더 무거운지 확실히 알려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