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58)
156마왕의 회상
눈을 뜨자마자 시야를 채운 칙칙한 검은색.
그것이 새까만 천장이며 내가 누워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른한 몸을 억지로 일으킨 뒤, 고개를 내저어서 몽롱한 정신을 바로잡고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옥…인가?
벽에 붙어 있는 침대, 쇠창살로 단단히 막혀 있는 창문, 한눈에 봐도 두텁게 보이는 철문, 벽 한가운데 박혀서 길게 늘어진 사슬, 그 끝에 단단히 연결되어 내 손목에 차 있는 수갑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확인해 본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츄리오넬에서 납치된 이후, 하루 대부분을 약물에 취해 잠들어 있었기에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어떤 길을 통해 왔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꽤 먼 거리를 이동해 왔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탈출은 무리겠네.
단 한 점도 일어나지 않는 마력을 확인하고 나는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수갑이 ‘봉마의 사슬’과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쯤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력이 봉인된 이상, 나 혼자의 힘으로 이곳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몽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왜 나를 이런 데까지 데려온 거지?
탈출을 포기한 나는 홀로 상념에 잠겨 들었다.
단순한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 자리에서 내 목을 베면 벴지 이런 곳까지 납치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적월의 기사는 나를 노린 이유가 복수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고 이들은 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 걸까?
물론 내게는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있으며 그것은 사용하기에 따라 큰 힘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츄리오넬을 불태우면서까지 나 하나를 납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덜컹. 끼이익.
자그마한 마찰음을 듣고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철문 앞에 서 있는 복면인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 마른 체구만 봐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복면인이, 세레나를 개처럼 다뤘던 그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것을!
이 사슬만 아니었다면…!
나는 이를 빠드득 갈며 복면인을 노려보았다.
차라리 적월의 기사를 용납할 수는 있을지언정, 이놈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속의 생각일 뿐, 이중 삼중의 주박에 묶여 마법을 쓰기는커녕 뺨을 때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놈을 매섭게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받으면서도 마른 체구의 복면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옆으로 다가와 하나의 열쇠를 꺼내 들었을 뿐이다.
철컹.
…무슨 속셈이지?
벽에 고정돼 있던 사슬의 자물쇠를 풀어낸 뒤, 사슬의 한쪽 끝을 쥔 채 따라오라는 듯 손목을 까딱거리는 복면인. 놈을 노려보던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날 데려가려는 곳이 어딘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곳이 고문실이든, 아니면 최후의 처형장이든, 여기서 겁먹은 모습 따위는 보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막상 복면인이 안내한 장소를 본 순간, 나는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건?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차 있는 드넓은 공간, 바닥을 매끄럽게 뒤덮고 있는 새하얀 대리석, 무엇보다 온갖 조각으로 치장되어있는 수십 명이 들어가도 될 커다란 욕조가 나를 기막히게 하고 있었다.
탁.
이게 무슨 의도인지 물어볼 틈도 없이 복면인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 버렸다. 덕분에 홀로 욕실에 남게 된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문과 욕조를 돌아보았다.
죽기 전에 목이나 잘 씻어 놓으라는 건가?
잠시 망설인 끝에 나는 결국 옷을 벗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서 찜찜하기도 했지만, 놈들의 의도에 대해서도 짐작 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스르륵.
본래의 깨끗함을 잃어버린 옷을 벗어 놓고 거미 문양이 새겨진 욕조에서 물을 퍼내 그것을 머리 위에서부터 끼얹는다.
촤아악!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 물방울이 머리카락 끝에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살결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렇게 더러워진 몸을 씻어낸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에 몸을 담근 나는 냉정하게 생각에 잠겨 들었다.
다짜고짜 나를 납치한 그들이, 인제 와서 내게 잘 보이려고 들 필요는 없을 터.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나를 단장해서 만나게 할 상대가 있을 경우, 그리고 탈의실에 준비된 드레스는, 그러한 나의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름다우면서도 불길한 느낌으로 가득한 검은색 드레스를 지그시 바라보던 끝에, 나는 그것을 걸쳐 입었다.
상대의 손에서 놀아나는 기분은 불쾌했다. 하지만 상대가 준 것이라고 해서 무장조차 갖추지 않고 전장에 나서는 자는 그 고고한 자존심을 지킨 채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치러야 할 것은, 비록 피와 비명은 없을지언정 분명한 전투였다.
스르륵.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는 탈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복면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어딘가의 요새나 성쯤 되는 것일까, 단순한 저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넓고도 긴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길 한참, 거미의 문양이 새겨진 문 앞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멈춘 복면인은 천천히 그 문을 밀었다.
끼이이이익.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마찰음과 함께 활짝 열린 문.
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일국의 왕성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수백 가지에 달하는 호화로운 요리가 준비돼 있는 기다란 식탁이었다.
그리고 그 식탁의 맞은편 끝에 ‘그자’는 홀로 앉아 있었다.
빛바랜 회색 머리카락으로 한쪽 눈을 가린 채, 한쪽 눈만을 드러낸 사내. 어떻게 보면 청년 같고, 어떻게 보면 중년인 같고 어떻게 보면 노인 같은 그자를 본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뭐지, 저 눈은?
마왕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봐 온 나였다. 하지만 그런 나로서도 숨을 잊어버릴 만큼 사내의 눈빛은 칙칙하게 가라앉아 바닥을 모를 정도로 암울하게만 느껴졌다.
잠시 뒤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드러나지 않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전투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채 대화 한 마디 나누기도 전인데 기세에서부터 밀려나서야 이미 반쯤 지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각. 또각.
기세에서 밀린 것을 회복하기 위해 나는 단호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사내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그러한 내 뒤에 복면인이 감시하듯 자리를 잡고 버티고 선 가운데, 사내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군. 마왕.”
나는 무심코 토할 뻔한 신음을 겨우 삼켜 냈다. 빙설관 레닌보다 냉혹하고, 황제보다 더욱 무거운 위압감을 담고 있으며 그 이상으로 무심한 사내의 음성이 묵직하게 어깨를 눌러 왔기 때문이다.
그 동요를 마음 깊이 감추며, 차갑게 입을 연다.
“반가운 사람을 이렇게 납치하는 게 당신의 방식인가?”
“무례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내 쌀쌀맞은 말에 사내는 가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기쁨이나 감정 따위는 한 점도 없이 그저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짓는, 마치 사막과 같이 메마른 미소는, 오히려 더욱 섬뜩하게 나를 압박해 왔다.
“늦게나마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카빈 K. 데일드라고 한다.”
카빈 K. 데일드?
나는 몇 차례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하지만 그런 이름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사내 또한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나지막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 그대에게는 ‘칠흑의 마수’의 주인이라는 호칭이 더 이해하기 쉽겠지.”
“……!”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무심코 그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향했다.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새까만 검집에 꽂힌 검.
저것이 대륙 27대 명검 중에서도 서열 3위, 신화시대에 악마가 벼린 마검, ‘칠흑의 마수’라고?
‘칠흑의 마수’은 막강한 힘을 주지만, 그 대가로 소유자를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마검.
그렇기에 신화시대 이래 천 년 동안 잠시라도 저 마검을 얻었던 검사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처참한 파멸을 맞이했다. 바로 그래서 ‘칠흑의 마수’의 주인이란 말은, 백 마디 말보다 분명하게 사내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었다.
칠흑의 검주, 마검자…!
검자라고 모두가 잘 알려진 아니다.
검자로 알려진 인물이 사실은 평범한 일류 검사였는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한 검사 한 명이 일당백의 업적을 세워서 검자라 불리기도 한다.
마법처럼 주문으로 능력을 입증할 수 없기에 업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검사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마검자는 신비한 존재였다. 현존하는 검자 중 가장 그 존재가 불분명한 자.
어떤 검술을 쓰는지, 어떤 검경을 깨달았는지,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 그 이름조차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신비인 단지 괴담처럼 전해지는 몇몇 업적을 통해 무엇보다 ‘칠흑의 마수’를 다루면서도, 파멸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검자라 불리게 된 실존조차 의심되는 환상의 검사, 그것이 마검자였으니까.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던 그가 단지 심심하다는 이유로 내 앞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을 리는 만무했다.
“마검자, 당신이 내게 무슨 볼일이지?”
“한 가지 제의하고 싶다.”
“제안할 내용은?”
나는 침착하게 마검자의 말을 받았다. 세레나를 상처 입혔던 자들의 제의 따위, 승낙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적어도 상대의 의도는 알아 두는 편이 좋았으니까.
“마왕이여. 나와 손을 잡지 않겠는가?”
“…손을 잡자고?”
“그렇다. 나는 그대를 위해 13전도사 중에서도 첫 번째 좌, ‘어둠의 전도사’의 자리를 준비해 두었다. 그대가 나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충분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은 더없이 담담하고 무뚝뚝했다. 그 말의 내용은 황제처럼 오만했음에도 마치 식후에 사탕 하나를 주겠다고 말하는 듯한 담담한 태도는 오만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자신 있게 제안한 마검자를 향해 나는 싸늘히 조소 지었다.
“고작 그 정도 조건으로 날 회유하겠다고?”
내게 세계 정복에 대한 욕심 따위는 없었다. 아니, 설령 그런 게 있었다 해도 세계의 반을 지배했던 군주로서, 그리고 72주문의 마왕으로서 고작 남의 하수인이 될 생각 따위는 전무했다.
하지만 내 대답에도 마검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거절당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침착하게 다른 조건을 제시할 뿐이었고, 그가 이번에 내세운 조건은 내 입가에서 조소를 싹 가시게 했다.
“그렇다면 로드 오브 킹덤의 재건과 더불어, 사라진 마족들을 부활시켜 주겠다면 어떤가?”
“……!”
뭐…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 말은 그만큼 기습적으로 급소를 찔러 들어와 나를 굳어지게 했다.
“마족을 위해 이 세계와도 싸우는 것을 택했던 그대라면 이 조건을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그렇지 않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가 믿을 것 같아?”
“아니. 내게 이것이 있는 이상, 그것은 절대 헛소리가 아니다.”
마검자가 한 권의 책을 식탁에 올려놓은 순간, 나는 일순 숨을 멈췄다.
칠흑색 표지에 기묘한 핏빛 문자가 새겨져 있는 한 권의 책.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의 서》…!”
‘암흑성’ 최후의 유산이자, 대륙 36대 기보 중에서도 서열 1위의 그 절세의 보물을 보고 굳어 버린 나를 앞두고, 마검자는 천천히 《악의 서》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갔다.
“‘암흑성’이 그 모든 저력을 모아 만들어 낸 《악의 서》는 그야말로 막강한 권능을 지니고 있다. 《악의 서》에 비하면 다른 기보들은 물론, 설령 칠대 신기나 구대 마병이라 할지라도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황제로부터 《악의 서》의 비밀을 들은 만큼,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한 권의 책 안에 담긴 것은 암흑성이 전 세계에서 모은 가장 강대한 주술.
그리고 그 주술이야말로, 신이나 악마와도 대적할 수 있었다는 용의 힘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암흑성’은 결국 《악의 서》를 완성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13사도의 배반을 막아 내지 못하고 무너졌고, 《악의 서》는 결국 갈가리 찢겨 사도들의 손에 들어갔다.”
암흑성이… 13사도의 배신으로 무너졌다고? 그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비사.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갔다.
사도들이 《악의 서》에 담긴 힘을 눈치챘다면 서로 공모하여 암흑성의 총사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필연이나 다름없었으니까.
“47년 전, 우연히 《악의 서》의 한 조각을 손에 넣게 된 나는 수십 년에 걸쳐 《악의 서》의 파편을 모아 왔다. 하여 《악의 서》를 복구해 냈지만, 암흑성의 총사와 마찬가지로 《악의 서》를 완성해 낼 수는 없었다. 《악의 서》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쇠?
그토록 강대하던 ‘암흑성’이 《악의 서》를 완성 못 했던 이유는, 그리고 《악의 서》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열쇠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런 나의 의문을 짐작한 듯, 마검자는 나지막이 설명을 이어 갔다.
“암흑성의 총사는 용의 힘이 담긴 주술로 《악의 서》를 완성하고자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악의 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신의 권능을 넘어설 수 있는 마의 힘, 그것도 아흔아홉 악마들에 버금가는 강대한 마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단순한 용의 힘을 넘어 신의 권능을 거스르고 악마의 힘마저 초월하려는 섬뜩한 의지를, 마검자가 고작 나 하나를 납치하기 위해 츄리오넬을 불태우는 무리수를 둔 이유를, 그리고 황제가 내게 《악의 서》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당신이 말한 게 이런 의미였어? 그래서 내게 《악의 서》를 탐내지 말라고 한 거야?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아흔아홉 악마가 봉인된 이 세상에 그토록 강대한 마력을 지닌 존재는 단둘. 나와 같은 마족이나 악마의 시종인 요마들뿐.
그러나 ‘하늘 섬의 떠돌이’는 위치를 모르고,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는 찾아갈 수 없으니 《악의 서》를 완성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 혼자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십중팔구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황제는 굳이 내게 경고한 것이다.
절대 《악의 서》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줄기 오한이 내 등을 스쳐 지나간 것은.
…이 세상에, 《악의 서》를 완성할 수 있는 존재가 오직 나뿐이라고?
그것은 본능적인 직감이며 근거 없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마검자의 말은 나의 의심을 확신으로 뒤바꿔 주었다.
“바로 그렇기에, 신들은 멸마의 신탁을 내렸지.”
멸마의 신탁.
12신전을 움직임으로써 ‘로드 오브 킹덤’을 대륙의 공적으로 몰고, 나를 제외한 모든 마족을 몰살당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 저주받은 신탁의 진실에 나는 그저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들은 이 세상의 법칙을 깨트릴 힘이 탄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암흑성의 총사에게 저주를 내림으로써 13사도에게 배반당하게 하고, 암흑성의 파멸 이후에도 《악의 서》의 열쇠가 될 가능성이 있는 마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멸해 왔다. 그것이 바로 ‘어둠의 산의 주인’이 퇴치된 이유이자, 마족이 멸망했던 이유인 것이다.”
……!!
머리가 아찔해진다. 뜨거운 분노에 머리가 새하얗게 달아오르며 눈앞이 깜깜하게 물든다. 피가 뜨겁게 들끓는 것에 반해 심장은 얼어붙은 듯 차갑게 멈추고, 꽉 깨물린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이 입 안을 비릿하게 적셔 들며 꽉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흔들린다.
내가, 우리가, 로드 오브 킹덤이 패배한 이유가, 그리고 우리 마족들이 몰살당해야 했던 이유가 고작 그런 것 때문이었다고?
그것은 어쩌면 정의일지도 모른다.
악의 서가 완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세상이 파멸될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한낱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생체 병기를 몰살시키는 것은, 옳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움켜쥔 주먹을 펼 수 없었다.
그들은 나의 일족이었다.
나의 백성이었다.
나의 형제이고, 자매였으며 수하들이었다.
비록 인간들에게는 마라고 배척받을지언정, 그들은 웃을 줄 알았고, 울 줄 알았으며 절망하고 좌절할 수 있는 생명이었다.
그런 생명을 그저 무자비하게 처리하고 그것을 단지 정의라는 이름으로 덮어 버린 만행을 나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그가 말을 걸어왔다.
“복수를 원하지 않나?”
복수…라고?
그것은 더없이 달콤한 유혹이었다.
《악의 서》를 완성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한다면 세상의 평화를 내세워 우리를 핍박한 신들에게 복수를 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들끓는 분노를, 억울함을, 한을 세상에 토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 힘을 사용한다면 로드 오브 킹덤을 재건하는 것도, 죽은 마족들을 부활시키는 것조차도 가능하다. 그것은 신의 법칙을 초월하고 악마의 힘조차 넘어선 권능이니까. 그리고 너는 나의 첫 번째 전도사로서 마족들과 함께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그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절대 농담이나 거짓이 아니며, 《악의 서》에는 그만한 힘이 있으리라는 것을.
마검자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단순히 무의미한 복수가 아니라 그들을 되살려 내고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어쩌겠느냐, 마왕이여?”
두근.
심장이 요동치며, 목이 바짝 말라 온다.
재촉하지도, 다그치지도, 권하지도 않는다만 나지막이 물어오는 음성이, 그리고 그 음울한 눈빛이 나를 동요하게 했다.
세계 정복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하지만 나의 운명을 희롱하고 절망에 이르게 한 신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제대로 된 행복조차 누려 보지 못하고, 사라진 일족이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갈증을 느끼게 했다.
찰나와 같이 짧고도 영원과 같이 긴 시간, 그 끝에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아니, 내릴 수밖에 없었다.
로드 오브 킹덤의 군주로서, 마족들의 수장인 마왕으로서 애초부터 내게 선택의 여지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