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92)
사도의 자격
「라비린스에서 강한 마기의 흔적을 발견…. 악마 출현의 가능성 존재…」
「XX일, 해당 마기를 매개체로 대규모 역추적 마법을 시행… OO시간 뒤, 트레이싱 이블(Tracing Evil)의 발동을 개시.」
책자를 읽어나가는 파피의 눈동자가 점점 심각해졌다.
뒤의 내용을 보기 위해 책자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우우웅.
읽던 책자가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글자가… 사라진다?’
신탁에 관한 내용도, 신녀에 대한 언급도 하나하나씩 사라지더니 어느새 책자는 백지장으로 변해 있었다.
파지직!
그리고 새하얀 백지장에 뇌전으로 이루어진 청색의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천사들께선, 이 신탁이 반역자들에게 넘어갈 것을 경계하셨다….」
반역자… 파피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된 단어다.
예전에 파피도 그렇게 불린 적이 있었다.
그것은 천공을 배신한 천인, 혹은 천사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 때문에 악마의 기운에 오염된 자가 이것을 읽으면 덫이 발동하도록 되어 있다.」
‘덫?’
파피가 의문을 가진 그 순간.
파치치치치!
책자에서 뿜어 나오던 푸른빛은 눈 깜짝할 사이, 방 안을 뒤덮어 버렸다.
‘이런!’
파피는 신음을 흘렸다.
사방에 촘촘히 엮인 마법진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
천인을 가두는 감옥에도 같은 마법진이 존재하니 모를 수가 없었다.
“크아아악!”
신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은 곧 파피의 몸을 칭칭 감싸 엮었다.
화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파피의 위로 눈이 멀 듯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의식을 잃기 전, 파피의 눈꺼풀 사이로 보인 것은 한 쌍의 날개.
새하얀 날개를 지닌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 천사인가?’
희미한 시야는 파피의 의식이 사라지며 함께 암전했다.
***
강신의 지속시간이 다했다.
레티가 얼굴을 드러낸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녀는 진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모습을 감춰 버렸기 때문이었다.
‘응?’
[레티의 특별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예정에도 없던 시험이 시작된 것은 바로 다음 순간.
어느새 아인의 앞엔 조그마한 슬라임 하나가 생겨나 있었다.
「시험? 이걸 잡으면 되나?」
아인은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손으로 툭 후려치자 슬라임은 펑 폭발했다.
갑자기 열린 시험은 그것으로 끝.
[획득한 점수가 포인트로 변경됩니다!]「뭐야, 시시하네.」
도시로 돌아가는 포탈이 열린 뒤, 어떠한 예감이 떠오른 현은 눈을 빛냈다.
아인을 잘 봐 달라. 가능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어라.
그렇게 진실의 모습을 빌려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거… 좀 기대해도 되는 건가?’
도시로 향하는 포탈 옆에 보상 거치대가 등장했다.
하지만 다양한 물건들이 나열되어 있던 아까와 달리, 거치대 위에 놓인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돈…? 다른 보상은 하나도 없는 건가?’
현은 피식 웃었다.
‘하긴, 무한정 퍼줄 순 없겠지.’
갖가지 마법재료를 무한리필로 공급받는 일은 불가능할 듯했다.
당연하다. 천인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니까.
게다가 레티는 그 중에서도 지위가 낮은 천인이었다.
지난번 시험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또 시험을 열 권한을 받았을 리도 없다.
이왕 속일 거면 다이아수저쯤 되는 녀석을 노리는 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천인들의 성격은 다양했고, 개중엔 천사를 섬기지 않는 녀석마저도 존재했다.
레티 외에 확실히 속을만한 녀석은 아마 파피 정도겠지.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
게다가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100점을 받고서 아인의 퀘스트 창엔 이전에 없던 목록이 생겨났다.
[퀘스트 : ‘사도 후보’]-레티가 당신을 사도 후보로 추천하였습니다.
-30일 내로 시험을 완료해야 합니다.
(※주의 : 시험을 포기할 시 오랜 기간 동안 다시 추천을 받을 수 없습니다!)
「200레벨도 안 돼서 사도가 될 수 있다니.」
「좋은 거야?」
「당연하지!」
「으음. 사도 같은 건 해 본적 없는데…」
아인의 중얼거림에 현은 예전의 일을 상기해 봤다.
생각해 보면 아인은 특정 세력에 소속된 적이 없었다.
아스라 시절에 함께 했던 퀘스트들도, 대부분은 본인의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도와주던 것이었다.
사도가 되 본 적이 없다면 사도 후보가 지니는 의미를 잘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잘 모르겠는데… 현에게 퀘스트 넘길 순 없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당연히 될 리가 없잖아.」
아인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늘어난 듯했다.
「사도의 메리트나 의무 등의 것들은 나중에 알려줄게. 우선은 퀘스트부터 클리어하자.」
「지금 바로?」
「응.」
「어렵진 않아? 원래는 400레벨이 넘어서 받는 퀘스트라며.」
「그렇긴 한데.」
예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현은 자신이 아는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사도 퀘스트는 유저의 레벨에 비례해서 난이도가 정해지거든. 언제든 체감 난이도는 똑같아. 레벨이 높으면 오히려 더 고생하는 경우도 있다 하더라고.」
「아, 그렇다면 상관없지!」
시험의 목적은 사도 후보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
그러니 본인의 레벨이 난이도의 기준점이 된다.
물론 그 난이도도 일반 유저들은 결코 가볍게 손댈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클리어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것은 말 그대로 일반 유저들의 사정일 뿐, 자신과 아인에겐 상관없었다.
「적은 한 명 뿐이니까 시간도 얼마 안 걸릴 거야.」
「뭐? 결투~?」
「그래. 생각해 보니까 네 전문 분야였네.」
설명을 모두 들은 아인의 얼굴에 곧장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럼 지금 해 보지 뭐!」
[시험을 시작하겠습니까? Y/N] [수락하면 무의식의 전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아, 잠깐만…!」
현은 황급히 아인의 행동을 저지했다.
「1인용 퀘스트잖아! 여기서 동화가 풀리면 어쩌려고! 」
「뭐야, 진작 말했어야지.」
[휴식 상태로 전환합니다!]LeeSeoHyun : 끝나면 불러. 난 밥 좀 먹고 있을게.
AIN : 얼마 안 걸리려나?
LeeSeoHyun : 결투니까. 5분 정도면 끝나겠지.
갑자기 아인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AIN : 그런데 내가 지면 어떻게 해?
LeeSeoHyun : 웬만해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사도 시험에 ‘포기’는 있어도 ‘실패’는 없다.
이 퀘스트는 근성만 있다면 무한히 재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LeeSeoHyun : 죽어도 부활하니까. 퀘스트 깰 때까지 재시도하면 돼.
그렇게 잠시 캡슐을 빠져나온 서현.
아인이 퀘스트를 마무리할 동안 할 것도 없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캡슐의 외부음량을 최대로 올려 두었다.
아인이 부르는 소리를 놓치지 않도록.
그 상태로 대충 끼니를 채우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커뮤니티를 뒤적이던 현은, 그만 깜빡 잠들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응?’
서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왠지 모르게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느낌이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니면 몇 십 분?
하지만 이어서 시계를 본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 세 시간이 지났어?!’
깜짝 놀랐다.
왜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지? 음량을 올린다는 걸 반대로 줄였던가?
갑자기 아인에게 미안해졌다.
그녀의 성격이면 여태까지 몇 번이나 자신을 불렀을지 상상도 안 갔기에.
예상대로, 자신의 계정은 휴식상태의 제한시간이 지나 완전히 접속이 끊겨버린 채였다.
LeeSeoHyun : 미안, 깜빡 잠들었다…. 지금 재접속하고 있어.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두고 접속하려던 도중, 아인으로부터 답이 들려왔다.
AIN : 안 돼, 아직 접속하지 마.
‘응?’
AIN : 그게….
어째선지 아인은 말을 더듬었다.
현은 재빨리 접속을 멈추고 기다렸다.
이어서 다시 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AIN : 이제 접속해도 괜찮아.
잠시 후, 현은 아인의 몸에 동화된 상태로 접속했고.
그와 동시, 여러 종류의 감정이 물밀 듯 들이닥쳤다.
마치, 몸속에 미열이 가득 찬 듯 답답한 느낌이었다.
대체 세 시간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아인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중얼거린 것은 한참 뒤였다.
「근데 나. 아직 퀘스트 못 깼는데….」
현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세 시간이 넘도록 알람이 오지 않은 이유.
자신이 소리를 듣지 못한 게 아니라 아인이 부르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지만 예상대로라면 아인이 여태껏 퀘스트를 성공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결투 방식이 아니었던 거야?」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상대 스펙이 말도 안 되게 높다거나.」
절레절레.
아인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동화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몸짓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현으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인이 세 시간동안 1승도 할 수 없는 상대가 있다니. 그건 결투 최적화 인공지능도 불가능할 듯싶은데.
「이상한 점은 없었어? 상대의 반응속도가 0초로 설정되어 있다거나, 확정 상태이상 스킬이라던가 하는….」
현이 염려한 것을 알아챈 것인지, 아인은 조그만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니. 불합리한 싸움은 아니었어. 스펙은 나보다 조금 높지만… 그것 때문에 못 이긴 건 아니야.」
「그러면…?」
물어봐도 아인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결국, 직접 보기 전까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녹화 본 있지? 일단 그것부터 좀 보자.」
「아니야.」
「응?」
「아직 이길 수 있어. 좀만 더 하면 충분히…!」
하지만 한사코 녹화 본을 보여주지 않는 아인.
현은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아인이 유일하게 고집을 부리는 것이 바로 결투다.
자신도 정점을 찍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 넘어서기 전까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다는 거겠지.
자존심 때문이라면… 평범한 방법으로 그 고집을 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중엔 보여줄 거야?」
「응, 이긴 다음에.」
하지만 숨길수록 더 궁금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현은 아인의 고집을 어떻게 꺾을지 빠르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시도해 볼만한 방법을 찾아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 시간동안 한 번도 못 이겼다고 했지?」
「….」
「와, 네가 그 정도면 나는 평생을 가도 못 이기겠네.」
「현은 서포터니까 당연한 거 아냐?」
「아니, 네 몸을 빌렸을 때 말이야. 왜냐면, 결투는 네가 나보다 두 수 정도 위잖아?」
사실은 반 수… 아니, 반의 반 수 정도라 생각하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했다.
최대한 아인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래…?」
「당연하지! 나 말고도, 아스리안에 너보다 결투 잘하는 유저는 없다니깐.」
「그… 그런가?」
현은 아인의 감정이 서서히 들뜨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생각해 둔 것을 이어 말했다.
「하지만 좀 아쉽네.」
「뭐가?」
「녹화 본을 볼 수만 있다면 나도 너에게 제법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을 텐데.」
순간적으로 떠오른 방법.
요즘 들어 자주 동화하는 덕분에 현은 아인을 설득시키는 방법을 점점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이 말은 완전히 거짓도 아니었으니 말하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 그러면 나중에 꼭 보여줄게…!」
「아니. 왠지 시간이 지나면 이 느낌이 사라질 것 같단 말이지… 너도 알지? 딱 공부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 지금이 바로 그 때란 거지.」
현은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없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진 내용 뿐이라 좀… 부끄러워서….」
아인의 마음은 아직도 갈팡질팡하는 듯하다.
이 방법까진 쓰지 않으려 했지만.
「무엇보다, 네 평소 모습을 보고 싶거든.」
「으, 응? 그, 그게 더 부끄러운 소리 아니야…?!」
「괜찮아. 같이 보자.」
예상대로, 아인의 마음은 그로써 급격히 기울었다.
곧바로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캡슐 저장소를 뒤적여 3시간 20분으로 잘라낸 녹화 본을 전송해 주었다.
현이 휴식상태로 전환한 직후부터의 모든 플레이가 기록된 영상이었다.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아.’
시험 방식이 예전과 달라졌음은 분명했다.
그렇다 쳐도 스펙으로 압도하거나, 규격 외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게 아닌, ‘실력’으로 아인을 넘어서는 NPC가 존재할 수 있나?
팟!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사이 화면이 바뀌며 아인은 결투의 장소로 이동했다.
지나간 영상을 보는 것인데도 현은 괜히 자신이 긴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일시적으로 초기화되었습니다.]약 세 시간 전.
퀘스트가 시작되는 동시 아인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전이되었다.
‘끝없는 평면’이라는 이름을 지닌 결투장의 맵과 흡사한 장소.
‘결투라고 했지. 상대는… 아직 없나?’
곧바로 시작되는 대신, 아인에게 느릿느릿한 메시지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그대의 무의식으로부터 상대를 추출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절대 승리하지 못할 거라 여기는 상대를…]‘내가 절대 못 이기는 상대?’
흘러나오는 문장을 살펴보던 아인은 속으로 웃었다.
한 명도 없을 텐데?
스펙 빨로 찍어 누르는 게 아닌 한.
[추출 완료!] [상대의 스탯 총합을 당신의 1.5배로 설정합니다!] [상대의 스킬트리를 당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조정중입니다….] [조정 완료!]후훗, 다음 문장을 보는 순간 입가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방금 걱정하던 일이 곧바로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스탯 총합 1.5배.
그 정도면 아무런 차이도 아니다.
방금까진 민첩이나 마력 스탯이 5배쯤 차이나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난 또 400레벨이 넘어가는 상대랑 싸우는 줄 알았잖아.’
현은 너무 겁을 준 거 아닌가?
그런 잡생각을 하던 도중, 먼 곳에 무언가가 스멀거리며 형태를 갖추었다.
온통 검은 색으로 이루어진 인영(人影).
자신의 맞은편에 선 녀석은 아주 예전, 각성 퀘스트에서 만났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그림자였다.
‘아…?’
꿈틀거리던 그림자의 형태는 곧 구체적인 형상으로 변했고, 그 순간 아인의 눈이 커졌다.
실루엣이 굉장히 익숙했다.
무의식을 추출한다는 메시지를 보았을 때 잠깐 생각하기는 했다.
감각동조를 이용하는 아스리안은 가끔씩 생각을 들여다보기도 하니까.
아는 NPC를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나? 라디에트나 샤크론같은.
하지만 이 상대는 예상하지 못했다.
긴 머리칼을 흩날리는 저 여인은.
‘저거 루이즈야?’
그림자는 조그만 단창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아인의 뇌리에 얼마 전 미궁에서 만났던 루이즈의 모습이 겹쳤다.
‘아니, 달라!’
다시 숨을 삼켰다.
애매하게 얼빠진 루이즈의 분위기가 아니다.
절도있는 실루엣의 몸짓은 루이즈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것.
평소, 누군가를 계속 바라보기 때문에 그 특유의 몸짓을 알아채기가 수월했다.
‘현…?’
아인은 물론, 현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원래 사도 시험에선 자신이 고전했던 NPC들 중 한 명을 상대로 만나게 된다.
그런 전작의 정보를 참고할수록 더욱 예상하기 힘들 것이다.
감각동조가 없던 과거엔 플레이어의 뇌파를 읽어내는 기술이 없었으니까.
‘루이즈에게 동화한 현이야!’
하지만 이곳은 아스리안.
개인의 무의식으로부터 가장 까다로운 상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 절망을 극복한다는 시험의 취지를 따르기 위해선 이 방식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소멸의 각오!’
위험을 감지한 아인은 궁극기부터 사용했다.
루이즈를 닮은 그림자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바로 다음 순간.
‘온다!’
뒤로 살짝 물러서 피하려던 도중.
웃…! 아인은 위험을 감지하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촤라라락!
늘어난 쇠붙이가 시야를 스친 뒤에야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창…?!’
녀석의 손에 들린 무기는 4미터의 장창.
미궁에서 루이즈가 사용하던 무기다!
자신이 현에게 주었고, 현이 루이즈에게 선물해 준 물건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템의 옵션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
‘늘어나는 창이야!’
그것은 쥐는 힘에 따라 원하는 길이로 변화한다.
일반적으로 그런 조잡한 무기는 오히려 사용자의 손이 꼬이기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지만…
그것이 현에 손에 들린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인은 앞니를 살짝 깨물었다.
‘살짝 위험한가…?’
콰아아아!
아인은 그림자의 창에 휘감긴 마기를 눈치 챘다.
아마도 루이즈의 스킬인 검은 바람.
장창의 약점은 초근거리에 대응하기 힘들다는 것이지만 간격을 재는 컨트롤이 가능하다면 그 약점은 사라진다.
현이라면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무기의 리치를 바꿀 수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모든 스킬을 사용할 순 없는 것 같네.’
아인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다행히 그림자가 사용하는 스킬들은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아.
그 증거로, 파장 버프들이 걸려있지 않은 걸.
스킬 포인트 제한 때문이겠지?
루이즈의 스킬들이 포인트를 잡아먹었다면, 투명화나 가속 등의 기술의 지속시간도 엄청 짧거나, 어쩌면 스킬이 삭제된 걸지도 모르지!
‘스탯도 큰 차이가 없다고 했어. 그렇다면…’
아인은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
스펙차이가 크지 않다면 현이라도 충분히 상대해 볼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실제로 아스라 시절에도 여러 번 현을 상대로 승리를 따낼 수 있지 않았던가?
‘평소처럼 심리전으로 승부를 거는 거야!’
하지만 아인이 간과한 것.
시스템 메시지는 ‘절대 승리하지 못할 상대’를 무의식에서 찾아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림자의 몸짓이 너무나 현을 닮아서 상대가 자신이 알던 현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아인이 위화감을 느낀 것은 몇 번의 합이 이어진 뒤였다.
카앙!
이프리트의 발톱으로 창대를 움켜쥔 뒤. 촤르르륵! 다시 그림자의 창이 접히는 순간.
아인은 이 짧은 순간을 노리고 거리를 좁혔다!
‘잡았어!’
순식간에 네 가닥의 화염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 중 세 번은 페이크, 진짜 공격은 단 하나.
한 번이라도 속는다면 후속타에 당할 수밖에 없는 공격!
‘으응…?!’
하지만 손에 전해지는 타격감이 없었다.
모든 공격이 빗나갔음을 깨닫는 동시, 아인은 반사적으로 ‘화신의 걸음’을 발동시키는 시늉을 했다.
아직 자신의 공격이 다 끝나지 않은 것처럼.
상대의 이동기라도 소모시키려는 생각이었지만 그 생각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림자는 아주 약간의 움찔거림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씨익.
녀석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는 순간, 아인은 자신의 페이크가 전혀 먹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안 속았어?’
나쁜 예감이 솟아올랐다.
현이라면 분명 방금 거에 속았을 텐데….
아니, 아직은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는 단계다.
확신을 위해선 좀 더 시도해 봐야겠지.
쾅!
아인은 다시 잠력 폭발을 사용했다.
민첩을 상승시키는 동시, 스킬 이펙트로 시야를 가리기 위해서!
상대와의 거리는 약 10미터. 그 거리를 줄이는 데는 소수점 단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잔상을 남기는 무빙을 섞었다.
간격과 박자를 혼동시키는 무빙도.
얼핏 페이크로 점철된 이 돌진은 사실, 가장 정직한 형태의 공격이었다.
방금 전처럼, 속임수를 간파하기 위한 수를 쓴다면 오히려 한 방에 몸을 뜯어버릴 계획이다.
하지만.
‘아?!’
콰직.
그림자는 갑자기 바닥에 창을 꽂았다.
파앙! 바람이 터지는 순간, 녀석의 신체는 순식간에 반 바퀴 뒤집혔다.
창을 지지대로 활용한 백플립.
아인은 뒤늦게 자신이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턱이 약간 얼얼해.
발등에 맞은 건가?
그런데도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걸 보면, 상대의 스펙이 조정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는 사실인 듯했다.
‘어디로…!’
아인은 체력보다 상대의 위치부터 살폈다.
이어지는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하지만 예상과 달리 녀석은 추가로 공격해오지 않았다.
수직으로 박힌 4미터 장창의 손잡이에 쭈그려 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
아인은 턱을 살짝 만졌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속임수가 전혀 통하지 않았어.
거기다 역으로 카운터를 맞았다.
이렇게 빠른 돌진을 반격할 수 있다니. 아무리 현이라도 힘든 일일 텐데….
상대는 미래를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페이크가 하나도 통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왠지 내 생각이 다 읽히는 것 같아.’
계속되는 결투.
불꽃과 바람이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짧은 시간에도 무수한 수읽기가 오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인의 표정은 초조해져갔다.
심리전.
아인은 현과의 결투에선 언제나 심리의 빈틈을 찌르는 방법을 사용했다.
상대를 말려 죽이거나, 이길 수 있는 확률을 서서히 높이는 전략 등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계속 밀리고 있어.’
아인은 이미 어떤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림자는 ‘검은 바람’을 제외하면 단 하나의 스킬도 사용한 적이 없다.
강신을 사용한 실제 현보다 약할 텐데…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막막한 느낌이 드는지.
자신들을 상대했던 회귀자나 다크니스의 기분도 이랬던 걸까?
‘평소에 쓰는 방법이… 전혀 안 통해!’
사도 후보는 시험에서 스스로의 절망을 넘어야만 한다.
절망이란 그저 스펙이 높은 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인은 언제나 한 가지를 두려워했다.
언젠가 현에게 심리전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온다면?
눈앞의 적이 바로 그런 상대. 평소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존재였다.
‘…!’
찰나, 아인의 눈이 커졌다.
치열한 공방 와중 그림자의 자세가 순간적으로 흐트러졌기 때문이었다.
민첩이 부족해서 빈틈이 생긴 걸까?
어쨌든 갑자기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곧바로 접근하려 던 그 순간.
파바바바방!
연속적으로 바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의 발끝부터, 골반, 허리, 팔꿈치, 손등, 그리고 창대의 끝에서도.
‘아, 이거….’
아인의 입이 벌어졌다.
현이 자주 사용했고, 자신도 한 번 성공했던 스킬.
아니, 둘을 합쳐 하나의 스킬처럼 보이도록 만든 기술이다.
잠시 자신이 싸우고 있단 사실조차 잊었다.
완벽한 기술은 그것을 알아본 자만이 감탄할 수 있다고 한다.
시간이 갑자기 느려지는 착각 속에서, 아인은 자신의 몸이 잘게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검은 바람’과 ‘생체리듬 가속’의 조합.
그렇다, 상대는 루이즈에 동화한 현이었으니 그 어떤 서포터 스킬을 사용해도 불평할 수 없으리라.
[패배했습니다!] [포기하시겠습니까? Y/N] [절망을 마주한 횟수 : 1회]‘좋아. 첫 판은… 뭐.’
시야가 암전하고도 한참 뒤, 아인은 재도전에 수긍했다.
떨리는 몸이 살짝 진정되지 않았다.
심리전이 통하지 않는 현.
그것이 바로 아인이 절망이라 여기는 상대였다.
***
‘이게 뭐지?’
아인에게 전송받은 영상을 본지 고작 몇 분.
현은 황당함에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이거 사도 퀘스트 맞나…?’
아인의 이상한 짓으로 버그가 난 것인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전작에서 후속작으로 넘어오며 퀘스트의 연출은 종종 변했지만, 내용이 완전히 바뀌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었다.
변수가 넘쳐나던 50레벨 각성 퀘스트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분명 이런 내용이 아닌데.’
극상성 직업의 인형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는 것이 아스라 시절의 사도 시험이었다.
하지만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루이즈 인형이 등장한단 말인가?
아니 루이즈가 아니다.
현은 그림자 인형의 싸움을 지켜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녹화된 영상을 보는데, 그 인형을 조종하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래, 마치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잖아!
‘이거, 나인가?’
소름이 돋은 나머지 솜털이 곤두섰다.
마치 다른 차원의 자신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영상의 초반 부분을 다시 돌려 보았다.
하지만 보면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냐, 나랑 비슷하지만, 똑같진 않아.’
오히려 새로운 의문이 더 쌓였다.
수많은 결투를 겪어오며 현은 자신의 스타일로 아인의 변칙수에 대응하긴 힘들다 결론내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어떻게… 아인의 모든 공격을 이토록 쉽게 무위로 돌리는 것인지.
‘근데 이 새낀 뭔데 이렇게 결투를 잘해?’
일단 루이즈가 아닌 건 확실해졌다.
가끔씩 사용하는 스킬을 보면, 인형의 베이스는 서포터. 강신을 사용했거나 혹은, 루이즈에게 동화한 자신이다.
그런데… 자신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결투에서 아인을 압도하는 걸까?
그게 너무 신기해서, 할 수만 있다면 녀석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반응속도가 나보다 빠른 것도 아니고. 특별한 무빙을 쓰는 것도 아닌데… 음?’
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떤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특정 구간을 반복 재생했다.
아인의 불꽃 꼬리가 살짝 구부러지는 장면.
궁극기를 사용한 채 화신의 걸음을 발동하면 이렇게 아주 찰나 꼬리가 웅크러진다.
하지만 놀랍게도 꼬리를 구부린 것은 아인의 페이크!
‘어떻게 이걸 안 속았지?’
자신이었다면 그 모션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그림자 질주를 사용하거나, 최소한 뒤로 물러서기라도 했을 텐데.
영상 속의 그림자는 그것이 이미 속임수란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아무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잠깐의 여유를 활용해 흐트러진 자세를 되잡는 것이 아닌가!
현은 곧바로 아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너 이때 꼬리친 거. 의도적으로 한 거야?」
「뭐?! 내가 꼬리쳤다니…? 아하, 이거!」
아인은 그 때의 상황을 되짚어 이야기해 주었다.
「스킬 모션을 흉내 내 봤는데, 현은 안 속더라고.」
「아니, 나였으면 속았을 것 같은데….」
「바로 그거야! 현인데, 현이 아닌 것 같았다니깐?!」
「으음….」
현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자신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인형.
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분석해 보기 시작했다.
‘일단 보고 반응하는 건 아니야.’
1초에 대여섯 수가 오가는 아스리안의 결투에서 인간은 모든 걸 보고 반응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의도를 예측하는 것.
근거가 되는 것은 상대의 표정, 몸짓, 습관 등의 통계지만 아무리 예측해 봤자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불과하다.
결투 중엔 반드시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다.
‘반응속도로 파훼하는 게 아니라면.’
영상을 계속 지켜본 현은 한 가지 사실을 가정해 봤다.
‘이 녀석은… 생각을 직접 읽어내는 건가?’
아스리안의 기술력이 인간의 생각까지 읽어낼 수 있단 사실은 대천사 ‘진실’의 존재로써 증명되었다.
또한, 사도 시험의 목적은 스스로의 절망을 극복하는 것.
아인의 특기인 ‘심리전’을 저격하는 상대가 출현하는 것도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러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겠는데.’
현도 녀석을 이길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400레벨 네임드라면 공략을 만들어 볼 텐데, 생각을 읽어내는 상대론 그 어떤 계획도 통하지 않을 테니.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그래, 사도 퀘스트의 방식이 바뀌면서.
기량이 뛰어난 유저일수록 강한 적을 만나게 되니까, 아인의 상대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을 만큼 끔찍할 것이 당연하겠지.
영상을 맨 끝으로 옮기자 아인이 세 시간 넘게 분투했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절망을 마주한 횟수 : 89회]「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 한숨 자고 나면 깰 수 있겠지….」
아인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 보였다.
결투에서 지면 자신이 이길 때까지 다시 하자고 조르는 그녀였는데.
아인도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는 반증일 터.
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 주었다.
「그러네, 너 오늘 하루 종일 싸웠지?」
「음… 그랬나?」
「레티의 시험도 네가 대부분 했고, 곧바로 사도 퀘스트까지 했으면 집중을 못할 만도 하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이대로 물러나라 말하면 아인의 자존심이 상할지 모르니.
「사냥이나 갈래?」
「지금?」
「응. 우리 곧 200레벨이잖아. 이번엔 넌 쉬고, 내가.」
현은 은근슬쩍 레벨 업이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물론, 적의 스펙이 자신과 비례해 증가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2차 전직을 마치고 소멸의 각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다면?
궁극기가 지닌 변수는 무궁무진하니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 현이 좋을 대로 해.」
「오케이, 나한테 맡겨 두라고!」
현은 금방 도시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이곳으로의 입장은 철저하게 통제되지만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시 지상으로.
현과 아인은 곧 제국 어느 도시의 사냥터로 이동했다.
경험치 바는 이미 199레벨에 80퍼센트 가까이 채워진 상태.
잡담을 하며 사냥하다 보니 둘은 순식간에 200레벨에 도달하게 되었다.
‘드디어.’
화악!
레벨 업의 빛 무리가 솟구치는 동시, 각자의 눈앞엔 전직 퀘스트와 관련된 메시지가 나타났다.
우선 현의 것.
-루이즈는 이미 그대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2차 전직의 자격을 달성했습니다!
-‘루이즈’를 찾아가면 전직이 완료됩니다.
‘…?’
그리고 아인에게는 이러한 퀘스트가 생겨났다.
-진행 중인 사도의 시험을 끝마치세요.
-결과에 따라 새로운 길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
운명일까.
아인이 2차 전직을 마친 뒤에 사도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계획은 애초에 불가능한 듯했다.
***
최근 다크니스와 맞먹는 위상을 갖게 된 회귀자 길드.
한순간에 남들의 우상과 시기를 받게 된 그들이었지만, 정작 본인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퀘스트 내용이 바뀌다니!’
길드장 멸살은 이를 악물었다.
사도 퀘스트를 위해서 명성을 올리고, 세력 성향을 올리고, 귀찮은 호감도 작업까지 마쳐 두었다.
그렇게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천공 소속 길드원들이 며칠 전 진퇴양난에 빠져 버렸다.
‘현… 현….’
멸살은 같은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지난번의 패배 이후 현이 아스리안을 플레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쭉 아인과 함께였다는 사실도.
RPG게임에서 남의 몸에 빙의하는 스킬이 존재한다니. 쉽게 믿을 순 없는 이야기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용하는 스킬의 공통점, 커뮤니티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으니.
무엇보다도, 멸살은 그 날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인의 몸에 빙의한 현의 눈빛을 직접 마주했던 때.
이번에도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 그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여기서도 우릴 방해하겠단 거냐?’
그 때만 생각하면 멸살은 아직도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스리안의 시스템은 인간의 트라우마를 들춰내는 악취미라도 가진 것일까?
사도 퀘스트가 시작되었을 때, 눈앞에는 그 날의 아인. 아니, 아인에게 빙의한 현이 서 있었다.
마치 그 날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사도가 되려는 자는 스스로의 벽을 넘어서야만 한다.
감정을 들춰내는 시스템은 멸살의 무의식을 너무도 정확하게 읽어낸 것이었다.
[절망을 마주한 횟수 : 349회]다른 길드원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회귀자 길드원들은 사도 시험에서 현과 아인을 마주하게 되었고, 여태껏 승리를 따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계속 성장이 정체된다면 여태까지 거둔 이득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때문에 멸살은 긴급히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간부진들을 불러 모았다.
“자, 여기까지가 지금 우리 길드 상황이다. 누구든 좋은 방안이 떠오르면 말해 봐.”
회귀자 길드의 프라이빗 룸.
모두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수개월 동안 준비해온 회귀자 길드의 계획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몰랐으니.
“…쉽지 않네요.”
“그날 속절없이 패배한 여파가 여기까지 올 줄이야.”
간부진들은 이미 현이 상대로 등장한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다.
본인들이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어때요?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에 각자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대전 상대를 바꾸는 거죠!”
누군가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의식적인 사고로 결과를 의도하는 것은 뇌파를 이용하는 아스리안에서 종종 사용되는 공략이다.
“그건 불가능해.”
길드장 멸살이 답했다.
그는 이미 해당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퀘스트를 받는 순간 상대는 고정된다. 포기하기 전까진 바꿀 수 없어.”
“그럼….”
“맞아. 우리는 이미 사도 퀘스트를 시작해 버렸지. 지금 그만두면 400레벨 전까진 같은 기회가 없을 거야.”
한참 만에, 다른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레벨을 올리면 상대의 스펙도 함께 오른다고?”
“맞아요. 그건 아스라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오히려 낮은 레벨일 때가 더 쉽다고 해요.”
“후, 난감하군.”
이번엔 의견이 아닌, 그저 답답한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어색한 침묵만 이어질 뿐이니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만큼 절망적이었다.
사도 퀘스트를 시도했던 6명. 회귀자 길드의 가장 큰 전력인 그들의 성장이 완전히 정체되어 버렸다.
“아무도 가능성이 안 보이나요?”
“크흠….”
그 6명은 모두 이 자리에 있었지만 긍정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게 생각보다 좀 힘들더라고….”
“저도요.”
“일대일처럼 보이지만 저쪽은 두 명이잖아. 애초에 불공평한 대결 아니야?!”
혼자서 현과 아인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스라 온라인에서 당했던 기억 때문인지, 모두의 뇌리에 박힌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
“아냐. 방법이 있는지도 몰라.”
한참 만에 입을 연 것은 베라드였다.
그의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뭐?”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상관없으니까, 뭐든 말해봐.”
심연 세력인 그는 이번의 사도 퀘스트와 관계가 없다.
그래서인지, 다른 이들보다 객관적인 시야를 지닐 수 있었다.
길드원들이 가져온 동영상을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6개의 영상에 등장하는 아인. 생긴 건 똑같지만 실력이 달라.”
“실력…?”
“그래. 각자 평소에 생각하던 현이 상대로 튀어나온 것 아닐까?”
움직임, 수읽기, 전투 센스 등. 자세히 살펴볼수록 6개의 동영상에서 더 많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베라드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던 이유는 평소 남들보다 PvP에 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력이 좋은 녀석이 더 힘든 적을 만나게 되는군.’
길드원들의 자존심을 위해 굳이 그것까진 언급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니까.
베라드는 사도 시험의 본래 목적을 상기해 보았다.
시스템 메시지에 따르면, 상대는 절대 이길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대.
하지만 정말로 이길 수 없다면 시험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절망을 뛰어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험을 만들어낸 자의 의도를 추측해 보면 해답은 간단하다.
바로 스스로의 발전이다!
“퀘스트가 시작되면 상대는 바뀌지 않는다고 했지.”
“맞아.”
“그러면 실력을 기르고 난 뒤에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잖아.”
지금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도,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30일이라는 긴 시간은 유저에게 성장할 여유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
“실력을 기르라고…?”
“물론 어렵겠지만 말이지.”
그 말은 상당히 그럴듯했기 때문에 모두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특히 사도 퀘스트를 진행중인 자들은 베라드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상대해 본 현의 그림자는 기억보다 훨씬 약했다.
여태까지는 실제보다 스펙이 낮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만약 시스템이 본인의 수준에 맞춰준 것이라면?
한 단계 실력이 상승한다면 충분히 승리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에게 떠오른 의문.
‘여기서 실력을 늘리는 게 가능할까?’
인간은 미숙한 시기에 가장 빠르게 성장한다.
전작부터 닳고 닳은 자신들의 성장기는 한참 전에 끝났을 터.
한 개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몇 개월, 아니, 몇 년. 어쩌면 평생이 가도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큰일났군.”
베라드의 추측을 들은 멸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번 사도 퀘스트는 회귀자 길드에게 너무나 불리한 조건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