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16
116.
아까 남궁청운과 연이현의 대화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적어도 서호까지는 동행할 거란 뜻이니 어떻게든 이린에게 말을 붙여 볼 기회가 있을 듯했다.
말을 거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자꾸 가슴이 쿵쿵대서 청휘는 태연한 얼굴을 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와, 저기 봐요. 배 위에 2층 누각이 있는데요?”
“비싸 보이는 배네. 운 오라버니 낭비한다고 혼나는 이유가 다 있었다니까.”
“어허, 타기 싫으면 말고. 내가 강요는 안 한다.”
동생들에게 너스레를 떠는 남궁청운의 모습을 보며 청휘도 눈을 깜빡였다.
남궁세가에서 호화로운 생활에는 비교적 익숙했지만 그도 이런 것을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셋째 형님이 이 정도로 씀씀이가 컸나?’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어 자주 어울려 본 적이 없어 몰랐던 것뿐일지도 몰랐다.
바로 어제 산적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봤는데 이쪽은 너무 별세계라 이질감이 들 지경이었다.
“대단하네. 하지만 뒤에는 더 화려한 것도 있는걸?”
“와, 저런 게 용케 물 위에 떠 있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정말 남궁청운이 수배해 두었다는 화려한 배보다도 더 크고 화려한 배가 보였다. 기와를 금색으로 칠해 놓은 것이 보통 배 같지는 않았다.
“저 정도면 어디 황족이라도 온 거 아냐?”
“요새 황실도 뒤숭숭하다는데 그래도 되나?”
“적장자였던 태자가 급사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 자릴 노리는 황자가 한둘이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래?”
“우리가 알 게 뭔가. 또 자기들끼리 뭐 쌈박질이라도 하고 있겠지. 어차피 누가 뭐가 되든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런거림을 들으며 동정호가 초행길인 이들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궁청운은 옆에 있는 배가 신경 쓰여 조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지만 그런 일로 시비를 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여전히 이린과 이현을 힐끔거리는 청휘의 옆에서 제갈수원이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속닥거렸다.
“그런데 형님, 정말 어제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조금 일이 있었어.”
어제 일을 대체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머리가 돌아가질 않아 청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어젯밤 이린이 갑자기 서둘러 돌아가 버린 이유 정도였다.
지금도 저렇게 철통 방어벽 속에 있는데 연이현이 누이동생을 그 시간에 혼자 밖에 내보낼 리가. 아마 이린이 오라비 몰래 그곳에 나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다 자신과 마주쳐 도망치다 이상한 곳까지 뛰어갔고.
‘생각해 보니 나 때문에 산적하고 얽힌 셈이니.’
이린이 자신을 보고 싫은 얼굴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첫인상이 최악이란 사실을 깨달은 청휘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남궁 삼공자. 오셨습니까?”
“그래. 오늘 가장 화려하게 동정호를 노니는 건 이 몸일 거라 생각했는데. 저건 뭐야? 정말 황족이라도 왔나?”
“송구합니다.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 어찌 귀하신 분들을 입에 올리겠습니까.”
“쳇, 고생이구만.”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곧 준비가 끝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급하게 준비하느라 바쁘다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선주(船主)와 일꾼들을 뒤로하고 일행은 근처에 천막을 치고 영업 중인 작은 다점(茶店)으로 향했다.
안에는 마찬가지로 배를 기다리는 이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 뱃사람들부터 면사로 얼굴을 가린 귀부인까지 신분에 관계없이 동시에 일행을 주목했다. 연이현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는 하나 남궁 형제는 물론이고 주변의 다른 이들 역시 대부분 훤칠한 미남자들이니 시선이 아니 모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 남궁청운을 알아본 이들 몇몇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니, 뇌성검룡 남궁 대협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 그래도 선착장이라 사람이 붐비는 와중에서도 그 유명한 남궁세가의 작은 공자가 나타났다는 말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별로 그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 일행은 슬쩍 뒤로 물러나 차를 주문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일행을 따르려던 남궁청휘의 귀에 요란스런 목소리가 꽂혔다.
“들었습니다. 남궁세가의 직계인 어느 공자께서 단신으로 산적을 토벌하셨다면서요?”
“어젯밤 일이지만 벌써 소문이 파다합니다. 역시 남궁세가의 공자님은 다르십니다.”
“호오.”
금시초문인 청운의 시선이 당연히 뒤로 물러나고 있던 청휘를 향했지만 청휘는 지친 얼굴로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문이 대체 어떻게 퍼진 건지 몰라도 매우 민폐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대화를 들은 일행의 시선에는 감탄이 섞였다. 간밤에 남궁청운이 주루에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과 남궁청휘가 어제 나가 오늘 오후에야 합류했음을 잘 아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와, 형님 진짜예요?”
“대단하군요.”
“그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남궁세가의 위명을 빌려 관병을 불러온 게 전부일 뿐 정작 산적 토벌을 한 건….”
당혹스러워 서둘러 변명하며 이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마찬가지로 자신을 보고 있던 이린이 살짝 고개를 젓는 것이 보여 청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어떤 협객(俠客)께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산적을 토벌하고 사라지셨다고 하더군요.”
“헤에.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요? 형님이 하고 괜히 감추시는 거 아녜요?”
“내가 했다면 감출 이유가 뭐 있겠어. 네가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겠지.”
하긴 그런 사람은 어디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거 아니겠냐고 너스레를 떠는 제갈수원의 말에 모여든 사람들 역시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예전 검성 같은 분이시군요.”
모두가 한 마디씩 던지는 와중 다점 주인장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검성이요?”
“예. 예전에 검성께서 이름을 날리시기 전 동정호를 즐겨 찾으셨는데, 그때마다 주변의 산적들을 소리 소문 없이 쓸어버리고 다니셨다고 들었습죠. 그렇죠, 아저씨?”
“거참. 검성 얘기만 나오면 꼭 이러니.”
“아저씨는 직접 뵌 적도 있다면서요.”
“정말이오?”
주인장이 말을 건 이는 다점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던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백발의 노인장이었다.
남궁청운 근처에 모여 있던 무인들은 물론이고 귀부인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차가운 얼굴의 수행원들까지, 노인장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노인은 익숙한 듯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노인이 겪은 검성에 얽힌 일화는 실상 그가 이곳에서 이 나이까지 일을 할 수 있었던 밑천이기도 했다.
“뵌 적이 있고말고요. 은혜를 입기도 했지요.”
“진짜요? 하지만 영감님이 본 사람이 검성인 건 어떻게 알아요?”
호기심이 동한 제갈수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틀림없습니다.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화문, 윤위라 부르시는 것을 똑똑히 들었는걸요. 게다가 그분들이 오실 적마다 근처의 산채들이 불타곤 했기에 나중에야 그분들이 검성과 마련야장이신 것을 알았지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어느 귀부인이 신기한 듯 물었다.
“검성이 여인이었던가? 당연히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말들이 많지만 강호의 대단하신 분들은 다들 여인이라고 말씀하셨습죠.”
또다시 검성의 성별에 대한 논쟁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제갈수원은 이제 포기한 듯 새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검성을 본 거네요? 마련야장도요?”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고모님이지만 자기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닌 만큼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갈수원의 태도는 적극적이었다.
“제갈세가 아가씨들과 같이 다니셨으니 분명 마련야장께서도 함께 계셨겠죠.”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십니까? 미인이었어요?”
“어휴 저희 같은 사람들 눈에는 다들 선녀님 아니겠습니까요.”
처세에 잔뼈가 굵은 노인장은 말을 아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분이 검성이셨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곳에 몇 번인가 찾아오셨는데 그때마다 몇 명씩은 다른 사람이었어도 제갈세가분 몇 분과 다른 여협 몇 분은 꼭 끼어 있었으니 그분들 중 한분일 거라 짐작합니다만….”
“어떤 여협들이었는데요? 검성이라고 짐작 가는 분은 없어요?”
“으음. 단정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의 여협과 조금 평범… 아니, 덤덤한 표정으로 무뚝뚝해 보이는 여협이 계셨지요. 두 분이 체격이나 차림새가 비슷해 처음에는 자매라 생각했는데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 둘 중 한 분이 검성이었어요?”
“아마 그럴 겁니다.”
반대쪽에서는 여전히 검성이 여인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남궁청운을 붙잡고 확인하고 있었다
“남궁 대협께서는 아시지요? 정말입니까?”
“나도 여협으로 알고 있는데. 누가 남자라고 한 적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남궁청운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단언하자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던 이들도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다. 노인장은 그런 반응도 익숙해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련야장께서도 여인이신데 모르는 분이 많았지요.”
“야장 중에 여인이 드물긴 하지요. 덕분에 웃기는 헛소문도 많고.”
제갈수원이 동의를 구하듯 쳐다보자 청휘 역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수원과 대화하다 자연히 청휘에게 시선을 돌린 노인이 눈을 크게 뜨고 청휘를 응시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아니, 소협께서 소인이 예전에 뵌 분과 닮으신 듯해서요.”
“제가 노인장이 알고 계신 분과 닮았습니까?”
뜻밖에 화제가 자신에게로 옮겨 오자 청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까 말씀드린 검성의 일행분들 중 제갈세가분이 여럿 계셨는데 언젠가 뵌 제갈세가의 어린 소저께서 소협과 꼭 닮으셨습니다. 당시에 어린 소저셨지만 지금은 중년의 부인이시겠지요. 참으로 고운 분이셨습니다.”
“…….”
그 말에 청휘는 짚이는 바가 있어 침묵했다. 마련야장에게 청휘의 어머니는 어린 친척 누이였다. 친구들과 놀러 갈 때 어머니를 동행시킨 적이 종종 있다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분은 엄청 미인이셨나 보네요.”
아까 말을 아끼던 자세와 달리 단박에 튀어나온 찬사에 제갈수원이 히죽히죽 웃자 노인장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공자님. 그 소저께서는 당시 소인의 딸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 아가씨였습니다. 심지어 제 딸을 구해 주기까지 하셨으니 그야 당연히 기억에 남지요.”
“구해 주셨다고요?”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아들자식이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넘어가 노름빚을 진 적이 있었습죠. 그때 빚 대신 딸이 끌려갈 뻔한 것을 구해 주셨지요.”
“오오. 그래서요?”
“다른 분들께선 지금 막아 봤자 결국 우리가 없을 때 다시 와서 행패를 부릴 거라 하셨고, 저희도 차마 도움을 청할 염치가 없을 때 그 소저께서 말씀하셨지요.”
흥미진진한 노인장의 말에 시끌벅적한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그럼 내가 대신 잡혀가 볼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