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8
057화 마대
범한은 등자경의 부하들을 보며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곽보곤을 때리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자신을 놀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 위함이었지만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곽보곤은 예부 상서의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때린 사람이 범한이라는 걸 안다면 귀족 집안 자제들의 싸움으로 여겨질 것이므로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범한, 잡놈의 새끼! 감히 나를 때려죽이려 하다니!”
이 말을 들은 범한이 손을 내저어 등자경의 부하들을 물러나게 한 뒤 마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때린 뒤 자신을 피해 끊임없이 굴러가는 마대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곽 형, 아까 오후에 왜 나에게 시를 지어 보라고 했소?”
범한의 힘이 너무 세서 마대 속에 있는 곽보곤은 고통에 아무 말 없이 흑흑 울기만 했다.
“바람은 거세고 하늘은 높으니 원숭이가 슬피 울고, 맑은 하천가 하얀 모래섬에 새들이 날아돌아 오네. 끝없이 아득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무궁한 큰 강은 세차게 흐른다.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되어 평생 많은 병을 앓으며 홀로 높은 곳에 올랐구나. 고난과 힘겨움에 어느새 머리는 하얗게 새어 버려 초라한 심정에 마시던 탁주 잔을 새로 멈춘다. 자네는 나를 두 번이나 모욕했어. 그러니 자네가 오늘 받은 슬픔과 고통은 내가 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
말을 끝낸 범한이 마대 안에 있는 곽보곤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무슨 수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에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정확하게 조준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범한의 매서운 주먹은 곽보곤의 콧등을 명중했다. 코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얼얼해질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얼굴이 피범벅이 된 곽보곤은 고통을 참지 못해 울부짖으며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범한은 계속해서 꿈틀대는 마대를 보면서 자신의 내면에 잔인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몇 년 동안 감춰져 있었던 부분이 천천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그가 마대에 발길질했다. 그러고는 손을 저어 부하들을 해산시키고는 곽보곤의 원망이 미치지 못하도록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난 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든 곽보곤이 마대 안에서 나왔다. 그가 일어나 땅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호위병과 가마꾼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발길질을 했다. 아무리 때려도 반응이 없자 그는 그제야 모두가 마취 약에 절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정신을 맑게 했던 상쾌한 향기가 떠올렸다. 처음부터 해독제는 마대 안에 있던 것이다. 곽보곤이 원통함에 이를 갈며 마대 안에서 해독제를 꺼냈다.
마침내 깨어난 호위병들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자신이 지키는 공자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부축했다. 가마에 탈 수도 없었기에 곽보곤은 호위병의 등에 업혀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날 저녁 상서가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상서가 사람이 경도부를 찾아왔다. 소장을 제출한 상서가 사람은 이부 시랑 겸 경도 부윤인 매집례를 직접 찾아가 어젯밤에 있었던 비극을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상서가 체면을 위해서라도 겁 없이 거리 한복판에서 사람을 폭행한 백작가 서자에게 중죄를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사리리는 달콤한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낭군을 만나 화촉 아래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눴다. 서서히 잠에서 깬 그녀의 눈에 낯설면서 아름다운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비로소 어젯밤 자신이 아름다운 범 공자에게 안겼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데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지?’
이런 생각이 들자 사리리는 왠지 모르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결국 계속 저항했던 길에 들어섰다는 걸 알았지만 머릿속 기억들이 흐릿했고 온몸이 나른했다.
옆의 남자가 움직이자 사리리가 재빨리 눈을 감고 잠자는 척했다. 깨어난 범한이 잠자고 있는 사리리를 보고는 그녀를 품에 안더니 잠시 뒤 씻고 배에서 나왔다.
범한이 떠난 뒤 사리리가 눈을 떴다. 그녀는 어젯밤 현장을 치우던 중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부끄러우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범한이 놀잇배를 떠날 때는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세자는 방 안에서 원몽을 품에 안고 잠이 들어 있었기에 범한은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났다. 그가 이렇게 서둘러 떠나는 이유는 경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낯선 기생집에서 있는 게 불편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상서가에서 곧 있으면 한바탕 난리를 피울 것이므로 저택에 가서 상황을 살펴야 했다.
어젯밤에 사리리와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은 범한이 무슨 지조를 중시하는 성인군자라서가 아니었다. 그냥 단순한 결벽증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었던 여자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전 세계에서 성병 예방 홍보 문구를 많이 보았기에 화류계에서 유행하는 성병에 걸릴까 두려웠다. 더구나 이 세계에는 콘돔도 없었다.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며 노는 거야 상관없었지만 그 이상의 것을 하는 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범한은 아쉬운 마음에 서글픈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담주에 있을 때 사사와 관계를 진척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가마가 저택 쪽문에 이르자 범한을 지키던 서너 명의 호위병들이 문 건너 호위병에게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문을 열라고 말했다. 문을 지키던 호위병은 등자경과 담주에서 온 도련님이 있는 걸 알고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방에 돌아온 범한은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깨어나 보니 이미 날을 밝아 있었다. 그가 나막신을 신고 앞마당에 나와 보니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속으로 일이 터졌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 아침 서재에서 밀려오는 졸음과 싸우고 있던 경도 부윤 매집례는 급히 울리는 북소리를 듣자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일었다. 조정이 정한 법이 있는 이상 자신도 태만할 수는 없었다. 그가 공당에 들어서자 막료가 소장을 건네줬다.
매집례는 소장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원고와 피고가 모두 쉽게 다룰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원고에는 예부 상서 곽유지의 외동아들이자 현재 황궁 편찬인 곽보곤이 적혀 있었고, 피고에는 호부 시랑 범건의 서자 범한이 적혀 있었다. 고소 이유는 어젯밤 범한이 길 한복판에서 조정의 관리인 곽보곤을 마구잡이로 구타했다는 것이었다.
소장의 두 이름을 보자 매집례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현재 조정은 황태자를 지지하는 쪽과 아직 공식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지만 은밀히 2 황자를 지지하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예부 상서 곽유지는 황태자의 스승이었기에 자연적으로 황태자를 지지하는 쪽이었고, 호부 시랑 범건은 겉으로는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지만 정왕가와 교류가 깊었다. 그리고 정왕 세자는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듯 2 황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간단한 폭행 사건이었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황태자와 2 황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자극해 싸울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매집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경거망동하게 행동한 범한을 속으로 욕했다. 범한의 명성이 점점 경도에 퍼져 나가 이제는 관리들도 그가 담주에서 자란 사남 백작의 서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매집례는 담주에서 조용히 살던 백작가 서자가 어째서 경도 대로 한복판에서 사람을 폭행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 사건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장에 명명백백하게 목격자와 물증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이상 매집례도 사건을 미룰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소장을 보던 그가 담당자를 백작가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 최대한 빨리 호부 관아로 가서 범 시랑에게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범한은 자신을 체포하러 경도부에서 관차들이 온 걸 알았다. 하지만 백작가와 황가의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포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더구나 집 안에는 종들과 호위병들이 다 동원되어 안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단 한 발자국도 집 안에 들이지 않겠다는 듯 몽둥이를 들고 결연한 표정으로 관차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입구에서 서서 난감한 표정을 짓던 관차들은 체포해 오라는 명령은 받았지만 백작가 명성을 생각해, 피고인이 직접 관아에 방문해 주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듣던 범한이 웃으며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온 졸개들이야! 다 쫓아 버려!”
관차들을 향해 큰 소리로 욕하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범사철이었다.
범사철의 말을 들은 종과 호위병들이 몽둥이를 들고 소리치며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상대는 관아에서 파견된 관차들이었기에 정말 때리지는 않고 몽둥이로 땅을 내리치며 물러나게 했다. 관차들이 울상을 지으며 난감해했다. 집안 종들이 가로막고 위협하니 처량하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소란이야.”
이때 유씨 부인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며 나왔다. 그녀는 관차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안으로 들여 차를 대접하라고 분부했다. 그러고는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이 무고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응접실에서 관차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유씨 부인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들은 신분상 이런 대접은 결코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작가 안주인의 호의를 무시했다가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앞으로 경도에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물어보던 유씨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말이 안 되는군요. 어제 범 공자는 정왕가 시 모임에 참석한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책을 읽었는걸요. 외양간 대로는 저희 저택과 멀리 있는데 어떻게 범 공자가 거기까지 가서 상서가 아들을 때렸다는 거죠?”
관차가 곤란해하며 말했다.
“이건 곽 공자가 직접 한 말입니다. 게다가······.”
그가 말끝을 늘이더니 유씨 부인의 눈치를 보았다.
“범 공자가 어젯밤에 줄곧 저택에 머물렀던 걸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유씨 부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관차를 노려보았다.
“지금 백작가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요?”
관차가 화들짝 놀라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공당에서 원고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옆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범한은 유씨 부인이 어째서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명문가들이 집안에서 격렬한 알력 싸움을 하더라도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오면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유씨 부인이 차를 마시며 관차들을 살폈다. 그녀도 관차들이 강제로 체포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서가에서 우리 범 공자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말했다고요? 그쪽에서 이미 소장을 냈으니 저희도 따를 수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이렇게 갈 수는 없어요. 백작가가 비록 명문가는 아니지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체포되는 수모를 당할 수는 없잖아요. 오늘 관아에 소장을 제출한 사람은 누구지요?”
“상서가의 집사입니다.”
관차가 속으로 백작가가 명문가가 아니라면 어느 집안이 명문가일까 생각하다 급히 대답했다.
집사가 소장을 제출했다는 말을 들은 유씨 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고작 집사가 제출한 소장에 우리 범 공자가 가야 한다는 건가요? 이게 무슨 경우지요? 폭행을 당한 당사자가 곽 공자라면서요? 그럼 직접 소장을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곽 공자가 직접 오지 않는다면 우리 범 공자도 갈 수 없어요.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체포한다면 저도 매일 집사를 경도부로 보내 곽보곤이 세력을 믿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패악질을 일삼는다고 소장을 내겠어요. 그럼 그때마다 이번처럼 곽보곤을 체포해 와야 할 거예요!”
말을 끝나자 유씨 부인이 소리쳤다.
“서 집사!”
유씨 부인의 의도를 파악한 서 집사가 옆에 서서 맞장구를 쳤다.
“네, 마님.”
유씨 부인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 선생에게 소장 10여 통만 써달라고 해. 내일부터 매일 경도부에 가서 소장을 제출하면 상서가를 놀라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피곤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
그러고는 관차들을 향해 웃으며 설명했다.
“정 선생은 저희 저택에서 머무르고 있는 문객인데 예전에 매집례 대인의 개인 법률 고문으로 계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소장을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상서가를 피곤하게 만들겠다는 유씨 부인의 말이 관차들의 귀에는 경도부를 피곤하게 만들겠다는 말로 들렸다. 이에 관차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사정했다.
“부인, 사소한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시지요. 사실 이 일은······ 우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한차례 소리치고 목이 말랐던 유씨 부인이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찻잔을 건네줬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