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92
92화. 멧돼지는 강하다 (1)
아네모네 알라타. 게임 ‘잠들지 않는 정원’에서 가장 화려한 꽃. 여주인공이자 세계관 최강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희대의 마법사.
아네모네는 여리면서도 단호한 성격으로 어딘가 나사 한 군데씩 빠진 남주인공 모두를 매료시켰다. 다정다감한 성격만 매력이 아니었다. 여주인공다운 빼어난 미모도 갖췄다.
가을의 밀밭처럼 부드러운 금발과 시원하게 파란 눈동자, 여하간에 예쁜 얼굴. 아네모네와 마주친 캐릭터 중 그녀에게 빠지지 않은 남자가 없었다.
거기에 말도 안 되는 마력 보유량과 타고난 응용력까지 갖췄다. 말 그대로 마법사 중의 마법사, 최강자 중의 최강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과거는 불행했으니…….
아네모네는 몰락한 귀족의 사생아로 부모님이 일찍 숨을 거둬 천애 고아로 살아간다.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는 슬럼가의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허드렛일로 시간을 때워야 했다. 미모도 마력도 선보일 수 없는 곳이었다.
부모도 재산도 없이 세상으로부터 무시 받는 매일매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밝고 희망찬 모습으로 슬럼가 아이들에게 빛이 되어준 아네모네.
그렇게 열다섯 살까지 버틴 아네모네는, 천재 마법사 알라타의 눈에 들어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동시에 아네모네의 화려한 연애 게임과 악역 영애 달리아의 수난기가 시작된다.
‘바꿔서 생각하자. 아네모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않으면 모든 사달은 일어나지 않아.’
아네모네가 의탁하고 있는 여관이 어디인지는 잘 알고 있다. 제국 수도와 붙어 있는 교외의 슬럼가는 한 곳뿐이었다. 후작령과 인접해 있는 바로 이곳, ‘아도니스’.
아도니스는 오로반체 후작에게 엿을 먹인 도적단이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했다. 도적단을 찾는다는 건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나는 도적을 찾는 대신 아네모네를 찾아내 그녀의 마력을 뿌리째 뽑아낼 것이다.
‘아네모네의 아카데미행을 반드시 저지하고야 말겠어.’
이것이 바로 오늘 이곳을 찾은 나의 목적이다. 나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양옆에서 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피핀, 코카. 둘 다 자연스럽게 행동해. 우리 목표는 도적단을 찾는 거지, 도둑질당하는 게 아니니까.”
아도니스는 슬럼가다. 지독하디 지독한 슬럼가. 가난한 이 동네에서 화려한 차림을 한다는 것은 ‘내 재산을 훔쳐가시오’ 하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슬럼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우리는 평민처럼 변장하고 나왔다. 마차도 타지 않았다. 마구간에서 가장 관리가 되지 않은 말을 억지로 더럽힌 다음 타고 오는 치밀함도 보였다.
도적단을 수소문하기 전, 우리는 말을 여관 한 곳에 맡기고 행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살집 좋은 여관 주인이 팔을 걷어붙이고, 우리 말의 고삐를 쥔 채 손바닥을 마구 흔들었다.
“말을 세 마리나 맡긴다면, 은화 다섯 닢은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나 많이 달라고 하다니! 사기 아닙니까?”
때아닌 바가지에 그나마 세상 물정에 밝은 코카가 항의했다. 나와 피핀은 이게 비싼지 아닌지 몰라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돈도 많으신 분들이 왜 이럴까. 그럼 맡기지 마시든가요. 누가 말을 훔쳐 가도 모릅니다, 이 동네에서는요.”
여관 주인이 음흉하게 웃었다. 우리가 평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다. 하긴 아무리 누더기를 입는다 해도, 평소 생활에서 묻어나는 돈 냄새는 숨기기 어려운 법이다. 피로와 가난에 찌든 영혼에선 말 엉덩이 같은 냄새가 난다.
우리의 물렁물렁한 인상은 여관 주인에게 단번에 간파당했다. 빙의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치열하게 살면서 나 또한 궁상맞은 기운을 풍기고 다녔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내는 사이, 나도 모르게 부티 나는 인상이 됐나 보다.
“싫으면 마시구. 내 여관이 마을 초입에 있어서 말 맡기기엔 여기만 한 곳이 없어요. 말 데리고 아도니스 안으로 깊게 들어갔다간, 걷는 도중에 빼앗길걸? 아, 싫으면 말아. 은화 다섯 닢.”
여관 주인이 턱을 치켜들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의 건방진 태도에 열이 받았는지, 피핀의 손이 검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었다. 검으로 사람을 벨 리는 없고, 검집으로 두들겨 패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한편 피핀이 풍기는 살기를 느꼈을 법도 한데, 여관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슬럼가에서 터를 잡고 산 사람은 역시 다르다.
“후후……. 도적이 많은 동네예요. 말 세 마리, 안전하게 지켜드립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들이 누구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나으리 앞에서 자꾸 건방지게…….”
“여기 아니면 말고기 들고 뚜벅뚜벅 걸어 돌아가셔야 한다니까?”
연이은 도발에 피핀과 코카 둘 다 열이 받은 듯 씩씩거렸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중재했다.
“여기서 싸울 필요는 없어. 이따 말을 찾으러 오지.”
여관 주인이 원한 만큼의 돈을 건네줬다. 그러면서도 나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만큼, 우리 말을 잘 돌보고 있어야 할 거야. 말의 꽁지 털 하나라도 상하면 모가지로 갚게 해줄 테니.”
“아이고, 무서워라.”
여관 주인은 그제야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받아 갔다.
슬럼가 아도니스는 첫인상부터 별로였다.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더욱 가관이었다. 마을 안은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웠으며, 어디선가 구린 냄새도 풍겼다. 아직 오전이었는데도 성인들은 술병을 휘두르며 비틀거렸다. 어린애들은 짱돌을 들고 길짐승을 쫓아다녔다.
“오늘 안에 도적단을 찾을 수 있을까요?”
피핀이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도적같이 생겼는데요.”
걱정하는 피핀과 달리, 코카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와. 아도니스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네요. 인신매매 때문에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본 풍경이랑 똑같아요. 참 좋은 동네예요.”
나와 피핀이 동시에 코카를 돌아봤다. 코카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런 코카의 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좋은 동네라고? 여기가? 너, ’좋다’의 뜻을 모르는 거 아냐?”
그 순간 와장창! 술병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성인 몇 명이 서로 엉겨 붙어 술병으로 머리를 내려치며 싸우기 시작했다. 상대를 저주하는 욕설은 교회의 종소리처럼 쩌렁쩌렁했다.
“…….”
“…….”
나와 피핀이 동시에 코카를 바라봤다. 코카는 아비규환을 담백하게 바라보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저래도 죽지는 않을 거예요.”
코카의 말에 뒤이어 비명이 들렸다.
“죽었어! 네놈이 사람을 죽였다고!”
우렁찬 고함 소리였다.
우리 셋은 서로 마주 보며 머쓱하게 턱을 긁었다. 피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우리가 왔던 길을 가리켰다.
“그냥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도적단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 동네 자체가…….”
우리가 대화하는 와중에, 소매치기를 하려는 어린애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이놈들, 저리 가!”
코카가 소매치기 꿈나무들을 몰아냈다. 피핀이 한숨을 쉬었다.
“마을 전체가 도적인데, 도적단이 따로 있다는 게 안 믿겨요.”
피핀이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코카가 입술을 달싹이며,
“그래도…… 가끔이지만 좋은 사람도 있어요.”
하고 말했는데, 그 순간에도 어디선가 비명과 고함이 하모니를 이루며 합창 중이었다.
“…….”
물론 내 마음도 피핀과 같았다. 당장 도망치고 싶다. 안락한 집에서 쉬면서, 달리아의 재롱이나 구경하고 싶다.
하지만 내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아네모네의 해피 아카데미 라이프를 뭉개버리겠다는 목표 말이다.
도적단을 잡는다는 핑계가 아니고서야, 이 불한당 소굴에 찾아올 명분이 없지 않은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 아네모네를 볼 수 있는 건 2년 뒤다. 아네모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까지 기다릴 순 없어!
“너희는 너희대로 도적을 찾아. 나는 따로 움직이겠어.”
나는 의연한 척 말했다. 그러자 피핀이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요, 나으리. 이 동네는 미쳤다고요. 같이 다녀야 해요.”
피핀의 말은 상식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비상식적인 짓을 하러 가야 한다.
피핀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피핀. 난 널 믿고 있어. 감이 좋은 너라면 도적단의 수장을 곧장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나으리?”
“내가 같이 다니면 네가 일에 집중할 수 없잖아. 네가 집중할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워주려는 것뿐이야.”
“나으리……!”
“안전한 곳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피핀이 그나마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성이 ‘충성’이라 그런가? 속여먹기 좋은 놈이다. 이렇게 순진하니 간악한 아네모네의 유혹에 넘어가 황태자도 배신하고, 프리랜서 용사가 되어 생고생을 했던 거겠지. 넌 내 호위 기사가 되어서 인생 핀 거야.
다음 차례는 코카였다. 나는 코카의 어깨도 두드렸다.
“코카. 내 호위 기사로 맡는 첫 번째 임무다. 잘할 수 있지?”
“네? 네, 네!”
“피핀을 도와줘. 아도니스를 너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피핀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네 역할이야.”
“역할……!”
“난 믿어. 네가 잘할 수 있으리라고.”
“공작님……!”
피핀과 코카가 동시에 감동 받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온화하게 웃어주면서, 두 사람이 보이스 피싱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안심했다.
“그럼 두 사람, 출발해!”
“네!”
“알겠습니다!”
내 입에 발린 소리에 홀랑 넘어간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나는 둘이 걸어가는 방향을 지켜보다가, 후드를 둘러쓰고 다른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었기에.
아네모네. 천사의 탈은 쓴 악마.
우리 아기 병아리 달리아의 인생을 바꿔놓을 작자를 만날 시간이었다.
***
지금 시간대에서 아네모네는 고작 열세 살짜리 소녀였다.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 매일매일이 즐거운 어린이로 살았을 텐데.
‘불쌍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게 낫다.’
내버려 둔다고 아네모네가 행복해진다는 보장도 사실 없다. 원작은 엔딩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고, 해피 엔딩보다 배드 엔딩의 가짓수가 더 많았다.
사실 플레이어가 잘 해냈을 때나 해피 엔딩이지, 확률적으로 아네모네는 불행한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놈들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아카데미에 가지 않았더라면, 마력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불행들이었다.
‘나중엔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거다.’
내 계획은 간단했다. 아네모네의 손목만 잡아도 성공할 수 있다.
스킬 ‘개와 늑대의 시간’을 통해 아네모네의 마력을 빼앗는 것. 이게 내 목적이었다.
테네리페가 나를 붙잡고 스킬을 썼을 때 느꼈다. 타인의 영혼이 내 몸을 탈취하며, 그의 마력을 억지로 몸에 주입하는 감각을.
놈의 영혼이 나갈 때 느꼈던 불쾌감은, 내 마력이 그의 영혼 조각에 달라붙어 생긴 저항감이었다. 끈적이는 본드가 가득 들어있는 컵에 다른 본드를 넣었다가 빼는 것과 비슷하다. ‘개와 늑대의 시간’을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마력의 교환이 이루어진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 원리를 역으로 이용할 것이다.
스킬로 내 영혼을 아네모네의 몸에 넣었다가, 그녀의 마력을 전부 훔쳐 회수할 작정이다. 마력이 부족한 아네모네는 마법을 쓸 수 없다. 평범한 사람은 마법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없고, 원작의 요란한 치정 싸움도 결국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쿠르드 여관……. 여기다.”
마을을 탐색하며, 나는 어렵지 않게 아네모네가 일하고 있는 여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네모네는 이곳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잘 가라, 과거의 주인공. 이제 우리 달리아에게 여주인공 자리를 넘겨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