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55)
15350년 전
모든 것이 칠흑처럼 검은 ‘어둠의 성’. 신화시대 이래 최초로 세계를 정복한 조직 암흑성(暗黑城)의 본거지이자, 강력한 마력으로 보호되고 있기에 수천의 대군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요새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단 10명의 침입자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쿠궁. 쿠구궁!
[흥. 결국 이렇게 끝나게 된 건가]성의 중심부에 있는 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그곳에서 인간의 뼈와 살가죽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어둠을 바라보던 미녀는 싸늘한 조소를 흘렸다.
흑단같이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그녀의 늘씬한 육신은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무엇보다도 도발적인 눈매 사이에서 깊이 가라앉아 있는 먹빛 눈동자는 너무나 위험하고 요사스럽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빨려들 수밖에 없는 기묘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100일 만에 세계를 정복한 암흑성의 총사이자 1,000년간 홀로 살아남아 온 서열 1위의 요마.
어둠의 산의 주인, 쿠르타.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홀 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인간이여. 이 실패를 대체 어떻게 책임지겠느냐?]비웃는 것과도 같고, 자조하는 것과도 같은 그녀의 말에,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허공을 보는 것처럼 더없이 공허한 바닥 모를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길 잠시, 그녀는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은 표지에 핏빛 문자가 새겨진, 한없이 불길한 기운을 풍겨 내고 있는 책 《악의 서》를 집어 들고 쓰레기처럼 내던져 버렸다.
타악!
[보아라. 우리가 이뤄 낸 실패의 증거를]“…….”
마치 시체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 앞에 떨어져 내린 《악의 서》를 보며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그에게 쿠르타는 싸늘한 독설을 토해 냈다.
[저들이 중간에 주술을 빼돌렸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하지 마라. 매개로 사용할 주술 따위는 이미 차고도 넘치도록 모아 왔다. 신의 저주 때문이라고는 하지 마라. 나의 힘은 지상을 도망친 신들에게 짓눌릴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가 《악의 서》를 완성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끝을 모를 증오를, 바닥 없는 절망을, 얼어붙은 조소를 품고 있기에 지옥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들리는, 더없이 음산하고도 음울한 목소리로 그녀는 선언하듯이 말을 끝맺었다.
[우리의 악의(惡意)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악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홀을 찾아든 것은 정적이었다.
찰나와도 같고 영원과도 같은 그 시간 끝에 그는 한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세상을 조롱하고, 신을 조롱하고, 스스로를 조롱하는 조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쿠르타여,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손에 넣기 위해 천 년을 기다려 온 요마여.”
그 음성은 그저 무뚝뚝하여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세월에 풍화된 바위가 그러하듯, 혹은 바람에 흩어진 구름이 그러하듯.
너무나 크나큰 절망과 좌절에 마모되어 이제는 절망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채 인간은 말했다.
“내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줄 수 있겠나?”
[…기회를 달라고?]어둠의 성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냉소를 잃지 않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아니, 그것은 굳어졌다기보다는 얼어붙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더없이 싸늘한 한기가, 그리고 스산한 살기가 그녀의 불쾌감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처참한 실패에도 또 한 번의 기회를 구걸하느냐?]어지간한 인간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무시무시한 기세가 담긴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며 나지막이 말을 이을 뿐이었다.
“실패했기에 또 한 번의 기회를 바라는 것이다.”
쿠르타의 냉소를 자르듯 단호하게 말한 그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더 깊고도 음울한 기세로 말을 이어 갔다.
“내게 실패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다면 영혼이라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 하지만 고작 그따위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나?”
적반하장이라고 해야 할까.
실패했는데도 용서를 구하는 대신 오히려 거세게 되몰아치는 인간의 천 년을 세월을 살아온 자신보다도 더욱 늙어만 보이는 눈을 그녀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화를 내듯, 증오하듯, 혹은 비웃듯 정의하기 힘든 얼굴로 인간을 보는 요마와 다만 한없이 무표정하면서도 더없이 음울한 눈으로 요마를 보는 인간.
그들 사이에서 이어지던 기나긴 정적을 깨트린 것은, 결국 하나의 웃음소리였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 것일까.
사납고도 음산한 웃음소리를 터트리고 쿠르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인간아, 교활하고도 사악한 인간아. 그 끝에 실패와 파멸이 있음을 알면서도 절대 멈추지 않고, 더욱 깊은 절망을 향해 스스로 달려드는 어리석고도 나약한 인간아]마치 속삭이듯, 혹은 비웃듯이 속삭이던 쿠르타는,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그러니, 좋다]그 어리석음을 조롱하면서도 결국 눈앞의 인간을 잡아먹고 실패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내는 대신 또 한 번의 기회를 줄 것을 선택한 요마는 나지막이 말을 이어 갔다.
[너에게 보다 깊은 악의를 모아 올 시간을, 그리하여 다시 한번 이 세상의 모든 악에 도달할 기회를 주마. 하여 네가 《악의 서》를 완성하여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리겠다]그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그녀가 어떤 위험을 각오하고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그는 감사를 표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만 바닥에 떨어진 《악의 서》를 집어 들며 조용히 몸을 돌렸을 뿐이다.
[반드시 내게 이 세상의 모든 악을 갖다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느냐?]문을 나서기 직전 들려온 나지막한 음성에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다만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을 뿐이다.
“악당의 약속에 가치가 있나?”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나의 영혼을 걸고 약속해 주마.”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떠난 그를 지켜보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며 자조하듯 나지막한 혼잣말을 흘렸다.
[…흥. 거짓말쟁이 인간 같으니라고]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했을 약속을 비웃으며 그녀는 서서히 힘을 갈무리했다.
이제 곧 홀의 문을 열고 나타날 10명의 배신자를 상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