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65)
64마왕의 소망
“쿨럭…!”
어두워져 그 무엇도 비치지 않는 시야.
막막해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귀, 그리고 목에서 역류하는 썩은 피와 온몸에서 전해져 오는 깊은 고통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려 준다.
이 죽음을 그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이 내게 준 최고이자 최후의 선물.
그러니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과욕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나는 죽음의 그 순간까지, 그 사내를 보고, 듣고, 느끼고 싶었다.
다만 그 하나의 집념으로 마력의 폭주를 최대한 제어하여, 신체의 손상을 한계까지 억제한다.
억눌러진 혈관을 열고, 막힌 신경을 하나하나 이어 가며, 잃어버린 감각을 찾기 위해 헤매길 한참, 그 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시각과 청각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각이 회복된 순간, 나는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땅에 떨어져 부스러지는 비 사이로 보이는 것은 더없이 익숙한 검은 옷. 빙설관 레닌을 덮친 순간 죽어야 했을 누군가의 다리가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보고만 싶었다.
알고만 싶었다.
느끼고 싶었다.
하나 보여선 안 된다.
하나 알려선 안 된다.
하나 전해선 안 된다.
더없이 추악한 모습을, 너무나 더러운 생각을, 끝까지 요사한 마음을.
왕국을 잃어버린 나의 유일한 보금자리에게, 꿈을 잃어버린 나의 오직 하나뿐이던 희망에게, 삶을 잃어버린 내게 마지막 남아 있는 의미에게.
그런데도 결국 도망치지도, 이 자리에서 피하지도 못한 채, 나는 그저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신감과 실망으로 물든 그의 질책이 내 심장을 찔러 올 것을 기다리며….
“아리스.”
흠칫.
언제나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뚝뚝한 목소리에 몸이 떨려 온다.
저주나 증오의 말은 얼마든 들어 왔고,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동요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이 무뚝뚝한 목소리로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죽기 바랐는데.
이 사내가 내게 말하기 전에, 그래서 내가 이 사내에게 실망하기 전에, 설령 거짓된 행복을 품에 안고 죽더라도 더 이상 절망하고 싶지만은 않았지만, 냉정하고도 잔혹한 세상은, 결국 내게 마지막 절망을 안겨 준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마력의 고삐를 놓는다면 마력의 폭주를 가속화한다면 된다. 그렇다면 이 사내와 함께 죽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거짓으로조차 꾸밀 수 없는 최후 최악의 파멸이라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나는….
“몸은 괜찮나?”
…아?
더없이 무뚝뚝한 사내의 음성.
증오도 악의도 담기지 않는 그 말에 무심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보고야 말았다. 언제나 똑같이 냉정한 그 눈동자에 희미하게 엿보이는 것은 경멸 아닌 걱정.
평소와 다름없는 냉담한 음성에 흐릿하게 드러나는 것은 증오 아닌 동정.
조금도 변함없는 사내의 모습에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은 동요 아닌 평정.
…왜?
대체,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혼란에 빠져, 나는 그가 모를 리 없음을 알면서도,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는 마족이야.”
“알고 있다.”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사내.
그래, 그 로드 오브 킹덤의 폐허에서 나를 찾아내서 구해 준 장본인인 만큼, 그는 처음부터 내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피를 마시는 걸 봤잖아.”
“그래.”
“이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피를 마셔 왔어.”
“그래.”
“짐승의 피만 마셔 온 게 아니야.”
“그래.”
담담한 그 대답이 반복될수록 가슴 속에 무언가가 계속 쌓여 간다.
너무 뜨겁고, 너무 무겁고, 너무 낯선 그것을 비워 내기 위해. 나는 더욱더 거세게 말을 쏟아 낸다.
“마을에서 없어진 가축들과 실종된 바보도 모두 내 짓이라는 걸 알잖아!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당신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을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난 악마의 피를 이은 마의 일족이니까. 그러니까 괜히 걱정하는 척하지 마. 쓸데없이 친한 척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는 말을, 나는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너무나 쌓여 당장이라도 깨질 것만 같은 마음을 지킬 방법은, 이것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단숨에 말을 쏟아 낸 나는, 천천히 나를 향해 들어 올려지는 사내의 거친 손을 차갑게 지켜보았다. 그래, 맞는 것 따위는 익숙하다. 이 마음의 혼란을 덜어 낼 수만 있다면 몇 대 맞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먹일까, 손바닥일까.
겁먹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마지막까지 그 손을 노려보려 했지만 그런 나의 결심은 지켜질 수 없었다.
머리를 쓸어 오는 손을 노려보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무슨….”
거칠면서도 빗방울로 차갑게 젖어 든, 그러나 너무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에 굳어 버린 나의 귓가로 들려오는 것은, 한 줄기 나지막한 음성.
“누가 뭐라고 하, 너는 인간이다.”
“……!”
상상조차 못 했던 충격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져 간다.
그 무엇도 생각 못 하고, 그 무엇도 말할 수 없고, 그 무엇도 행동할 수 없는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사내는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우리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
어지럽던 가슴이 터질 듯 욱신거린다. 마음에 쌓아 뒀던 벽에 금이 가는 더없이 깊고도 뜨거운 통증에,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움직인다.
탁-!
“내게 가족 같은 건… 필요 없어.”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팔을 쳐 내며 사납게 토해 낸 외침.
그래, 내게 가족 같은 건 필요 없다. 나는 버림받은 마족의 마지막 군주이자, 인간을 초월한 72개의 주문을 지배하는 마왕.
그러니까 인간을 믿어선 안 되며, 결코 인간과 친해질 수도 없다.
설령 그것이… 이 사내라 해도.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아―!!!
부서질 듯 저린 통증을 억지로 짓누르며 사내에 대한 적의를 일으킨다. 하지만 아무리 적의를 품어도 여전히 차갑고 싸늘한 그의 눈이 쓸쓸하게 보이는 것은 대체 어째서일까.
“마는 인정으로 품을 수 없는 법. 다만 정의로써 다스려야 할 뿐이오.”
사내를 노려보던 도중, 그 엄숙한 음성에 흠칫 몸을 떤다.
한 걸음 물러나 방관하고 있는 것처럼 길 저편에 서 있는 순백의 인영이 나를 떨리게 했다.
“그것은 내가 용납할 수 없소. 겨울의 전도사여.”
…어째서…!
한 줄기 무뚝뚝한 음성과 함께 지키듯 앞을 가로막고 나선 넓은 등.
그것을 보고, 나는 신음한다.
그토록 말했는데.
나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마임을, 가까이해 봤자 다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결국 쓸데없는 희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데도 끝까지 나를 감싸는 사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어째선지 뜨겁게 내 마음을 두들겨 온다.
“본인을 막지 마시오. 그대가 감싸는 것은 틀림없는 마. 아무리 선의와 인정을 베풀어도 결국은 그대를 해치고 세상을 고통스럽게 할 죄악의 씨앗이오.”
그 냉혹한 음성에 치솟아 오르는 것은 뜨거운 분노와 깊은 절망.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해 놓고 그것을 마라는 이유로 정당화시켜 버리는 그 구역질 나는 행위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나를 분노케 하고, 목을 태우는 갈증을 채우기 위해 눈앞에 있는 사내의 목에 이빨을 박고 피를 빨고 싶어 하는 스스로의 본성이, 나를 절망케 한다.
“어째서 이 아이가 마라는 것이오?”
“그 흉안에 드러나는 사악한 본성이야말로 마의 증거라는 걸, 그대도 모르진 않을 것이오.”
가슴이… 아프다.
그래, 내가 마족임은 명백한 사실.
그렇기에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마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슬퍼한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적어도 이 사내 앞에서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것이 문제라면, 됐소.”
…무슨, 소릴까.
나조차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앞두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무뚝뚝한 음성.
그것을 따라 옮겨진 시선이, 사내가 꺼내 든 목걸이에 고정된다.
금속 줄에 달려 있는 초승달 장식.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검은 광택의 목걸이가, 나에게 도저히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건, 설마…?
문뜩 치솟는 의문은, 이어진 그의 행동에 증발하고 만다.
촤아악―!
무슨…!
초승달 끝부분이 살을 파고들며 길게 갈라진 사내의 손목에서 붉은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나온다.
“마셔라.”
놀라서 신음을 흘리지도 못하던 나는 피로 물든 손목에 목걸이를 휘감아, 내게 내미는 사내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너의 갈증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피로 갈증을 채워 주겠다. 너의 힘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손으로 힘을 막아 주겠다. 너의 고독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삶으로 고독을 없애 주겠다. 그리고 세상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목숨으로 세상을 막아 주겠다. 그러니 이것을 마셔라.”
“아….”
두근.
칼날처럼 파고들어 온 엄숙한 음성이 내 안에서 들끓던 감정을 누르며 금이 가 있던 마음의 벽이 점차 무너진다. 가슴에서 치솟는 감정은 뜨거운 열기가 되어 눈 밖으로 흘러내리지만 이미 마음의 벽을 잃었기에, 나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다만 그에게 질문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나는, 그저 한낱 마일뿐인데….”
그것은 냉혹하고도 무자비한 현실.
같은 마족에게조차 경배받으며 마왕으로서 고독을 지켜 왔던 과거.
“말했지 않나. 너는 마가 아니다.”
그 과거는, 흔들림 없는 음성에, 그 현실은, 너무 차가운 눈빛에, 그 고독은, 진정 확고한 신념에.
“단지 우리의 가족일 뿐이다.”
“……!”
그렇게, 깨져 버렸다.
그래. 그랬다. 이 사내는 이런 이였다. 아무도 남지 않은 로드 오브 킹덤에서 가진 것 하나 없는 소녀를 구해 주었고, 한낱 소녀를 위해 마법사와 싸웠으며, 가족을 위해 도적의 소굴에 뛰어들어 요마조차 같은 생명으로서 생각해 주었던 그런, 이상한 이였다.
그리고 나는 마이기 전에….
이 사내의, 가족이었다.
단순한 말이 아닌 신념으로, 행동이 아닌 자신의 마음으로 그것을 증명한 사내의 흔들림 없는 눈을, 나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 손목에 입술을 대자 빨려 오듯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온 붉은 생명수가, 목을 적셔 온다.
메마른 갈증이 점차 잊혀 가며 그 대신 마음을 채워 오는 것은 평소의 쾌감과는 전혀 다른, 아늑하고도 행복한 평안.
“세상에 만들어질 때 만물과 만생에 차별이 없이 만들어졌으니, 그 어떤 죄악도 결국에는 태고의 순수에서 비롯됐음이라. 하니 죄를 두려워하지 말고 악을 미워하지 말라. 죄악이란 결국 마음속에 있으니,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것은 죄악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고 악을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이라.”
그 무뚝뚝한 목소리에 담겨 있는 것은 너무나 엄숙한 위엄과 따스한 온기.
아무리 많은 피를 마신 뒤에도 만족을 모르던 마의 본능이, 99개의 주문을 모은다 해도 통제할 수 없을 듯싶던 마력이, 어떤 선의와 정념도 거부할 듯하던 진득한 악의와 지독한 사념조차 그 편안한 음성에는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두근.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더 이상 갈증이 느껴지지 않는 더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한 쌍의 깊은 눈동자.
대체 무엇을 담고 있을지, 너무나 깊고도 깊은 눈동자의 끝에 흐릿하게나마 엿보이는 따스한 온기가,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그 온기는 환상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그에게 사라져 버렸음에도, 끝까지 그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나를 뒤로한 채, 사내는 레닌에게 몸을 돌렸다.
“이것이 바로 나의 뜻이고, 각오요.”
“…그대는….”
영혼조차 얼어붙은 것만 같던 레닌에게 미약하게나마 동요가 느껴지는 것은, 단지 나의 착각일까.
아니,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사내의 당당한 기세 앞에, 레닌은 분명히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
곧 평정을 되찾은 놈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의 행동에 답했다.
“마는 틀림없이 사악한 존재. 그리고 마를 감싸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오. 그동안 마에 희생돼 온 이들을 위해서라도 마를 방관할 수는 없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었다고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약속했으니까.
게다가 이제 와서 내가 뭐라고 말해 봤자 그것은 추한 변명으로만 여겨질 뿐, 아무도 믿어 줄 리 없었으니까.
바로 그렇기에 그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답에, 나는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아이를 믿소.”
“……!”
두근.
심장이 저릿 조여 오며 아픔도, 괴로움도, 불쾌함도 아닌, 기묘한 두근거림이 가슴 속을 채워 온다.
나조차 믿지 않았던 진실을, 사내는 믿어 주었다.
어떠한 말조차 듣지도 않고, 나를 이해해 주었다.
마족이나 죄인 따위가 아니라, 나만을 봐 주었다.
지키고 싶다.
이 사내에게 지킴 받고 도움받는 것은 분명 큰 행복, 하지만 이제는 지키고 싶었다.
겨우 나 같은 것 때문에 사내가 헛되이 희생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제, 됐다.
모든 걸 잘못했다 말하고 처단받자, 필요하다면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하자.
그걸로 모든 게 마무리되지는 않겠지만, 비록 이미 무너진 왕국이라도 군주이던 나의 목을 건 사과라면, 냉혹한 겨울 신이라도 받아 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사라진 꿈과 왕국과 수하들에 대한 모욕이 될지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보답이니까.
그 각오를 마음에 담아 나는 입을 열었다.
“그만둬요!”
이 목소리는….
어딘지 앳된 음성을 듣고 나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골목에 모인 주민들을, 아니, 정확히는 그 사이에서 뛰쳐나온 소년을 보고 신음을 삼켰다.
피와 상처투성이에 넝마 같은 옷차림에 무모하리만치 단순하고 호기심 많은 멍청한 더벅머리의 모습이 나를 숨죽이게 했다.
“아리스가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목이 찢어지는 듯한 거센 외침과 함께 바보 멍청이가 내보인 것은, 한쪽 눈이 뻥 뚫려 있는 늑대의 머리.
…살아 있었구나.
늑대를 잡겠다며 몰래 사라졌던 바보는, 뜻밖의 등장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
“마가 뭐고, 죄악이 어쨌다는 어려운 소리는 몰라요. 하지만 그동안 마을의 가축을 잡아먹은 건 이 늑대예요. 그러니까 아리스는 아무 잘못 없다고요!”
진즉 늑대 밥이나 됐을 거로 생각했는데, 저 바보가 오히려 늑대를 잡아 왔다니.
보고도 믿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그 손에 들린 늑대의 머리는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해주었다.
“사실은 모두 늑대의 짓인 걸 알면서, 그저 늑대가 무서워서 요마라느니 마족이라느니 하는 소리로 그냥 피하고 있었을 뿐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늑대를 잡아 왔으니까 더 이상 아리스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것은 정말 바보 멍청이다운, 하지만 그렇기에 가능했던 무모함.
비록 주제를 모르는 만용일지언정, 기어코 약속대로 늑대를 잡아 온 바보는, 다시 지상 최강의 인간에게 고함치는 무모한 자살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바보 앞으로 나서는 것은 또 다른 무모함으로 뭉쳐 있는 사내였다.
“자신만이 옳다는 믿는 오만. 그것이 그대의 악이라면….”
바보일 리가 없다.
멍청이일 리가 없다.
무지에서 비롯된 만용도, 어린아이 같은 동정심과 치기도 없다.
“그대의 악의(惡意), 받아 가겠소.”
그런데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위험을 각오하고 레닌에게 맞선, 누구보다 무모하면서도 믿음직스러운 사내의 선언이,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리고 그 용기는, 신의 힘을 대행하는 자의 빙산 같은 마음조차 움직이게 했다.
“…아무리 마를 물리치는 것이 중요하다 한들 정의를 꺾고 신념을 밟으며 뜻을 이루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이 아니니, 그대들의 의지를 봐서라도 이번만은 마의 심판을 미루도록 하겠소.”
레닌이 물러났다.
암흑성 이래 최강으로 불리던 로드 오브 킹덤의 권세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81주문의 마력과 일당백 검자의 무력으로도 막지 못한 절대적으로만 보이던 ‘신의 힘’이, 고작 한 사내의 뜻에 꺾인다.
“무엇보다….”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레닌은 주민들이 물러난 골목길을 뒤로하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혹 놈이 무슨 짓을 할까 긴장했던 나는, 이어진 레닌의 행동에 허탈해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은 끝이 아닌 시작의 준비일지니… 이로써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마가 깨어날 때,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오.”
“어둠은 밤 속에 언제까지나 영원할지니… 그대가 친구로 찾아올 날을 기다리겠소.”
성호를 그어 보이는 레닌에게 정중히 마주 인사하는 사내.
서로 싸우고 대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나 원념 따위는 남겨 두지 않고 엄숙하게 작별을 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서로의 신념을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릇되고 틀린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신념을 지녔기에 싸웠던 지상 최강의 인간, 빙설관 레닌.
인사를 끝으로 다시 몸을 돌려 빗줄기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그 모습이 왠지 안타깝고도 쓸쓸하게만 보이는 것은, 대체 어째서일까.
하지만 나는 레닌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리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달려가 그의 등에 안겨 들었을 뿐이다.
그 품은 넓고도 따스하고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워 단지 그것만으로, 내게 더없는 아늑함과 행복감을 주었다.
“이제 괜찮다.”
“…응….”
그 음성은 평소처럼 무뚝뚝하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두근거리는 심장에서 치솟은 열기가, 얼굴을 가득 채우고도 부족해, 귓불까지 뜨겁게 달궈 온다.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를 안았던 손을 풀고 물러났지만, 이미 허물어진 마음의 벽은 감정이 드러난 얼굴을 가려 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나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것은 세레나의 앞.
아크베르넬의 마창이 폭발하는 충격에서 튕겨 나와, 정신을 잃은 듯.
비에 젖고 곳곳이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하얀 살결을 드러낸 채 쓰러져 있는 세레나를 나는 물끄러미 보았다.
검의 정점에 오른 검사 중 한 명이자 10대에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를 통합해 ‘홍염의 불꽃’이라는 검술을 만든 기재.
그리고 ‘데스 쉐도우’를 홀로 몰살하고, 그 이후로도 수많은 업적을 세워 사상 최연소 검자의 칭호를 얻은 자.
검에 대한 재능만은, 광검자조차 넘어선다는 검의 천재, 천검자 S. R. 라바일.
이 가녀리게만 보이는 여인이 그 엄청난 칭호의 주인이라니,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가 빙설관 레닌을 상대로 보여 준 엄청난 검술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 따위를 남겨 주지 않았다.
“수고했다.”
순간,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따스한 음성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 주변에는 나와, 그, 세레나와 바보뿐.
다른 사람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세레나가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고, 바보의 목소리는 결코 아니며, 내 혼잣말일 리는 없음을 알면서도 이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몰라, 사방을 헤매길 한참.
…설…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해답을 찾아낸 결과, 아흔아홉 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난 것을 본 듯한 충격에 빠진 나를 뒤로한 채, 그는 조심스럽게 세레나를 안아 들었다.
조금이라도 충격이 가지 않도록 부드럽게 세레나를 안아 드는 그 손길이 부럽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아니, 사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다시 그의 손길을 느낄 기회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남아 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는… 우리 ‘가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