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29
29
블랙홀과 닮은 구멍은 아스모데우스의 배트와 마찬가지로 고급 아이템이어서 그런지, 상태 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벤트 상품으로 주어진 주머니는 말 그대로 지옥의 물건을 담을 수 있는 요술 주머니인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손길로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단검 하나를 검은 구멍에 집어넣어 봤다.
단검은 검은 구멍에 닿자마자 검은 물속으로 녹아 없어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단검을 꺼낼 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검은 구멍에서 스윽, 하고 검은 구멍에서 튀어나온다.
이 단검은 지옥 상점에서 구입한 것이지만, 딱히 특별한 것이 있는 단검은 아니었다.
마법이 걸려 있다곤 해도 강도가 튼튼해지고, 조금 더 날카롭게 만들 뿐인 마법인 데다 소재가 특별할 것도 없다.
즉, 지옥 주머니에는 지옥 상점에서 산 물건이라면 평범한 물건이라 해도 수납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제는 지옥 상점에서 구입한 아이템이라면 부피나 무게에 구애받지 않고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건 내게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드디어…….”
나도 모르게 열린 입에서 나온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감격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드디어 아스모데우스의 배트를 그 누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 둘 수 있게 됐다.
나는 구석에 처박아 놓은 강철 상자를 꺼내 왔다.
자물쇠는 어느새 50개가 넘어간 지 오래였다.
이렇게 자물쇠를 달아 놓고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밖에 나갈 때에도 항상 그림자 마수를 파수꾼으로 세워 놓고 다니곤 했었는데, 이제 드디어 그런 불안의 나날에 안녕을 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옥 주머니 만만세다.
이벤트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보상까지 얻었고, 재정비를 마친 던전들도 점차 궤도에 올라서 다시 꾸준하게 네거티브 포인트를 벌고 있는 상황.
갑자기 운석이라도 떨어지지 않은 한 내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하는 것들은 웬만하면 없지 않을까?
새로운 삶은 꽤나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운석이라도 떨어지지 않으면, 이라는 단서는 결국 운석이 떨어지면 아무 쓸모도 없는 유리 조각 같은 것이었다.
내 순탄한 삶에 날아든 돌은 정말 내가 생각도 못 한 곳에서 던져졌다.
야만족을 철벽과 같이 막고 있던 아가일 변경백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다.
야만족이 통합 전쟁을 벌였네, 어쩌네, 하는 소리는 들었지만, 철의 장벽이라 불리던 아가일 방벽이 하루아침에 함락되리라 생각한 자는 나를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코앞에 닥쳐오다 못해 코뼈를 부숴 버렸다.
아가일 방벽이 점령당하자 자연히 그 방벽 뒤에 숨어 있던 다른 영주들의 영지도 공격당했고, 잔혹한 야만족에게 유린당하기 시작한 왕국민들은 미개한 족속이라며 무시하던 야만족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카데미는 휴교에 들어가고, 학생들도 각자의 영지로 흩어졌다.
학생들 대부분이 귀족가의 자식들인 만큼 왕국 단위의 전쟁이 일어나면 영지군을 이끌고 참전을 하거나 영주 대리로서 영지를 지켜야 하는 입장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서둘러 영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에 전쟁이라는 이름의 운석이 떨어진 것이다.
* * *
오랜만에 마주하는 에슬란테 남작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전혀 반갑지 않았다.
물론, 그와 함께 있는 레온 또한 반갑지 않기는 마찬가지.
“아버님! 참전하는 건 저 하나로 충분합니다. 저 덜떨어진 놈은 아카데미에서도 성적이 바닥을 기고 있다는 것 모르십니까?”
레온은 자신뿐만 아니라 나까지 참전을 한다는 사실을 듣더니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런데 덜떨어진 놈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지? 설마 나는 아니겠지.
내가 보기에는 전쟁에 참전하고 싶어서 안달을 내다 못해 발작을 하는 저놈이 모자란 놈 같아 보이는데 말이야.
“놀러만 다니느라 학업은 뒷전인 놈이 전쟁에 참전한다고 뭐가 되겠습니까. 애꿎은 병력만 낭비할 뿐입니다.”
하지만 레온의 열변에도 남작은 그저 여유로운 태도로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남작 입장에서는 영지 방어를 핑계로 자신이 참전하지 않는 이상, 자식들이라도 두 명 다 참전시켜야 명분이 선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루크에게도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니?”
남작의 입에서 기회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레온의 얼굴이 구겨진 휴지 조각처럼 변했다.
하지만 듣고만 있는 내 입장에서는, 나에 대한 평가가 참 박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뭐, 사교도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비밀에 부쳐진 만큼, 이들에게 나는 마법 상급반에 들어간 이후부터 만년 꼴찌를 면치 못하는 애물단지에 가까울 테니 어쩔 수 없지만.
“레온, 네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남작이 일어나 레온의 어깨를 두드리는 장면을 보던 나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결론은 나온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출발하려면 쉬어 둬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이런 시답잖은 촌극을 더 보고 있다가는 나까지 같이 수준이 떨어질 것 같다.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레온이 도끼눈을 뜨고 쏘아봤지만,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은 저런 유치한 질투에 응해 줄 여유 따위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예측 불허의 상황이 내게 어떻게 다가올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용량이 부족할 지경이다.
에슬란테 영지에서 보낼 수 있는 병력은 많아 봐야 300명 남짓.
그것도 징집병의 비율이 2/3가 넘어가니, 직접 보지 않아도 오합지졸일 것은 뻔했다.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에다가 의지할 든든한 아군마저 없는 상황이니, 평소보다도 더 긴장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 * *
편성된 영지군을 이끌고 전선이 형성된 게펜성 인근에 주둔한 부대에 집결하기까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말을 타고 달려왔다면야 훨씬 금방 도착할 수 있었겠지만, 보병의 이동 속도에 맞춰서 이동해야 하는 만큼 이동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대부분이 징집병인 병력 구성은 이동뿐만 아니라, 탈영까지도 신경 써 가며 이동을 해야 해서 더 느려진 면이 있었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지친 상태가 돼 버렸다.
하지만 푹 쉬고 싶은 바람과는 달리, 도착해서 숙영 준비를 마치자마자 회의가 소집됐다.
부대장 막사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곰과 같은 덩치를 가진 사내였다.
[이름: 차드 스틸호크] [나이: 43] [레벨: 39] [힘: 210] [체력: 190] [민첩: 120] [마력: 58] [특성: 기사도] [스킬: 검술 Lv.6, 격투술 Lv.6, 강체 Lv.6, 마력 운용 Lv.3……].부대장인 스틸호크 자작이었다.
로멘 숲에서 마주쳤던 여기사, 리엔의 부친이다.
다른 것보다 부녀가 기사도라는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성정을 가졌을지 대충 감이 왔다.
물론, 외모는 놀라울 정도로 전혀 닮지 않았지만 말이다.
자작이 가장 눈에 띄었을 뿐, 총 여섯 군데의 영지가 모인 만큼 각 영지에서 온 귀족들만 모아 놔도 인원이 꽤 돼서 넓은 부대장 막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모인 인물들 중에는 전과 달리 삭막한 표정을 하고 있는 리엔도 눈에 띄었다.
[이름: 리엔 스틸호크] [나이: 16] [레벨: 26] [힘: 132] [체력: 128] [민첩: 145] [마력: 49] [특성: 기사도] [스킬: 검술 Lv.6, 격투술 Lv.5, 강체 Lv.4, 마력 운용 Lv.3…….]벌써 마주친 지 몇 개월이 지난 만큼, 그사이에 리엔도 성장해 있었다.
자작과 비교해도 힘과 체력에서 큰 차이가 나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엇비슷한 수준. 나이에 빗대어 본다면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리엔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서로 짧게 묵례를 했다.
이후로 몇 명의 인물이 더 들어오고, 인원이 다 모이자 회의가 시작됐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스틸호크 자작은 주변 지형이 그려진 지도 앞에 섰다.
“다들 알다시피 공성전은 조급한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대등한 입장이라면 당연히 공격하는 쪽이 불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이란 걸 쌓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공격하는 쪽인 데다가 급하기까지 한 상황이지.”
회의 시작부터 실내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쓸데없이 넓어진 전선을 동시에 밀어내야 하는 상황인 만큼, 이쪽에서 시간이 끌리면 그만큼 전쟁이 길어진다.”
자작의 설명을 듣던 귀족들 중에서 한 명이 손을 들어 올리고, 발언권을 얻었다.
“야만족 놈들이 더 이상 전진하지만 못하게 하면, 전선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쪽에서 후방을 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왕국군의 주력은 최단기간 내에 영토 수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력이 우리를 돕는 게 아니라, 주력의 속도에 맞춰서 그들의 후방에 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우리 부대의 목표인데, 오히려 지원을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결국, 게펜성 앞을 철통같이 지키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늦게 합류한 자들은 모르겠지만, 놈들은 우리가 도착한 날 밤, 성벽 위에서 인육 파티를 벌였다.”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자작의 목소리가 잠겨 들어가며,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지금도 저 성벽 너머에서 라메리안 왕국의 백성들이 야만종 놈들에게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아직 합류할 병력이 남아 있지만,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다.”
자작의 말을 들어보니, 리엔의 삭막한 표정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리엔의 성격을 생각할 때, 그런 장면을 목격한 상태로 합류할 병력들을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그녀에겐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리엔은 지금도 자신의 입술에서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꽉 깨물고 있었다.
그렇게 게펜성을 빠르게 탈환해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사라지자, 회의는 다시 공성전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됐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게펜성은 성채가 낮고, 서쪽 성문은 상당히 부실하다는 점이다. 서쪽에 대한 방비가 부족한 것은 앞으로도 이어질 테니 우리에겐 희소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음, 듣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서쪽은 왕국의 수도 방향이었고, 왕실이 있는 곳을 향해 철저한 방벽을 쌓는 일은 자칫 반역 모의로 보일 수도 있을 테니.
변경백의 영향이 미치는 곳인 만큼, 왕실에서도 더 주시하고 있었을 테고.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회의는 계속됐으나, 딱히 기상천외한 작전이 수립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규격 외의 전력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정석적인 공성전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회의에서 가장 큰 시간을 차지한 것은 각 영지군의 상태를 보고하고, 진형의 위치를 정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것도 함께 참석한 레온의 역할이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고, 작전 시작 시간은 내일 새벽으로 결정됐다.
회의가 끝나자 모두 바쁘게 흩어진다.
벌써 해가 지기 직전인 시간.
각자 끌고 온 병력들에게 전달 사항을 전하고, 전투 준비를 마치려면 남은 시간은 촉박하기 그지없는 수준이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게는 자발적인 노예, 레온이 있었다.
역시나 레온은 혹여 내가 뭐라도 참견해서 조금의 공이라도 차지할까, 견제까지 해 가면서 병사들을 솔선해서 닦달하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나를 허수아비 취급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 레온 덕에 잡일에서 벗어났으니, 나는 나 나름대로 전투를 준비해야겠다.
나는 천막에 들어가서 상태 창을 띄웠다.
볼 때마다 정말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능력치다.
던전에서 꾸준히 모이고 있는 네거티브 포인트로 인해 능력치는 꾸준히 상승하는 중이지만, 특성, 스킬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현재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스킬의 종류도 마법에 관련된 것은 마력 감응과 마력 운용뿐.
비올카의 달갑지 않은 친절로 습득한 스킬뿐이다.
31레벨로 접어들어서 4단계 상점을 이용 가능하게 되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스킬의 비정상적인 가격을 생각할 때 그쪽은 뒤로 미루더라도, 장비나 부수적인 것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다음으로는 현재 보유한 네거티브 포인트를 점검했다.
총 304,500포인트.
나는 그 숫자를 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 보면 이번 전쟁은 나에게는 전에 없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전쟁터만큼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이 범람하는 곳은 드무니까.
하지만 그만큼 평소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들이 즐비해 있다.
던전 시스템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데다, 평소 사용하던 대량의 몬스터를 이용한 전략들도 사용이 제한된다.
그림자 마수나 몇몇 몬스터를 소환하는 정도는 마법의 범주로 이해를 구할 수 있겠지만, 딱 그 정도가 한계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럼 이 상황에서 제한된 패를 이용해서 어떻게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 먹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정보도 부족하고,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나는 장비를 점검하면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