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가리비가 담긴 어항 (6)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핏기가 싹 빠져 바다로 흘러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성전에 갔을 땐 이미 늦어 있었어요. 헤일로가 저 가리비를 반쯤 삼키고 있었거든요.”
“익은 건……? 가리비찜으로 변한 건 언제야? 네가 그랬어?”
“그건 릴리 기사단장이…….”
피핀의 변명을 듣는 와중에 나의 의식이 둘로 쪼개졌다. 나의 의식 중 한쪽이 외쳤다.
‘이걸로 엔비는 완전히 불행해졌군. 내 승리야. 이런 걸 원했잖아? 내가 원한 것보다 더 끔찍한 꼴이 됐어. 손뼉 치고 기뻐하라고. 손대지 않고 남의 불행을 구경하게 된 거 축하해….’
또 다른 의식은 이렇게 외쳤다.
‘성수가 죽었어. 바다를 지키는 수호자가 죽었다고. 이젠 민가에까지 마수가 밀어닥칠 거야. 망했어. 이 세계관은 이제 망한 거야. 가능한 육지로 가야 해. 공작성에 돌아가자마자 육지 한가운데로 이사를 하는 거야. 바다랑 가장 먼 곳으로…….’
나는 패각을 매만지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엘세노테가 죽었다. 가리비찜이 되어 돌아왔다. 명색이 바다의 수호자인데, 수룡이 아니라 아예 인간한테 당해버렸다고.
엘세노테는 평화롭고 유한 성정의 성수였다. 그럼에도 폭력적인 인어들이 숭배할 만큼 강한 존재였다. 헤일로는 엘세노테의 영역을 어지럽히는 강한 마수였지만, 엘세노테에게 직접 덤빌 만큼 무모하진 않았다.
‘설마 엔비가 인어 왕이 되어 지키지 않은 탓인가? 그래서 죽었나?’
일면식도 없는 가리비가 죽은 장면은 우스꽝스러웠지만, 이 상황을 하하 깔깔 웃으며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을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렇게 크고 오래된 생명이 허망하게 사라졌다.
더군다나 지금 이것은 그저 큰 짐승이 죽은 상황이 아니었다. 엘세노테의 죽음은 바다의 죽음을 의미했다. 엘세노테의 마력으로 보호받던 바다는 이제 마수의 영향력에 그대로 노출된 상황이다. 마수가 들끓는 은둔자의 땅과 인간의 땅을 지금껏 바다가 가려주고 있었다.
즉, 엘세노테의 마력이 사라진 지금부터는 마수가 언제 이쪽으로 달려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성전은?”
“엘세노테가 두 입째 먹히는 순간 무너졌습니다.”
“그래…….”
엔비가 절규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오늘 달리아와 놀면서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린 듯 보였는데, 이 광경을 보면 쇼크사할지도 모르겠다.
“엔비를, 엔비를 불러야겠지……?”
내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피핀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엘세노테 님, 엘세노테 님 노래를 부르는 녀석이잖아요. 알게 되면 충격으로 급사할걸요. 인어 사체는 필요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 비밀로 해? 그래. 비밀로 하자. 차라리 비밀로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다시 거대한 조개껍데기로 눈을 돌렸다. 달리아의 침대를 다섯 개 붙여놓은 것만큼 커다란 가리비였다. 심지어 죽은 가리비는 어느새 비린내까지 풍기기 시작했다. 괜히 손으로 밀어봤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죽은 가리비는 지금껏 짊어졌던 책임만큼 무거웠다.
“이걸 어떻게 숨겨.”
나는 죽어버린 엘세노테의 아래 껍데기에 걸터앉았다.
“이건 못 숨기지. 이걸 어떻게 숨겨. 바다에 가라앉혀? 그래봤자 이제 끝장이야. 엘세노테의 보호를 받지 못한 바다는 금방 마기에 오염될 거야. 엔비도 언젠가 알아차리겠지.”
“…….”
“망했어. 엔비는 충격받아서 죽을 거야. 망했다고. 인어 사체까지 치우게 생겼네.”
나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엘세노테의 죽음을 엔비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다. 충격받은 엔비는 연약한 금붕어처럼 폐사하거나, 미쳐 날뛰며 폭주할 것이다. 아니면 폭주하다가 폐사하든지.
한발 양보해서, 엔비가 죽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애당초 몰살 엔딩을 외쳤던 나다. 드디어 나를 제외한 남주인공 5명 중 하나를 처리한 것이다. 몰살 곱하기 5분의 1 엔딩까지는 이뤄낸 것이다. 주영아, 기뻐해 줘. 기쁜 게 맞으려나?
‘그럼 달리아는?’
달리아는 슬퍼할 것이다. 이미 엔비에게 정을 줘버린 달리아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가리비 하나 죽은 걸로 벌어지는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이 가리비를 되살리고 싶을 정도로. 그 순간 나는 병풍처럼 서 있던 성자 에드먼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자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성직자는 대부분 치료 마법을 쓸 줄 알았다. 에드먼드는 성자인 만큼 다른 성직자보다 더 위력적인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에드먼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들은 얘기로 보면, 이 가리비가 전설 속 엘세노테인 것 같은데. 아까 마수와 함께 죽었고. 내가 구해줬으면 하나 봐?”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에드먼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거 못 해.”
“왜?”
“브랙큰 님의 성력도 가랑비처럼 약해진 지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성력은 제한돼 있어. 더군다나 죽은 짐승을 살리라고? 치료 마법도 만능은 아니야. 죽은 건 못 살려내. 사령술사라면 또 모를까.”
“사령술사? 사령술사는 할 수 있어?”
나는 반색하며 검은 눈을 떴다.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마수의 사령들은 좀 보였는데, 대부분 코스모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그리고 엘세노테의 사령은……
‘사령이…….’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좌절하며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망했다. 이제 다 끝장이야. 마수는 바다를 정복한 뒤 인간 세계를 침범할 거고, 엔비는 충격받아 죽을 거고, 그 사실을 알면 달리아는 매일매일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버리겠지.
“뭘 그렇게 실망하고 그래.”
에드먼드는 퉁명스럽게 말한 다음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불쑥, 패각의 안쪽으로 기어들었다.
“뭐, 뭐해? 너도 충격받아서 그래?”
가리비의 말캉한 살이 혓바닥처럼 꿀렁이며 에드먼드의 몸뚱이를 삼켰다. 나는 에드먼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진주라도 찾는 거야? 이거 도둑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었네. 피핀! 세게 잡아당겨!”
“네!”
“이거 놔!”
에드먼드는 우리를 뿌리치더니, 가리비의 안쪽으로 더 깊게 들어갔다. 어느 순간 우리는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에드먼드의 옷자락을 놓쳤다. 에드먼드는 구멍에 처박힌 프레리도그처럼 다리만 들고 한참을 허우적거리다가, 뒤로 손을 뻗었다.
“이제 당겨 줘!”
“진짜 진주라도 찾았어? 이젠 엘세노테의 진주가 있어도 필요 없는데…….”
피핀과 힘을 모아 에드먼드를 끌어올렸다. 살코기 사이에 끼어 있던 에드먼드는 이윽고 무처럼 뽑혀 나왔다.
“으앗!”
“윽!”
엘세노테 위에 착지한 에드먼드와 달리, 나와 피핀은 해변에 그대로 넘어졌다. 피핀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며, 엘세노테와 그 위에 당당히 앉아 있는 에드먼드를 쳐다봤다.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이 상황에 진주나 찾은 자린고비에게 한 소리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잔소리를 할 틈은 없었다.
“성수는 죽지 않아. 영생을 반복할 뿐이지.”
에드먼드가 두 손으로 들어 올린 건, 또 하나의 가리비였다. 크기는 엘세노테에 비할 수 없이 작았지만, 평범한 가리비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이건…….”
“엘세노테의 분신이겠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라기아를 들어 가리비 앞에서 흔들었다.
“라기아. 라기아. 느껴져? 엘세노테의 기운이?”
[흠흠……. 아주 미약하지만 가까이 있군. 엘세노테 님의 숨결이 느껴져.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렇게 약한 기운이 엘세노테 님일 리가 없는데……. 하지만 이건 분명히 그분의 기운이야.]나는 환호하며 가리비… 아니, 엘세노테를 받아 들었다.
“바다의 수호자가 살아났다!”
묵직한 가리비를 높이 들어 올렸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들어 올려진 가리비의 패각이 슬쩍 벌어졌다. 패각 위아래로 물방울 같은 게 점점이 맺혀 있었다. 파랗게 빛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리비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기뻤다.
“물!”
그리고 중요한 건 물이었다. 가리비는 물에 사는 생물이니까.
“피핀! 뭐 없어? 물 담아와! 깨끗한 바닷물! 깨끗한 바닷물이 필요해! 이러다 엘세노테가 말라 죽겠어!”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피핀은 허겁지겁 바다로 뛰어들었다. 마수를 헤쳐가며 헤엄치던 피핀은, 코스모의 대가리를 확 붙잡았다.
[피핀? 왜? 응? 왜애애액, 웩…….]피핀은 코스모의 목구멍으로 확 손을 집어넣었다. 주둥이를 반대쪽 손바닥으로 지탱한 채, 코스모의 목구멍 안쪽을 마구 휘젓는 모양새였다. 코스모가 꼬리를 휘적거리며 강하게 불만스러워했지만 괴상한 수색은 끝날 줄 몰랐다.
“피핀! 뭐해! 물을 떠 오라니까!”
“잠깐만요! 잠깐만요, 진짜 잠깐만! 조금만 더 하면 돼요!”
피핀은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집중하더니, 팔을 쑤욱 빼냈다. 피핀의 손에 들린 건 배낭이었다. 처음에 작은 코스모를 담아갔던 가방.
“네가 먹었을 줄 알았어.”
[맛은 없었어.]피핀은 배낭을 가지고 바다 너머로 헤엄쳤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배낭에 맑은 바닷물을 잔뜩 담아서 돌아왔다. 가죽 가방은 다행히 찢어진 부분 없이 온전해서, 물이 새어 나가지 않았다.
“피핀! 넌 천재야! 잘했어!”
맑은 바닷물이 배낭에 엘세노테를 집어넣었다. 작은 엘세노테는 뻐끔거리다가 패각을 닫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자는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우리를 향해 에드먼드가 대답했다. 나는 배낭의 입구를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바보들…….”
에드먼드는 죽은 엘세노테의 육체 위에서 내려오며 몸을 털었다.
“성자라서 그런지 성수에 관해 잘 알고 있네. 한 가지만 더 도와줄 수 있어?”
“뭐.”
“이쪽은 내 호위 기사. 피핀이라고 하는데, 아까 보니 손목이 뒤틀려 있었어. 죽은 성수는 못 살리지만, 손목은 고칠 수 있지?”
에드먼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분위기를 살피는 듯하다가, 피핀의 손목을 잡아챘다.
“고쳐주지.”
“너 좋은 녀석이구나.”
나는 순간적으로 놈이 척결해야 하는 남주인공이라는 사실도 잊고 중얼거렸다.
“맞아. 난 좋은 녀석이거든.”
에드먼드의 마법이 닿자, 불그죽죽하던 피핀의 손목이 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문제가 하나씩 정리되고 있었다.
“축제, 드디어 끝났네. 살겠다.”
나는 한숨 돌리며 웃었다.
***
일꾼들을 불러 마수의 사체를 포대에 담아 다 정리하자,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수룡 헤일로의 머리였다.
피핀은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헤일로의 머리를 직접 해체했다. 라기아를 빌려줬더니, 녀석도 피핀도 신이 나서 일에 몰두했다.
[헤일로의 피! 과연 다디달 줄 알았지! 이 달콤함! 지금껏 살아온 역사 속에서도 손꼽히는 맛이야!]“두개골……. 좋다……. 이 굴절률……. 아름다워…….”
피핀은 유독 헤일로의 머리뼈를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의 공격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고 보면 다른 마수는 뼈가 으스러지거나, 잘 버텨도 흠집이 가득했는데 수룡은 달랐다. 헤일로는 피핀이 머리뼈와 목뼈를 분리해 죽였다고 했다. 보통 공격으로는 죽지 않는 독종이었던 것이다.
“원하는 게 하나 더 생겼어요.”
“말해 봐.”
“헤일로의 머리뼈로 무기를 만들고 싶어요. 이걸로. 부탁드려요, 나으리. 꼭 헤일로의 머리뼈로 무기를 만들어주세요.”
평소 욕심내는 법이 없던 피핀이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었다. 이전에도 마음껏 욕심부리라고 말한 바 있는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헤일로를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를 찾아보자.”
그렇게 마수를 공작성으로 챙겨갈 준비를 완전히 마쳤을 때,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시에라!”
“엔비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