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79
천하제일 시한부 (79)
짝!
“어이쿠.”
나도 모르게 흑련주의 주둥이를 찰싹 때려 버렸다.
“어디서 오글거리게 그따위 표정과 대사를 읊어?”
“너무한 거 아냐? 그렇다고 입을 때려?”
“반말?”
“요?”
뭐지?
어째 여기에만 오면 애들이 점점 뺀질뺀질해지는 것 같다.
“아무튼 죄악인지 뭔지 모르겠고 너네 할 일이나 잘하라고.”
“알았다고요.”
흑련주가 입을 삐죽거렸다.
저놈의 주댕이 한 대 더 치고 싶었지만, 참는다.
난 서둘러 후원에 있는 임시 별채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문주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또 왔소?”
소호문주가 날 알아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 형산파가 멸문당했다.”
“…….”
내 말에 문주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바로 지근거리에 있는 대문파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그게 우리랑 뭔 상관인가?”
소호문주의 고집은 여전했다.
마치 나랑 말도 섞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기까지 했다.
난 곁에 있는 구승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구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보아하니 소호문주는 제법 무사들을 잘 다독인 것 같더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해산시킨 무사들 중, 소호문의 무사들만이 해산하지 않고 소호문에 집결해 있었다.
그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자신의 문주가 잡혀 있다고 주변 문파를 끌어 다니려 하는 모양이었지만.
초영의 정보 공작으로 중도에 모조리 파훼됐다.
“난 당신들을 제법 존중하고 있어. 지금도 그렇고. 그러니까 이렇게 손도 안 대고 있지.”
“어차피 우리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다. 문주로서 이미 모든 체면을 잃었기에.”
소호문주의 말에 문주들이 저마다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의기소침해진 것이다.
‘와 이따위 정신머리로 어떻게 문주질을 해 처먹은거지?’
물론 내 기준에서는 진짜 병신처럼 보였다.
굳이 이들을 설득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초영의 당부가 생각났다.
‘최대한 정보를 통제하려면 문주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피 흘리는 일 없이 문주들을 풀어 주고 그들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후우, 그 말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싹 다 쌈 싸 먹어 버렸을 것이다.
“대체 우릴 왜 계속 찾아오는 거요? 어차피 주씨세가가 우리가 가졌던 이권 모두 흡수했다고 들었는데.”
“그건 또 어떻게 들었대?”
아, 구승이 있었지 참.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무릎을 굽혔다.
“잘 생각해 봐. 지금 이 무림의 평화가 계속 유지될 것 같아?”
“…….”
“난 전혀 아니거든. 형산파 같은 대문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그럼 같은 정파 계열의 대문파들이 가만히 있을까?”
내 말에 소호문주를 제외한 다른 문주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그들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야. 악안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 과거 주씨세가가 누렸던 영광? 그딴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말뿐인 영광이다.
“충성하지 않아도 돼. 그냥 우리끼리 숨죽여 살자고. 저런 전장에 끼어들지 않고. 우.리.끼.리.”
내 거듭된 말, 아니 부탁에 문주들의 표정이 돌변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모양이다.
진짜 이 정도까지 저자세로 나와 줬는데, 못 이기는 척 수긍하면 어디가 덧나나?
짜증은 났지만 일단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무사들을 다 해산시켰다 들었소. 그렇게 우리가 문파로 돌아가 봐야 뭘 할 수 있겠소?”
“다 해산한 건 아니야. 남은 수도 꽤 되거든. 어차피 그런 오합지졸들은 거두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바라는 것은 악안에서의 확실한 영향력이었다.
실전 경험이 다분한 진짜배기 무사들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악안에 있는 문파들은 실전 경험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부족함 없이 호의호식하는 형국.
그런 것은 지금 내가 가려는 방향과는 하등 맞질 않았다.
“대체 뭘 원하는 거요? 지금 당신이 꾸고 있는 그 꿈이…….”
“난.”
난 단호하게 말했다.
“무림맹, 정천맹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단단한 철옹성을 구축하는 거다.”
그렇게 내 동생 서희를 보호할 거다.
@ @ @
밤이 되었다.
앞마당에는 불이 밝혀졌고, 음식을 가득 채운 상들이 들려 나왔다.
때아닌 잔칫상이었다.
사실 이건 간만에 무사들에게 휴식을 취해 주고자, 내린 선택이었다.
“으하하.”
웃고 떠드는 아지와 무사들을 보며 난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비.”
서희가 내 손목을 꼭 붙잡았다.
“고마워.”
“…….”
난 말없이 서희를 내려다보았다.
청초하니 맑은 눈동자에, 제법 도톰해진 붉은 입술.
큰 눈과 더불어 균형 있는 얼굴선까지,
“언제 내 동생이 이렇게 컸지?”
“뭐야아?”
서희가 징그럽다는 듯 나를 째려봤다.
“좋아서 그렇지, 좋아서.”
난 서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작고 귀엽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컸다니.
참, 세월 한번 빠르다.
“돌아와서도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네.”
“괜찮아. 다 가문 때문에 하는 일이잖아.”
“그놈의 가문이 뭐라고 참. 그치?”
내 말에 서희가 배시시 웃었다.
아직 웃는 표정도 예전 그 순수했던 모습이 많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청운 저놈이랑은 잘되가?”
내 물음에 서희의 양 볼이 빨개졌다.
“자, 잘되가긴 뭐가……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게 뭔데.”
난 킥킥대며 서희의 반응을 즐겼다.
“보기에 좋은 놈 같애. 성실한 것도 같고, 생각도 제법 많아 보이고.”
“…….”
서희가 가만히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흑호방 놈이라고 해서 안 좋게만 봤거든. 근데 다르더라고. 내가 그동안 본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그냥 된 놈이라고 생각해.”
“안 그래도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어.”
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정도 많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내 옆에 와 있더라구.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봤거든?”
서희가 저 멀리 움직이고 있는 청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그랬더라구. 내가 객잔에서 일할 때 항상 찾아와서 가만히 날 지켜보고 가고 그랬어.”
“어이구, 그걸 알고 있었어?”
난 흐뭇하게 웃으며 서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운을 연상하는 동생의 모습이 퍽 귀엽게 보였다.
“사연 많은 놈이야. 어쨌든 난 저 녀석 정도면 내 동생이랑 사귀어도 괜찮다는 생각.”
“사, 사, 사귀긴 뭘 사, 사귄다는 거야. 허,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서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렇게 덥지도 않은 날씨인데 열이 나는지 손부채질까지 해 가며.
“너 찾는다. 가 봐.”
멀리서 청운이 연신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쪽의 서희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달려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난 냉큼 서희를 떠밀었다.
내게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청운은 서희를 데리고 자리를 잡았다.
“좋네요, 이런 것도.”
뒤에서 초영이 말을 걸었다.
“넌 왜 안 노냐? 바빠?”
“바쁜 건 잠시 보류입니다. 오늘은 잠시 쉬려고요.”
초영이 내 곁에 앉았다.
딱히 할 말은 없었기에, 난 가만히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한참 뒤에, 그녀가 머뭇거리다 말고 이내 입을 열었다.
“단주님.”
“왜.”
그렇게 말을 걸어 놓고 초영은 또 한참을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생각을 가다듬고 말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지요.”
“뭘.”
“왜 그렇게 급하게 움직이시냐고. 무슨 급한 일이 있냐고.”
“그랬지.”
확실히 그랬다.
초영은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날 보며 제동을 걸어왔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사실을 초영이 알 리는 만무했지만.
“그때 단주께서 그러셨죠. 저 또한 비밀을 풀 생각이 없는데, 왜 내가 말해 줘야 하냐고.”
“…….”
그랬나?
그랬던 것도 같고, 초영이랑 일 얘기 한 것밖에는 기억나질 않았다.
대답이 없는 날 보며 피식 웃은 초영이 마저 입을 열었다.
“전 개방도입니다. 그것도 후개지요. 하지만 개방의 후개 후보자는 많습니다. 아시지요?”
알다마다.
개방은 핏줄로 대를 잇는 가문이나, 세가가 아니다.
더군다나 제자를 받아 키우는 문파도 아니다.
말 그대로 거지들의 소굴이다.
물론 거지들이라고 해서 무시할 건 아니었다.
십만이 넘는 개방도를 움직이고 또 그만한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위신을 갖춰야 했으니까.
“언제든 이 자리를 놓치는 순간 전 영영 다시 무림에 설 수 없다는 그런 강박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식.
그 말에 난 웃고 말았다.
“아, 미안. 딴생각은 아니고.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싶다.”
그래, 후개 말고도 다른 할 것들은 얼마든지 많다.
후개라고 해서 부귀영화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명예직이라면 명예직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초영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지금 그 말을 꺼내는 저의가 뭔데.”
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불편한 자리가 막 만들어지는 과정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내려놓고 얘기를 하고 싶어서요.”
초영이 날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간 단주님의 행적을 일부분 축소해서 개방에 넘겼었습니다.”
“알아.”
알고 있다.
내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그 대신 세가의 총관직을 수행해 달라 내가 부탁했으니까.
“하지만 예전부터 계속된 의문, 그리고 지금까지 쭉 그냥 계속 머리가 복잡해요.”
“그니까, 왜.”
“저희 태상방주께서 아무래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 노걸개, 그 영감탱이가 또 뭔 수작질을 꾸미고 있어?”
내 말에 초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또라면…… 태상방주님은 예전에도 뭔가 수상한 짓을 하신 적이 있단 말씀인가요?”
“흠, 있지.”
딱히 비밀도 아니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십 년 전쯤이었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때쯤인 것 같다.
신기검단이 무림에 확실히 두각을 나타냈을 무렵이니까.
“당시에 방주 놈이 하나 있었어, 개방에.”
“알고 있어요. 태상방주님의 진전을 모두 이었다고…….”
“맞아. 무지 강했거든, 그놈.”
난 곰곰이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키도 나보다 머리통 하나만큼은 더 큰 데다, 체구는 곰 같은 것이 몸은 또 호랑이처럼 날렵하고 재빨랐다.
마치 지금의 아지를 보는 듯한 느낌?
물론 아지의 체격이 그 방주 놈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방주가 죽었어.”
“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초영은 굳이 왜 그 일을 꺼내는가 싶은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방주 놈이 죽었는데, 웃긴 게 뭔지 알아?”
“…….”
“노걸개, 그 영감탱이가 흉수로 지목된 거지.”
이건 초영조차 몰랐던 사실일 거다.
내 생각처럼 초영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그녀가 눈으로 그게 진짜냐며 묻는 듯했다.
“모든 행적과 물증까지 나왔는데, 정작 노걸개는 인정을 하지 않아. 당시 노걸개 영감탱이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거든?”
내 말에 초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잡을 수 없었겠네요.”
“그렇지. 잡을 수 없었지. 근데 난 아니거든.”
난 피식 웃었다.
내 말에 초영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맞아. 난 노걸개 영감탱이한테 말했어. 그냥 절대 시인하지 말라고.”
“…….”
“시인하는 순간 무림맹 쪽이 노걸개를 잡아갈 명분이 생기거든. 하지만…… 노걸개가 발뺌한다면 유야무야 묻힐 사건이었어.”
“아니, 그럼 방주님은…….”
“그래, 그 개방의 방주.”
난 초영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내가 죽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