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83
183.
이린은 상단 안으로 들어서는 얼굴을 보고 화색이 되어 달려 나갔다.
“오빠!!”
“린아!!!”
“괜찮아? 안 다쳤어? 어휴, 무슨 일이야. 얼굴에 살이 쏙 빠졌네.”
“그 정도는 아니야.”
오랜만에 여동생과 만나자 이현의 피곤한 얼굴이 활짝 피는 것을 본 벗들이 쯧쯧 혀를 찼다.
오누이의 애틋한 상봉 현장을 보고 있던 이들 중 하나가 면사를 걷고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이린!”
“백리 소저?”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자 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된 거예요?”
“위험하니까 나만 피신해 있으라는 거 있죠?”
아무래도 왜구의 침략이 단발성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백리한 아저씨는 그럼 다시 돌아가요?”
“일단 돌아갈 거야.”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잖아.”
“그렇다고 어떻게 안 돌아가.”
“?”
의아해하는 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이현은 설명을 덧붙였다.
“아들이 셋이면 하나는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하셨거든. 내륙이 아무래도 안심되니까 장사에서 지내라고 하시더구나.”
“아, 그렇군요.”
잘못하면 후계자가 모두 죽어 버릴 수도 있으니. 생존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소흥에 있으면 무공이 뛰어난 백리한은 여기저기 불려 나가게 될 가능성이 높지.’
가주도 아니고 소가주도 아닌 셋째 아들이니 더더욱.
‘그렇다고 떠나 있기엔 본인 마음이 편하진 않겠네.’
어느 쪽도 이해는 가지만 호락호락 따를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녀석 잘 도착했다고 알리러 돌아가야지. 하긴 왜구가 줄어들지를 않으니 걱정이긴 하다만.”
“아니, 내가 짐이야?”
“금송아지라고 해 주랴?”
이미 왜구에게 납치당한 경험이 있는 백리설은 발끈하면서도 조금 기운 빠진 얼굴이었다.
가족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사정을 들은 연적훈은 당연하게도, 백리설을 상단에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백리한은 연적훈이 거절하려 하는 선물을 강제로 떠넘기며 동생을 보호해 줄 것을 청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러했듯 동생을 맡긴 후 쉬지도 않고 훌쩍 돌아가 버렸다.
* * *
“다녀왔습니다. 대모님.”
“어서 오세요. 신녀.”
여인이 반갑게 자신을 맞아 주자 굳어 있던 세하의 얼굴 역시 풀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세하는 여인의 무릎 위로 어리광부리듯 풀썩 쓰러졌다. 여인의 옆에 있던 백린이 반가운 듯 세하의 손에 머리를 문지르며 애교를 부렸다.
“지친 것 같군요.”
“힘들어요. 대모님.”
“황도의 일도, 소황룡의 일도 잘 진행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여인은 풀썩 쓰러진 세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세하는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대모님, 저 연가장주의 딸을 만났어요.”
“소황룡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 얘기는 들었습니다. 예전에도 만났다고 들었는데 또 마주쳤더군요.”
“왜구에게 납치당한 이들을 구하겠다고 해적선으로 뛰어들었다고 했어요. 덕분에 또 만나 버렸죠.”
멍하니 눈을 뜬 세하가 제 손을 바라보며 그날 일을 떠올렸다. 자연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상은, 어찌나 불공평한지.
“강했어요. 아직 어린아이인데.”
“…연적훈의 딸이?”
“친딸이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정말 친자일지도 모르겠어요. 유정검과 그 아이가, 연가장을 다시 예전처럼 만들지도 모르죠.”
“그렇군요.”
지친 세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는 변함이 없었다.
세하는 조용한 다정함에 기대어 겨우 숨을 내쉬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 온 대모는, 세하가 아는 이들 중 가장 현명하고 박식한 이였다
“대모님. 검성과 구천현녀는 절친한 벗이었다고 하셨죠?”
“네.”
“두 사람이 승부를 가린 끝에 구천현녀가 패배하였고, 비열한 자에게 검성이 살해당할 뻔한 것을 구천현녀가 구해 주고 대신 죽었다고 하셨잖아요.”
세간에는 검성이 구천현녀를 죽였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세하가 대모에게 들은 진실은 달랐다. 검성의 성별조차 잘못 알려져 있는 세상이니 그 사실이 잘못 알려져 있는 것도 뭐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그….”
세하가 뭔가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타다다닥.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세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신녀님!”
“소운? 무슨 일이지?”
달려온 이는 늘 대모님의 신변을 살피는 소운이었다.
“서월각 부교주님이 생환하셨습니다!”
“!?”
부재중에도 정보는 들어오고 있었기에 세하는 위지선이 소주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죽었나 했더니 명줄도 길군.’
그대로 없어져 줬으면 편했을 텐데.
“교주가 부를 테니 미리 가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쉬지도 못하게 하다니, 정말 도움이 안 되는군요.”
여인은 한탄하는 세하에게 손을 뻗었다.
“대모님.”
“피곤하겠지만. 다녀오십시오.”
“네.”
다정한 온기를 느끼며 세하는 애써 지친 걸음을 옮겼다.
사고를 치지 않을까 했지만 제 전력을 다 잡아먹고 돌아올 줄이야. 그저 한숨밖에 안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놈들이 나를 잡으려고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보를 유출한 놈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다.”
“교주님!! 그 반역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다쳤다더니 너무나 팔팔한 목소리에 세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실패한 자가 말이 너무 많았다.
“부상을 입었다 들었는데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군.”
“!”
세하가 입을 열자 어딘지 닮아 보이는 사내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돌아왔느냐.”
“방금 돌아왔습니다. 교주님.”
“네년이지?! 네가 정보를 유출한 거지?!”
다짜고짜 시비를 걸며 다가오는 위지선을 보는 세하의 시선은 싸늘했다.
“신교가 실패했을 때는 네 핑계를 댄 적이 없는데. 왜 네가 실패하니까 내 탓을 하지?”
“뭣!”
두 사람의 분위기가 과열되자 조용히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됐다. 돌아가 쉬어라.”
“교주님!!”
“위지선. 이번 실패를 만회할 생각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송구합니다.”
위지선이 떠나자 교주의 시선이 다시 세하에게 돌아왔다.
“저놈이 좀 부족한 것이 많으니 네가 잘 돌봐 주거라.”
“…서월각 부교주와 저는 동갑입니다. 교주님.”
“안다. 세상에 하나뿐인 쌍둥이 형제거늘. 어찌 그리 매정한 것이냐.”
교주의 말에 세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피를 나누면 형제면 뭐 하겠는가 하는 짓이 개차반인데, 하지만 세하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주의 손이 세하의 머리 위에 얹어지자 세하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 아비가 너희에게 그리 매정하였느냐?”
“…아닙니다.”
그럼 위지선이 신교를 핍박하고 약한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자신을 압박하는 이 위압감은.
“…아버지.”
세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네가 잘하고 있으니 좀 도와주렴.”
“…송구합니다. 지금 신교도 형편이 좋지 않….”
짜악!
“지금 내게 거역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제 이 정도는 익숙하다 보니 세하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교주는 그것도 맘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내게 변명하지 말거라.”
“네. 교주님.”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세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교주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네 본분을 잊지 마라. 너는 신교의 교주가 아닌 혈교의 부교주이니 어디까지나 혈교를 위해 일해야 한다.”
“네.”
“물러가거라.”
세하는 내심 안도하며 서둘러 몸을 뺐다.
뒤에서는 교주의 작은 혼잣말이 들려왔다.
“역시 그 계집에게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일은 잘하지만 딸이라고는 사근사근한 맛이 없구나.”
세하는 다시 얼굴을 가렸다.
아무리 단련된 몸이라 해도 교주에게 맞은 얼굴은 어느새 부어올라 있었다.
‘다들 알고 있다 해도 굳이 보여 줄 필요는 없으니.’
혈교는 실력주의였다. 그러니 가장 강한 것은 교주였으며…….
교주의 의견에 감히 토를 달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신녀님!”
“조용히 해. 소운.”
부어오른 얼굴을 본 소운이 냉찜질을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다.
“또 그자가 신녀에게 손을 올렸습니까.”
“자주 있는 일이니 이젠 익숙합니다.”
“익숙하다 해도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대모님.”
걱정 어린 다정한 손길.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바란 것이었다. 하지만 세하가 아무리 뛰어나도 아버지가 세하를 칭찬한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위지선보다 약해서 위지선을 더 총애한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아니었다. 세하가 위지선을 무력으로 누른 그날부터, 교주는 세하에게 이상할 정도로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딸이 강해졌음에도, 기뻐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대모의 품에 안긴 세하의 머릿속에, 이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라면, 능력이 있다면 둘 중 누구든 하고 싶은 사람이 해도 괜찮다고 하시지 않을까 싶은…데요.]아버지의 사랑도 장원을 물려주는 것도 당연히 남매에게 공평할 것이라 믿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믿지 않을 것을 우려하던 그 눈빛.
[린아!!!] [정말이지? 괜찮아? 어디 다치진 않았고?]애정과 염려가 담긴 목소리.
진심으로 상처 입히는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다정한 오라비.
자신이 아무리 강해져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