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45
786화 푸른 산도 막을 수 없는 (1)
고하 대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추밀원 정사도 그 흐느낌을 듣고는 순간 비통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북제가 맞이하게 될 참담한 미래를 떠올린 그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고,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드리웠다.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두 걸음 기어간 그가 고하 대사 앞에서 세 번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한 뒤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남쪽에 있는 상삼호 장군과 상경에 있는 저는 목숨을 바쳐 나라가 조금의 손실도 입지 않도록 지킬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폐하의 안위만큼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고하가 온화한 눈길로 추밀원 정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산에서 내려간 지도 20년이 흘렀구나. 북제의 미래를 위해 네가 사력을 다해 노력해주어야 한다.”
추밀원 정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고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방을 나온 그는 문밖에서 새파랗게 질린 채 서 있는 황제 폐하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북제 황제는 신하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오는 걸 보자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마치 아주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북제 황제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 옆에 있던 랑도가 황제 폐하의 옷소매를 잡았다. 북제 황제가 고개를 돌려 랑도를 차갑게 노려보자 순간 랑도는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두려워졌다.
랑도에게 무예를 배운 북제 황제는 사실 무예에 조금의 재능도 없었지만, 제왕으로서 위엄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너희들도 들어오거라.”
고하 대사의 담담한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 북제 황제가 의복을 고치고는 몸을 돌려 황태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산 정상 천일도 건물 안에는 고목처럼 앉아 있는 고하와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 몇 명, 그리고 황제와 황태후뿐이었다.
고하는 정말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았다.
비록 넓고 부드러운 두루마리가 대종사의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고하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충격을 받았다. 마치 얇은 두루마리를 뚫고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진 고하 대사의 몸과······ 옷깃 부분에 옅게 묻은 핏자국을 본 것 같았다.
이와 같은 부상은 인간의 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북제 황제가 허례허식 없이 곧장 고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작은할아버지.”
황제란 천하 모든 사람에게 절을 받을지언정 누구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북제 젊은 황제는 지금까지 살면서 고하에게 두 번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그중 한 번은 그가 아주 어렸던 때로 선황이 서거하셨을 때였다. 황태후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 황제는 아름다운 상경성 황궁 정전에서 고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했다.
이후 고하는 두 모자를 십여 년 동안 지켜주었고 북제 황족인 전씨 집안을 지켜주었으며, 어린 황제가 성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북제 황제는 두 번째로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면서 작은할아버지와 이별을 고했다.
북제 황제는 신격화된 작은 할아버지에게 항상 거리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 고마움이 더 컸다. 고하 옆에 앉은 황태후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요. 천하에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고하가 눈꺼풀을 내려뜨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오래 살았으니 그동안 하늘의 혜택을 많은 받은 셈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경국에 있는 그 사람도 예외는 아니지요.”
대동산 정상에서 있었던 일을 고하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상삼호가 자신이 추측한 내용을 상경성 황궁에 보고한 상태였다. 그래서 고하 대사의 말을 듣자 북제 황제는 경국의 그 사람에 대한 추측이 맞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서늘해졌다.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하가 담담히 말했다.
“두려우신 겁니까?”
입을 꾹 다문 북제 황제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생을 경국 황제와 싸우는 걸 목표로 삼고, 심지어는 남몰래 그를 우상으로 생각했던 북제 황제는 언젠가는 자신이 경국 황제를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보니 십여 년 동안 경국 황제는 참고 인내하면서 모두를 속여 왔다. 사실을 알게 된 북제 황제는 주도면밀하고 생각이 깊은 경국 황제가 자신보다 훨씬 노련하고 악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그는 대종사이기까지 했다.
“두려움은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고하가 담담히 말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제 양미간을 눌렀을 때 저도······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제왕의 지략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대종사의 경지에까지 올라 있어 조금의 틈이나 약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가장 두려운 면은 참고 인내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참고 인내하였고, 결국에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마침내 이뤄내었으니까요. 이런 인물은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고하 대사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경국 황제를 평가했다.
“세상 사람들은 저를 신과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잘못된 겁니다. 아무도 몰랐지만 사실은 남쪽에서 애정도 미움도 사랑도 없이 고독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설마······ 경국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한 사람은 랑도였다. 폐하도 이 질문을 하고 싶지만, 제왕의 신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랑도가 대신 질문한 거였다.
“무예와 권력과 지혜, 이 세 가지 방면 모두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지.”
고하가 약간 피곤한 듯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
“외부 공격으로 그를 쓰러뜨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이때 고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북제 황제의 눈에 두 가지 감정이 비쳤다. 그가 갑자기 몸을 굽히며 말했다.
“작은할아버지, 짐은······ 신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싶습니다.”
신묘.
이 두 글자가 황제의 입에 나오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방 안에 있는 여섯 명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 눈이 마주친 랑도와 백삼은 상대방의 눈에서 놀란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승의 몸을 살며시 부축하고 있는 목봉도 경악한 표정으로 황제 폐하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천일도의 세 명의 수제자들의 눈에 약간의 설렘과 흥분이 비쳤다.
그렇다. 지금 천하에서 경국 황제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신묘가 있었다. 신묘의 도움을 받는다면 혹시 대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신묘는 허무맹랑한 신화나 전설에서만 나오는 존재 같았지만, 방 안에 있는 여섯 명의 사람 중에 신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소은이 죽은 지금 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묘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한 사람이자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고하 대사였다.
북제 황제는 줄곧 신묘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신묘의 힘을 얻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소은을 감옥에서 구하려 했다.
북제 황제가 고하 일파의 힘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까지 소은을 구하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 머릿속에 있는 비밀을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신묘라 하셨습니까?”
고하 대사가 천천히 눈을 뜨고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황제 폐하를 바라봤다.
북제 황제는 작은할아버지가 분노에 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묘에 가본 그는 줄곧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신묘의 존재를 숨기려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하의 눈빛에는 옅은 웃음기만 있었다. 아주 복잡 미묘한 웃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모두가 경국의 황제를 이길 수 없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전설과 같은 신묘에 희망을 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는 신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고하가 다시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
“하지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이대로 비밀을 무덤 속까지 가져간다면 앞으로 북제는 어떻게 지키란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두 눈을 감은 고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신묘는······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일 뿐입니다. 지금껏 세상일에 간섭해 오지 않은 신묘를 굳이 찾아가 괴롭힐 필요가 없지요.”
모두가 대답할 새도 없이 고하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신묘가 정말 모든 걸 다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가 눈을 부릅뜨고 앞에 있는 황제 폐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사물에 희망을 걸지 마십시오.”
“폐하······ 저는 이번에 대동산에 가기 전에 사고검을 만나 모든 상황을 대비해 충분한 준비를 했었습니다.”
고하가 황제를 바라보며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사고검과 제가 경제의 마지막 패를 뭐라 추측했는지 아십니까?”
북제 황제가 실의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 그 역시 대종사와 신묘라는 기괴한 존재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저와 사고검은 경제가 마지막에는 신묘 사람의 도움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고하를 제외한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경국 황제가 신묘와 몰래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걸까?
고하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신묘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할 것은 신묘가 세상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깨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경제도 이런 일을 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고하보다 더 신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그가 아는 것도 수박 겉핥기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사람을 알고 있기에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신묘는 세상일에 간섭하지 않지만, 만약 정말 경제를 돕기 위해 신묘에서 사람이 온다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장님은 분명 신묘와 반대편에 설 거였다. 이것이 고하가 이 일을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세상에는 신통력을 가진 황제도 없고 세상을 구할 구세주도 없습니다.”
고하가 탄식하며 아주 오래전에 꼬마 선녀가 그와 소은에게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대종사의 경지에 오르면 비로소 신묘가 사실은 모두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신묘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존재로 죽은 사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고하의 목소리를 가냘팠지만, 신묘에 대한 평가만큼은 아주 냉정하고 정확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애달 달아서 마음이 타들어 갈 지경인 북제 황제는 고하 대사의 몇 마디 말에 신묘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작은할아버지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는 신묘에 관해 묻지 못했다.
“외부 공격으로 쓰러뜨릴 수 없을 때는 내부에서 어떤 문제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고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국이 대군을 북쪽에 파견하려면 최소한 3년의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폐하께서는 앞으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이 시간을 최대한 늦추셔야 합니다.”
“시간을 늦추라고요?”
곰곰이 생각하던 북제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을 늦추는 건 일시적인 해결책밖에는 되지 않았다.
“시간을 늦추면 늦출수록 저희에게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경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고하의 말을 곱씹어 보던 북제 황제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작은할아버지 말씀은······ 그러니까 범한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