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71
천하제일 시한부 (171)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억센 비가 쏟아져 내렸다.
팽가의 가주, 팽혁은 젊은 나이에 가주의 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전 가주였던 팽효의 장남으로 그는 성정이 대쪽같고 고집이 세기로도 유명했다.
그만큼 팽효의 자식들 중, 가장 팽효와 닮았다는 평도 많이 들었다.
“…….”
그런 팽혁이 망연자실한 채, 무릎을 꿇었다.
쏟아지는 빗물이 그의 어깨에서 튕겨 나와 허무하게 떨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 걱정 말라며 식솔들더러 도망치라던 아버지가.
싸늘한 주검이 된 채, 그렇게 허무하게 땅을 뒹굴고 있었다.
‘크하하, 아들아! 내 이번에 정녕 큰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네게 남길 심득을 적고 있는 중이다. 크흐흐, 내 나이 이제 팔십을 훌쩍 넘겼는데 슬슬 은퇴할 때도 됐지.’
차라리 그때, 은퇴하시라, 해야 했다.
그렇게 다른 곳도 좀 여행하시면서 재밌게 사시라고 보내 드렸어야 했다.
“아버지.”
팽혁의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가 무릎걸음으로 팽효에게 다가갔다.
원통하셨을까?
눈조차 채 감지 못한 팽효의 싸늘한 시신 앞에, 팽혁이 울부짖었다.
“크윽, 크으윽!”
그의 입술이 터지고, 피가 새어 나왔다.
“후후, 그럼 그렇지.”
그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혁이 도망칠 때 보았던 침입자가 지붕 위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제 아비를 두고 그냥 갈 순 없었겠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의 옷은 비에 단 한 방울도 젖어 있지 않았다.
그만큼 지닌 내력이 고강하단 뜻도 된다.
팽혁은 싸늘한 눈빛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리 가문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느냐?”
“팽가에?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팽혁의 물음에 침입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저 거슬렸기에 베었을 뿐이다. 그냥 도망쳤다면 죽이진 않았을 텐데, 나로서도 안타까울 뿐.”
그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쉽게도 비가 오는 바람에 계집의 흔적을 놓쳤거늘. 네놈을 잡아 분풀이라도 해야겠다.”
챠릉―!
그의 연검이 다시 채찍처럼 흘러내렸다.
팽혁은 말없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는 팽효가 잡고 있던 참월을 빼 들었다.
“네놈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팽혁이 참월을 들고 돌아섰다.
“실수?”
침입자가 씩 웃었다.
“감히 팽가에 침입한 것이 바로 네놈의 실수란 것이다.”
“크하하! 오만하기 그지없군.”
침입자는 무방비한 상태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의 웃음에 맞춰 연검이 춤을 추듯 출렁거렸다.
“형산파 멍청한 놈들도 내 삼초지적이 되지 못했다. 도성이라고 달랐나? 지금 누워 있는 도성 역시…… 조금 따끔하긴 했지만, 그뿐.”
“…….”
침입자는 다를 것 없다는 듯, 연검을 세워 팽혁을 향해 고정시켰다.
쿠궁―!
주변이 밝아졌다.
우레 소리와 함께, 은은한 뇌성이 울려 퍼졌다.
“도성의 발끝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으로…….”
파밧―!
침입자의 신형이 순식간에 크게 확장되었다.
아찔한 속도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침입자는 그대로 연검을 빠르게 휘둘러왔다.
“내 실수를 논해?”
촤락―!
연검이 뱀처럼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궤적을 교란했다.
핏―!
팽혁의 무복이 뜯겨 나갔다.
그 사이로 설핏 핏물이 튀긴 듯했다.
하지만 팽혁은 담담했다.
그는 차분하게 참월을 들어 올리고 자세를 낮췄다.
오호단문도의 기수식.
팽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호흡을 다스리고 그렇게 차분하게 침입자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왜 제게 가주직을 넘겨주신 겁니까?’
처음으로 가주가 되고 나서 팽효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당시 팽효는 당연하다는 듯 답해 주었다.
‘가장 팽가 놈들 같지 않아서 그런다.’
팽가답지 않다.
팽가답다.
그 말이 무슨 뜻일까.
수없이 고민도 해 봤지만, 나오는 답은 없었다.
“생각이 많군.”
그런 그의 상념을 깨우듯, 침입자의 공세가 시작됐다.
탓―!
침입자가 가볍게 도약했다.
터덥―!
팽혁은 그 상태 그대로 발뒤꿈치를 땅에다 처박고 자세를 고정시켰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단한 의지의 실현이었다.
쾅―!
참월과 연검이 격돌했다.
지이잉―!
참월이 운다.
팽혁은 느낄 수 있었다.
수십 년간 함께해 온,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듯이.
참월은 팽혁의 손에서 그렇게 흐느끼고 있었다.
까가가각―!
연검이 참월을 타고 올라왔다.
팽혁의 목을 집요하게 노리며 타고 올라오는 연검의 모습에 팽혁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척―!
팽혁이 다급하게 파지를 바꿨다.
엄지로 검 자루를 밀어 올려, 검의 궤적을 빠르게 틀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검이 미끄러져 내려갈 리도 만무했다.
“호오.”
반면 침입자는 다소 의외란 반응이었다.
“팽가의 무식한 놈들은 그냥 몸으로 부딪칠 줄 알았는데, 넌 좀 다르군.”
“…….”
팽효는 그랬다.
마치 멧돼지처럼, 모든 것을 거스르며 깨부수고 짓이기면서.
“무슨 수를 써도 너희 팽가의 무공은 내 유류연검식을 이길 순 없다.”
유류연검식.
팽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선뜻 기억나진 않았다.
“지금처럼…….”
텁―!
침입자의 신형이 팽혁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기본적인 도 보다 더 짧은 길이를 가진 참월.
그런 팽혁에게 거리를 준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침입자는 그런 상식을 완벽히 깨부쉈다.
촤악―!
연검이 팽혁의 목을 감싸듯이 한껏 구부러졌다.
“이따위…….”
팽혁이 황급히 참월을 떨쳤다.
“일반적인 연검이 아니구나.”
참월을 사이에 꽂아 넣어 간발의 차로 목이 잘릴 뻔한 것을 막았다.
보통 연검이라면 일반적임 검에서 살짝 탄성이 가미된 검을 말한다.
하지만 이건 뭐, 채찍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옳았다.
“다르군.”
침입자가 입맛을 다셨다.
그가 연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도성과는 달라.’
분명 팽효보다는 약하다.
하지만 약하지 않다.
웃긴 말이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왜? 못 들어오겠나?”
팽혁은 그런 침입자의 이상한 반응을 눈치챘다.
그러고는 한껏 조소를 머금었다.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군.’
팽혁은 고정시킨 자세 그대로 한 치의 변함없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네놈…….”
침입자가 재차 몸을 날렸다.
오지 않는다면, 간다.
촤악―!
연검이 뱀처럼 허공을 유영했다.
느리지만 느린 속도가 아니다.
연검의 검 끝이 팽혁의 주요 사혈 총 열두 곳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대방위 세 곳을 포함해, 시야를 어지럽히려는 속셈이었다.
핏―!
핏물이 튀었다.
팽혁의 전신이 점차 넝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연검은 가차 없이 팽혁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후욱.”
그래도 팽혁은 꿋꿋하게 참월을 휘둘렀다.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군.”
침입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흔한 도기 하나가 내보이지 않는 팽혁의 자제심을 칭찬했다.
“그쪽도 제대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오호라, 대체 뭘 감추고 있는 것인가.”
침입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팽혁의 저 오만한 태도가.
“감추고 있는 것 없다. 다만 신중할 뿐이지.”
가주니까.
수십 명 식솔들의 목숨을 짊어진 가주니까.
팽혁의 어깨에는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이 짊어져 있었다.
“다르군.”
침입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가의 멍청이들과는 질적으로 달라. 헌데도 그 단순한 기질 때문에 오욕을 뒤집어쓰는 것이 안타까울 뿐.”
“원수의 입에서 우리 가문의 칭찬을 듣고 싶진 않다.”
팽혁의 말에 침입자가 이내 연검을 내렸다.
“네놈은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다. 내 이름은 검자하, 유류연검의 계승자다.”
“검자하?”
검 씨, 검 씨.
그 말을 되뇌던 팽혁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설마, 구주검문의 그 검…….”
“용케 아직도 구주검문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니, 놀랍군.”
침입자, 검자하가 이내 빙그레 웃었다.
그가 자신의 입을 가린 복면을 끌어 내렸다.
입술 위쪽부터 아로새겨진 흉터가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구주검문이라면…… 대체 왜 이런 짓을.”
팽혁이 소리쳤다.
그들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검문이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명문 중의 명문인 것도 사실이었다.
대협객 검치의 전설적인 행보로, 구주검문의 이름은 드높아졌고 그의 유류연검식은 무림십대무공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내 이름을 들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대는 이제 살 수 없다.”
파슷―!
연검이 희뿌연 운무로 둘러싸였다.
동시에, 대지가 진동했다.
대기의 움직임이 멎었다.
고오오―!
스산한 살기와 함께, 연검이 푸른 빛으로 휘감겼다.
“검기.”
팽혁이 이내 자세를 고쳐잡았다.
파밧―!
검자하는 이내 팽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뱀처럼 허공을 유영하던 연검이 조금 전과는 달리 매섭게 팽혁을 꿰뚫었다.
촤악―!
곡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연검은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팽혁은 미처 막아 내지조차 못했다.
“후…….”
검자하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거센 맹공에도 팽혁은 절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팽혁의 전신이 피로 흠뻑 젖어 갔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양보다 흘러나오는 핏물이 더욱 많았기에.
하지만 그럴수록 팽혁의 눈빛은 더욱더 또렷해져만 갔다.
“끝이다.”
촤악―!
이내 검자하가 연검을 횡으로 깊게 쑤셔 넣었다.
물결처럼 파문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검기의 파편이 그대로 팽혁의 몸을 갈라 버렸다.
풀썩.
이내 팽혁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참월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쓰러지는 것만은 면한 팽혁이 지친 눈을 들어 검자하를 바라보았다.
푹―!
동시에, 검자하의 연검이 팽혁의 복부를 꿰뚫었다.
변변찮은 대응 한번 하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목숨이 질기군.”
검자하가 짧게 숨을 내뱉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팽효보다 더욱 오래 검을 뿌린 것 같았다.
‘상대가 되지 않는구나.’
숙인 팽혁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주로서 뭐 하나 제대로 한 것 없이 세월은 흘렀다.
그래도 가족들을 피신시켰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하는가.
‘아니야.’
억울하다.
점차 팽혁의 눈빛에서 생명의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죽어 간다.
몸이 죽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팽가 놈 같지 않아서.’
팽효의 말이 기억났다.
두둥―!
그의 심장이 고동쳤다.
“호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검자하가 다시 돌아섰다.
그의 연검이 다시 살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처적―!
팽혁이 우뚝 섰다.
그의 눈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이건…….”
드드드드드―!
진동하는 사위.
울부짖는 대기.
천지가 개벽했다.
‘제게도 심득을 좀 나눠 주시지요, 아버님.’
심득을 깨우친 팽효에게 며칠 전 했던 말이었다.
당시 팽효가 말했다.
‘이미 넌 다 가졌지 않았느냐.’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이젠 자신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당시에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쿠구구궁―!
대지가 준동했다.
‘패왕연혼진기.’
상처 입은 육체가 꿈틀거렸다.
핏물이 순식간에 멎었다.
정신이 다시 또렷해졌다.
척―!
팽혁이 손을 뻗었다.
떨어뜨렸던 참월이 손으로 빨리듯이 휘감겼다.
“크하악―!”
팽혁이 거칠게 호흡을 터트렸다.
“팽가는…….”
번뜩―!
참월이 다시금 매섭게 빛을 흩뿌렸다.
“죽지 않는다.”
텅―!
단단히 고정시켰던 그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