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 멸망에 맞서 싸운다는 것(5)
익숙한 얼굴. 그러나 존재해선 안 될 얼굴이 보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나도 모르게 행동을 멈추고 눈을 깜빡여 본다.
하지만 아무리 두 눈을 씻고 살펴본들 이미 확인한 현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이어지는 것은 확신이다. 그래, 틀림없다.
저 엘프는 분명 엘리아였다.
‘그런데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머릿속이 혼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이 꿈속이기 때문인가? 아니, 이곳은 내 꿈속이 아니다.
내 기억을 읽은 게 아닌 이상 동료들의 환상을 피워내지는 못할 터.
무엇보다 저 모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마기에 젖어 타락한 엘리아라니.
나로서는 언감생심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모습이 아닌가.
‘..설마 환각이 아니라는 건가?’
허나 그 순간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쩌면 나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
“젠장.”
아무래도 생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다. 이어지는 엘리아의 맹공.
나는 그대로 검을 휘두르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겨눠지는 칼날.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뭘 해야 하는 거지?
“..엘리아! 정신 차려!”
습관적으로 목을 자르려던 칼날을 가까스로 멈춰 세운다.
부르짖는 것은 그녀의 이름이다.
터엉!
그러나 대답 없이 활대를 휘두르는 엘리아의 모습.
나는 그대로 칼등을 후려쳐 날아드는 활을 튕겨냈다.
‘이름을 불렀는데도 반응이 없어. 그냥 닮은 사람인 건가? 그래, 어쩌면 마수가 내 기억을 읽고 엘리아의 모습으로 변한 걸지도 몰라.’
생각이 이어지는 순간 휘두르는 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엘리아를 향해, 아니 엘리아를 닮은 다크 엘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내질러지는 칼날.
퍼억!
그러나 그 칼날이 끝내 목을 자르는 일은 없었다.
반 바퀴 회전한 칼날과 칼등을 맞고 튕겨 나간 다크 엘프.
나는 바닥에 쓰러진 다크 엘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니콜라스라는 이름은 알고 있나?”
사실, 나는 질문하면서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니콜..라스.”
그런데 왜 하필 그 말에 반응이 돌아오는 걸까. 탄식을 금할 수 없는 순간이다.
차라리 지금까지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면 그나마 외면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엘리아.”
엘리아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텅 빈 동공과 수은을 닮은 눈물.
그녀는 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눈을 감았다 떠보면,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 * *
암살 시도가 있었던 날부터 며칠이 흘렀다.
솔리아가 이곳 ‘헬리오스’ 마을에 찾아온 사절들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그들은 제각기 ‘아폴론’, ‘루’, ‘미트라’ 마을에서 온 사절들이었다.
하나같이 대사제 ‘라’의 자식들이 세운 마을의 출신들.
“경비대 따위와 할 이야기가 아니다! 사제님을 모셔 와라!”
사절들은 마을에 들어섬과 동시에 헬리오스와 이카로스를 내놓으라며 언성을 높였다.
물론 두 사람을 내어놓는다고 해서 저들의 분노가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저들은 전쟁의 명분을 쌓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을 테니까.
“솔리아. 저래도 되는 거 맞아?”
“..나도 모르겠어.”
솔리아와 솔루이는 인파의 틈에 섞인 채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 외지인 놈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다고.”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도망쳐야지. 그 외지인의 힘이 센 거랑은 별개로 숫자에서 차이가 너무 나잖아. 전쟁이 나면 우리 가족 모두가 노예가 될 거라고.”
“하긴..숫자는 우리가 제일 적었지. 젠장..졸지에 부랑자 신세가 되게 생겼군.”
쌍둥이의 귓가로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결코 호의적이라 할 수는 없을 목소리다.
아마 얼마 전까지였다면 솔리아 역시 그들의 말에 동의했을 테지.
그만큼 아르카나의 행동은 급진적이고 과격했다.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솔리아?”
그러나 며칠 전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솔리아의 생각은 바뀌었다.
‘저들이 노리는 건 우리야..그 아저씨가 아니라고..’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터무니없게만 들렸던 이야기들.
그녀와 동생이 머지않아 사제가 될 거라던 말들..
차라리 거짓이길 바랐던 이야기들이다.
‘이카로스가 우리를 데려가려 한 이유도 그거였겠지. 대사제와 그 아들들은 차기 사제가 누가 될지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만약 그 거짓말이 진짜라면 그들 쌍둥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설마 지난번처럼 암살자들이 찾아오는 건가?
솔리아는 차마 조급함을 감추지 못한 채 이를 악물었다.
“솔리아. 저놈들이 우리를 보고 있는데?”
“..응. 그러네.”
“어쩌지? 우리한테 오는데?”
눈빛을 반짝이며 쌍둥이를 향해 다가오는 사절들.
솔루이는 그 모습을 보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저리 비켜!”
마을 사람 몇몇이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나섰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하기야 아무리 호루스족이 타고난 강자라 하더라도 훈련을 받은 자와 아닌 자의 차이는 컸다.
사절들은 평범한 주민들이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마도 단테 정도는 되어야 저들과 상대할 수 있을 테지.
“이놈들인가?”
“쌍둥이잖아. 아마 맞겠지.”
“그럼 여기서 처리하는 게..”
솔리아는 제 앞에 선 세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살기를 번득이며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들.
이윽고 내뻗어지는 그 손아귀를 보며 솔리아는 깨달았다.
그들 쌍둥이는 결코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야.”
그러나 솔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이전의 사건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 멋대로 손을 대는 거야?”
어디선가 날아든 칼날이 남자의 손목을 잘라냈다.
“끄아아아아악!”
비명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비현실적인 울음이다.
남은 두 사절이 그 소리에 놀라 물러섰지만 너무 늦은 대처였다.
다시 한번 날아드는 칼날이 이윽고 그들의 발목을 잘라낸다.
그렇게 세 명의 호루스족이 일제히 바닥을 나뒹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리 비켜.”
혼란에 빠진 마을 사람들 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스스로를 아르카나라고 소개한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다, 다들 물러서..!”
마을 사람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흩어졌다.
같은 호루스족이라기보다는 마치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
그러나 아르카나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너희 중에 다크 엘프를 보낸 건 누구냐.”
“그, 그게 무슨 헛소리지?”
사절 중 하나가 발뺌을 하고 나섰다. 미트라의 사절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되묻는 사절의 모습. 범상치 않은 연기력이 돋보인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그런 얼굴을 보았다면 그 진위를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을 테지.
“너로군.”
그런데 왜 거짓말이 들통난 걸까. 왜 의심 한번 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거지?
파삭!
뺨을 스치고 지나간 검격. 미트라의 사절이 얼어붙는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은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였다.
감히 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섬뜩한 소리. 사절은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털썩.
이윽고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코끝을 스치는 건 핏빛으로 물든 냄새다.
‘..대체 뭘 한 거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사신장급은 아니라지만 사절의 실력이 어디 가서 밀리는 수준은 결코 아닐 터.
그런데 그런 제 눈으로도 이 남자의 공격을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그 다크 엘프를 어디서 데려온 거지?”
무엇보다 저 눈빛은 뭐지? 숨을 쉬기가 어렵다.
사절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저 태양처럼 타오르는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죄어드는 것 같았다.
“그, 그 다크 엘프는 사제님이 데려오신 거라 저도 모릅니다. 진짭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래, 믿겠다.”
신앙적인 체험이었다.
저 남자의 명령을 따르는 순간, 마치 영혼 자체가 구원받는 것만 같은 감각.
사절의 얼굴에 환희가 서리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
콰직!
사절이 쓰러진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이로써 세 명의 사제가 모두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미트라..아리벨..파라켈수스..”
적막한 가운데 칼날처럼 일어선 살의가 깃들기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가 향하는 것은 저 하늘 위의 구멍이었다.
“태양신. 너라면 답을 알고 있을까?”
내뱉어진 질문이 허공에서 흩어진다. 불에 타 눌어붙은 잔흔.
아르카나는 새카맣게 불타버린 시신을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전쟁을 기다리고 있는 건 저들 형제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 * *
그렇게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전장에 선 것은 대사제의, 라의 세 아들들이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천 명을 넘어서는 병력이 즐비해 있었다.
민간인과 부랑자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호루스족의 모든 전사가 모인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빌어먹을 녀석. 감히 우리의 사절을 죽여?”
차남 ‘루’가 이를 갈며 분노를 내뱉었다.
당장에라도 그 아르카나라는 남자를 찢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감히 부랑자 따위가 자신들에게 전쟁을 걸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진정하시죠. 루 형님. 어차피 그놈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미트라. 너는 화도 나지 않는 거냐?”
“물론 저도 화가 납니다.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놈을 죽이는 일이 아닙니다.”
“..젠장.”
미트라의 대답에 루는 말 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의 말이 옳다.
지금 중요한 건 하찮은 복수심 따위를 충족하는 게 아니라 사제의 직위를 지켜내는 것이니까.
‘그걸 위해선 그놈의 쌍둥이들을 반드시 죽여야 해.’
루는 달아오른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며 자신의 목표를 새롭게 다잡았다.
“..정지.”
그렇게 얼마를 걸어갔을까.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아레스가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두 남자.
그 모습이 무척이나 눈에 익었던 탓이다.
“..설마 둘이서 덤비겠다는 건가?”
“글쎄요. 어쩌면 매복이 있는 걸지도 모르죠.”
“이런 평원에서 매복을 한다고?”
혹시나 잘못 본 건가 싶어 다시 확인해 보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저 두 남자는 말로만 듣던 아르카나와 헬리오스 마을의 단테였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루의 얼굴에 의혹이 서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두 사람이 이 시점에서 등장한 이유를 헤아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모두 물러나라.”
그러나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아레스는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전장의 냄새가 그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숨이 죄어오는 듯한 감각.
정체를 모를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후퇴해라! 어서!”
경고성을 터트린 건 그야말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물결.
“괴물들이다!”
하늘과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