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80
천하제일 시한부 (80)
십 년 전.
나는 개방 방주를 죽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발…….”
개방 방주, 척무령은 나와 꽤 사이가 돈독했던 관계였다.
거지들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나의 독선적인 느낌이 꽤나 잘 맞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둘의 사이는 너무도 짧게 또한 강렬하게 끝나 버렸다.
“나, 날 죽여 줘라. 서진.”
“…….”
피를 왈칵 쏟아 내며 비척거리는 무령을 보며 난 침음을 집어삼켰다.
벌써 몇이던가.
내 곁을 떠난 친우가.
정을 주려 하면, 그들은 훨훨 날아가 버린다.
이제 좀 친해졌다 싶으면, 이 뭣 같은 세상은 꼭 그걸 앗아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스릉!
검을 뽑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검으로 찔러 버리면 그만이었다.
사람의 생명은 파리 목숨만도 못하다고.
아니, 무림인의 생명은 한낱 미물만도 못하다고.
그 말이 꼭 맞았다.
촤악!
시뻘건 피가 눈앞을 가렸다.
흥건한 피에 적셔진 머리가 차갑게 상황을 인지했다.
“이, 이게 대체.”
노걸개.
그 영감탱이가 뒤늦게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내 검에 무령은 죽었다.
제 스스로 검에 달려들어 심장을 꿰어 버린 것이다.
“아무 말 말거라.”
노걸개는 재빨리 내 장포를 벗겼다.
그러고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흔적을 모조리 없애 버리기 시작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증거를 없애고,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꾸미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들 같은 무령이 죽었는데도, 노걸개는 침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으득!
난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거라, 서진아.”
노걸개의 외침도, 당시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울분을 모조리 토해 내고 싶었다.
“마교, 이 씹어 먹을 종자들. 내 반드시 씨를 말릴 거다.”
내 말에 노걸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이제 개방도 방식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거야.”
“영감. 당신은 왜 그리 차분하지? 무령이 죽었는데 그리 멀쩡할 수가 있나?”
내 말에 노걸개의 입가에 차디찬 미소 한 줄기가 걸렸다.
“마공에 잠식된 놈이다. 어쩔 수 없는 걸 알지 않느냐. 예서 내가 울어 봐야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래, 그 말이 맞다.
냉정하게 상황을 보자면 그냥 나자빠져 울면 안 됐다.
“넌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죽인 거다. 내가 방관하고 묵살했기에 무령이가 이렇게 홀로 죽어 간 거야. 얼마나 고독했을꼬, 얼마나 외로웠을꼬.”
뒤 늦게서야 노걸개는 쓰러진 무령의 얼굴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노걸개는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교에 대한 행적은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하나하나 모조리 찾아낼 거다, 너는…….”
“찾아내는 대로 나한테 알려. 내가 다 죽여 버릴 거니까.”
그걸로 끝이었다.
노걸개는 숨어들었고, 무림맹은 개방 방주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십만 개방도가 울부짖었고,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숨을 죽였다.
흑련조차 조용히 애도를 보냈으며, 황궁에서도 방주의 죽음을 기렸다.
마지막 노걸개가 움직이는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잡혀 들 거다. 하지만 개방 방주인 날 어쩌지는 못할 터.”
“아니야.”
난 고개를 저었다.
“부인해. 끝까지 부인해. 영감, 당신이 부인하면 감히 함부로 잡아넣지 못할 테니까. 또한 만약 영감에게 손을 댔다간.”
난 검을 들어 묻을 피를 털어 냈다.
“내가 죽여 버릴 거니까.”
* * *
“흐읍.”
초영이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개방주의 죽음에 관한 비사였다.
“대체, 이게…….”
“노걸개, 그 영감탱이가 음흉한 구석이 많아.”
“그럼 대체 왜 저한테 단주님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한 건…….”
“나랑 있으면 꼭 뒤지더라고.”
난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가 정을 주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그래서 내 주변에 친구가 없어.”
내 말에 초영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그래도 진랑도 있고, 백 의원도 있고 뭐 몇 명 있긴 해.”
“바, 방주님은 그럼…….”
“아무튼 그래. 네 비밀이 고작 노걸개 영감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 뭐, 그건가?”
내 말에 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원으로서 실격이네. 대빵인 태상방주를 의심해 버리고. 큭큭.”
내 웃음에 얼굴이 빨개진 초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태상방주님을 함부로 조사할 수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자꾸 단주님과 갈라놓으려 하니까…….”
“그래, 그렇다고 하자고.”
난 이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초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비밀을 말해줘?”
‘꿀꺽.’
초영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그녀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데.”
말과 함께, 난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 잔칫상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형이 날 향해 손짓하고 있었기에.
“개…….”
뒤에서 날 욕하는 초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뭐…… 오늘은 참아 주기로 했다.
* * *
“형수, 괜찮아?”
“그럼요, 도련님. 오늘은 즐거운 날이잖아요? 놀자구요.”
모처럼 형수도 나왔다.
그간 큰아들을 잃은 슬픔에 방안에 박혀 슬픔을 삭히던 형수인지라, 괜히 가슴이 찡했다.
형수는 무사들과도 용케 잘 어울렸다.
간만에 느끼는 이 떠들썩한 분위기도 제법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것이 아니라 좋았다.
‘형산파가 멸문…….’
‘제마광천진으로 들어가려면 태신옥음보…….’
비록 내가 웃고 떠든다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저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아침부터 흑련주와 북궁설이 했던 얘기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래도…….”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가의 무사들은 이제 고작 백이십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적어도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이만한 규모의 세가를 온전히 보호하려면 적어도 오백쯤은 필요했다.
더군다나 악안에 영향력을 고루 미칠려면 최소 일천 이상은 보유해야만 가능했다.
“세가를 보호한다, 방어한다…… 수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가의 보호다.
적들이 함부로 침입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무사들이 있다면 좋지만, 적어도 문제없을 무언가.
“진법.”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진법을 만들어 놓으면 되잖아?”
진법에도 종류가 있다.
환영진, 왜곡진, 공간진, 교란진 등 무수하게 많은 진법이 있다.
실체를 투영하여 실제처럼 나타내는 환영진부터 해서, 공간 자체를 꾸며 내는 공간진 등등.
하지만.
“진법가를 어디서 섭외하지.”
어중이떠중이는 필요 없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장원 전체에 펼쳐 놓을 대규모 진법을 만들려면 그만한 재료와 전문 지식을 가진 진법가가 필요했다.
“제갈세가…….”
진법으로 유명한 가문이 하나 있긴 했다.
오대세가의 일원이면서 진법이라면 으뜸으로 쳐주는 가문.
제갈세가.
하지만, 너무 멀다.
“어, 잠깐만…….”
제갈세가를 떠올리기 무섭게 또 한 명이 생각났다.
“걔를 잊고 있었네.”
진법가.
뛰어난 진법가를 하나 알고 있긴 했다.
다소 괴짜스럽긴 했지만.
충분히 도움이 될 거란 말이지.
생각을 정리함과 동시에 형에게 달려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빨리 움직일 생각이었다.
“나 내일 잠시 나갔다 와야겠는데.”
“어딜 가는데?”
형이 술을 한잔 들이키다 말고 물었다.
“내 예전 동료인데, 진법가거든.”
단순히 진법가란 설명에 눈치 빠른 형답게 전후 사정을 알아차렸다.
“좋구나. 데려오거라.”
“고마워.”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이제 악안에서 골치 아픈 일은 대충 해결됐다.
물론 아직 협상을 하지 못한 저 문주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건 시간 싸움이니만큼 잠시 자리를 비워도 무방하리라 생각했다.
“궁설아.”
난 한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북궁설을 불렀다.
그녀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설이에요, 설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 궁설이.”
북궁설.
북궁씨에 이름 설이 맞다.
하지만 왠지 궁설이 더 어감이 좋았다.
“내일 나랑 어디 좀 가야겠다.”
“어디요?”
북궁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안 그래도 그녀가 요새 좀이 쑤셔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오죽했으면 흑련주에게 검을 들고 덤벼들었을까.
“그렇게 먼 곳은 아닌데, 만날 사람이 있거든.”
“전 좋아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북궁설은 곧장 승낙했다.
마치 사탕 주면 쫄래쫄래 따라올 순진한 아이 같아 퍽 그 모습이 웃겼다.
“내일 눈 뜨자마자 출발할 거다. 늦으면 얄짤없어.”
내 말에 북궁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름 평화로운 하루가 완전히 저물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난 눈을 뜨기 무섭게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항상 칙칙한 흑색 무복만 입는다고 서희가 온통 뭐라 하는 통에 간만에 백의 좀 갖춰 입었다.
“영…….”
동경에 비춘 내 모습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서희가 좋다는데.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북궁설은 아침부터 채비를 갖추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헌데, 그 복장이 조금 이상했다.
“너 쪄 죽게?”
“…….”
북궁설이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한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복장을 살폈다.
무슨 궁에서나 입는 솜을 꽉꽉 채운 궁장 같은 복식에, 얼씨구…… 목에는 털깃까지 달려 있다.
지금이 초가을인지라 조금 쌀쌀은 할지언정 춥다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본인을 뜨겁게 삶아 죽여 버리려는 건가?”
“…….”
내 농담에 북궁설이 날카로운 눈으로 날 째려봤다.
“너 그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쳐다봐. 난 그런 거 딱 질색이니까 가서 갈아입어.”
난 얼른 북궁설의 어깨를 밀었다.
이내 순식간에 북궁설이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온통 검정 일색의 무복이었다.
“와, 바둑돌이다.”
나랑 같이 서 있으니, 꼭 바둑판 위의 바둑돌 같다.
“뭘 입죠?”
북궁설이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후.”
어쩔 수 없었다.
여벌의 옷이 죄다 흑색이라는 말에 난 그냥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걸어가시나요?”
북궁설의 물음에 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뭐가 이리 궁금한 것도 많은지.
귀찮을 지경이다.
“복건성, 무이산.”
그래도 착실하게 목적지를 말해 주었다.
“거기가 어딘데요?”
“…….”
참, 할 말이 없다.
아니, 알지도 못하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
“닥치고 따라올래? 아니면 걍 들어가던가.”
“네.”
조용히 눈을 부라려 주자, 그제야 좀 조용해졌다.
북궁설은 호기심이 참 많았다.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경치를 구경하기에 바빴다.
“너 북해 벗어나서 한 달 넘게 중원을 표류했다면서?”
“네.”
“근데 뭐가 그렇게 좋다고 보는 거야?”
“신기해서요. 이런 풀들, 나무들…… 꽃들도. 북해에는 많이 없거든요. 근데 여긴 엄청 많잖아요.”
그 말에 내심 미안해졌다.
세가에 감금 아닌 감금을 한 것 같아서.
“앞으로는 자주 놀러 다녀. 서희에게 따로 얘기해 둘 테니까.”
“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복궁설은 열심히 나를 쫓았다.
내 걸음이 꽤 빠를 텐데도 북궁설은 힘 한번 들이지 않고 용케도 훅훅 나를 따랐다.
그렇게 우리 둘은 금방 악안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