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the fact that a new actor is a tycoon RAW novel - Chapter (89)
89막, 기약없는 약속 (2)
89막, 기약없는 약속 (2)
가장 처음에 든 기분은 후련함이었다.
복귀작.
경력과 능력을 막론하고 누구나 긴장할 수밖에 없을 복귀작은 버젓이 성공을 거두었으니까.
‘···.’
인터넷에선 화젯거리가 된 일일연속극의 이름이 쉴 새 없이 올랐다.
출연한 배우들에 대한 찬사는 물론 이런 작품을 또 다시 써내고 만 스타작가에 대한 찬사까지.
근래 최고 시청률 45프로마저 달성하고 만 연속극은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당장 포털사이트를 들어가면 입구부터 넝쿨당에 대한 기사가 걸려있을 만큼.
하여 후련할 수밖에 없던 박하은이었다.
공백기 동안 조금도 퇴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결과.
아니, 오히려 보다 성장해왔음을 증명하는 결과였으니까.
헌데 이상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개운해야할 순간일 텐데.
후련한 기분을 만끽하기만 해도 충분할 텐데.
정작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자신이 보였다.
꼭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말인데···.”
절대 취기로 인해 뱉는 충동적인 말은 아니었다.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바.
마음이 무거워지던 이유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 있어요 혹시?”
“···네?”
오히려 무언가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확신을 얻은 박하은 작가는 마침내 용기를 얻었다.
“없으면 그냥 하나 더 하자고 하려구요.”
용기를 담은 잔잔한 한 마디였다.
“저랑, 주연으로.”
“···.”
살랑 부는 바람이 입을 다문 신인배우의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이신우.
원래라면 그녀 정도 되는 스타작가가 배우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게 이렇게 민망할 일이 아닐 텐데도.
“···어때요?”
구태여 긴장되는 마음을 얼른 진정시키기 위해 대답을 재촉한 박하은 작가가 빤히 바라봤다.
딱히 그의 외모가 돋보여서는 아니었다.
실제로 수려한 비주얼로도 대중들의 인기를 끄는 이신우지만 그녀가 반한 건 절대 신인답지 않은 그 연기력이었으니까.
물론 밤하늘이 비추는 그 얼굴은 한 폭의 절경과도 같았지만.
“···죄송해요.”
“네?”
멋쩍은 미소를 지은 신인배우는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건 역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제안을 건넨 그녀가 머뭇거린 이유는 별 다른 게 아니었다.
KBC에는 차지윤이 있다면 MBS에는 박하은이 있다.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둘의 주연.
그것도 이번 연속극과 같이 비중이 분산되는 공동주연도 아니고 무려 단독 주연일 텐데.
보통이라면 배역을 받아내지 못해 안달이 날 법한 이 자리를 두고 어떻게.
“말씀은 감사한데, 아무래도 지금 바로 덥석 받기에는··· 하하”
저런 여유 넘치는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당황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박하은 작가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물론 그 이상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고민해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네요?”
“네, 작가님만 괜찮으시다면요.”
원체 배우와의 상호 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그녀로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아니, 강요할 리 없는 성미였으니까.
오히려 웃어넘긴 이신우를 따라 입가를 주욱 그려보았다.
털어내고 나니 한결 개운해진 낯으로.
“그래요 그럼···.”
“괜찮으세요?”
“뭐 어때요.”
픽 미소 지은 박하은 작가가 먼저 등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다음 작품도 있고 다다음 작품도 있는 건데.”
자신의 마음은 전했으니 그만이라는 투로.
먼저 들어가겠다는 말과 함께 돌아가는 박하은의 발걸음은 제법 가벼워보였다.
다만.
고민의 이유가 자신의 앙숙인 차지윤 작가 때문이라는 걸.
『······미니시리즈라구요?』
그녀가 차기작 섭외를 제안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순간.
그 여유는 처참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지만.
* * *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갑작스레 나타난 박하은이 건넨 의사는 구명석 국장에게 전해들었던 차지윤의 의사와도 판박이였으니까.
‘······아직 막방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섭외라니.’
독립영화를 찍은 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세였다.
그때도 상을 받으며 이곳저곳 불려 다니긴 했지만 고작 그뿐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각 방송국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는 두 스타작가에게 주연 자리를 제안 받은 걸.
‘···주변에서 알면 뭐라고 하려나.’
어쩐지 가볍게 예상되는 반응에 피식 미소가 새어나왔다.
물론 그전에 넝쿨당의 깔끔한 마무리를 지켜보는 게 먼저겠지만.
“신우 넌 무슨 화장실을 이렇게 오래 다녀오니!”
“아, 잠깐 바람도 쐬다가···.”
회식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격하게 반기는 박시향.
그윽한 알코올 향을 풍긴 대선배는 얼른 팔목을 붙잡았다.
“잘 됐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전화하려고 했는데.”
“전화요?”
“응.”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전화라니.
예전엔 까마득하기만 했던 대선배가 생각보다 주당이라는 사실을 되새길 무렵이었다.
오늘 회식의 마지막 게스트가 뒤늦게 도착한 건.
“구, 국장님?”
술에 잔뜩 절은 어느 카메라감독의 비명이 먼저 그 등장을 알렸다.
대신 의연하게 그 어깨를 툭툭 두드린 홍문석 국장.
막 안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가 사람 좋은 얼굴을 지어보였다.
“허허,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오지 못할 자리라도 온 것처럼.”
“아, 아닙니에요 국장님!”
혀가 꼬인 감독을 뒤로 하고 걸어온 그가 나의 바로 앞에 섰다.
아니, 나의 옆에 있던 대선배의 앞에 섰다.
“가장 먼저 와서 축하해주시겠다더니 늦으셨네요?”
“하하, 미안하네 박배우. 늙으니 몸이 굼뜨구만.”
“풋, 농담이에요. 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음주를 딱히 즐기지 않는다며 일찍이 떠난 또 다른 대선배 류인환.
그를 대신하여 박시향이 넉살좋게 큰 잔을 들어 건네며 말했다.
“자, 그럼 제대로 축하연 시작해주셔야죠?”
“그래, 오랜만에 건배사 한 번 하지.”
최고 권력자의 등장에 굳어버린 방송국 식구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이들마저도 예외 없이.
한 신인배우가 얼떨결에 건배사를 읊었을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모인 이목을 두고.
“다들 고생 많았네.”
나직이 노후한 한 마디를 뱉은 홍문석 국장이 서서히 들이부었다.
“내 대에 이런 대작을 다 같이 만들어냈다니 나조차도 어쩐지 벅차고, 다들 참 고마워서 말이야.”
꺼지던 불씨에 기름을 확.
“······겨우 축하 한 마디로 넘어가기엔 아깝지 않겠어?”
대번에 방송국 식구들의 눈빛이 변한 건 그때였다.
흐리멍텅하거나 긴장이 바짝 들어가있던 눈빛들이 꼭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들 어디 좋은 데라도 한 번 다녀와야지.”
“네, 네?”
“국장님 그 말씀은···.”
아까 전 술에 절었던 카메라감독이 중얼거리는 걸 따라.
“근사하게 해외여행 좀 한 번 다녀오라고 촬영진과 배우들까지 다같이. 경비는 내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말야.”
“우와아앗!”
“해, 해외면 설마.”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눈길로 바라보는 제 식구들에게 픽 웃은 홍문석 국장이 도장을 찍었다.
“음, 하와이 정도면 괜찮겠나?”
“국장님 사랑합니다!”
“국장님 만세!”
천천히 무르익던 회식 자리에 그렇게 기름이 부어지길.
소란스럽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다시금 테이블이 나뉘어졌다.
저편에 빈 테이블로 문득 대선배가 나를 이끌면서.
“신우 너, 국장님이 여기까지 왜 오셨는지 알아?”
“···네?”
얼떨결에 착석한 자리 반대편에는 방금 전 보다 화끈한 건배사를 뱉었던 그가 와있었다.
아니, 자리에 따라 앉으며 인사했다.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국장님.”
일단 공손한 말투로 국장의 낌새를 살폈다.
대선배의 뉘앙스로는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말 같았으니까.
‘설마, 홍문석 국장도 아는 건가?’
이철호 회장과의 관계를 아는 것인지.
하여 날 떠보려는 건지 긴장이 점점 머금어지던 찰나였다.
“여기저기서 떠들썩하지?”
“예?”
“자네 이름 말이야.”
방금 전 위로 치켜 올렸던 잔을 입안으로 천천히 기울이는 홍문석 국장.
“유례없는 신인이다, 연기의 귀재가 등장했다··· 크으. 아주 말들이 많지 않나?”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이어나가던 그는 돌연 눈을 또렷이 마주했다.
나 또한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과분한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불러온 운명인 게지. 사람들은 아무에게나 쉽게 관심을 주지 않아.”
다만 이 이상은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망설여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지를 도무지 모르겠으니.
그때였다.
테이블 위로 명함 같은 무언가를 홍문석 국장이 잔뜩 뿌린 건.
“···이건?”
무엇이느냐고 물어보려던 질문은 쏙 들어갔다.
명함처럼 보인 종이들엔 MBS 예능 프로그램의 이름이 저마다 쓰여있었다.
“소속사는 없더군. 그래서 이렇게 직접 물어보네만.”
이윽고 홍문석 국장도 의중을 꺼내보였다. 아주 노골적으로.
“이중에 출연하고 싶은 예능이 있다면 말하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
“직접 골라보란 말이야.”
그가 던진 종이들엔 뜨내기 예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인기 없는 비주류 예능도 있긴 했지만 처럼 수년째 KBC를 대표하는 장수 인기 프로그램도 함께였으니까.
헌데 이런 걸 왜.
“왜··· 제게.”
“걱정 말게, 웬만한 프로그램은 여기 박시향 배우가 공동 출연으로 도와줄 테니.”
“국장님은 얻으시는 게 뭡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당신에게 이런 수고를 덜만 한 이유가 뭐냐고.
“나?”
허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여유로이 받아친 홍문석 국장은 답했다.
“다음 세대를 이끌 스타를 두 눈으로 보게 되겠지.”
야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 눈을 빛내보였다.
마치 방송 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그것도 내가 있던 방송국에서 태어난 인기스타를.”
아니, 방송국을 위해 헌신하는 바보처럼.
“딱 그거면 충분하네 나는.”
그렇기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 * *
송충이는 풀잎을 먹고 자라며 연예인은 관심을 먹고 자란다.
아무리 배우로서 성공하고 싶다고 해도 이 또한 드라마의 여파이니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만약 아무런 각광을 받지 못했다면 이런 기회조차 오지 못했을 테니까.
더불어 캐스팅된 프로그램의 MC들도 꽤나 반겨주는 분위기였다.
한편 오히려 아쉬운 티를 내는 건 대선배쪽.
“정말 딱 이거 하나면 돼?”
“이것만 해도 과분한 걸요.”
내가 택한 건 단 하나였다.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에 얼굴을 마구 들이밀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작품할 시간도 부족하잖아요.”
“······천상배우네 아주 푸훗.”
그나마 이마저도 도와주는 선배가 있으니 망정이었지.
소속사도 뭣도 없이 혼자 예능을 찔러보고 다니는 건 사양이었다.
아마 슬슬 기획사를 구하긴 해야 할 텐데.
“다음 게스트 도착하셨습니다! 슬슬 촬영 준비하실게요!”
대기실에서 스태프의 호출을 받은 건 그 즈음이었다.
“신우 너 먼저 좀 가있을래? 화장실 좀 다녀가게.”
“알겠습니다.”
먼저 미리 안내받았던 복도를 따라 쭉 걸어나가기를.
불현듯 잠들어있던 의문이 다시금 깨어났다.
‘근데 게스트가 누구길래 안 알려주는 거지?’
보통 함께 출연할 정도면 최소한 누군지는 알려줄 텐데.
선배 박시향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던 게스트의 정체를 한창 궁금해 할세라.
어느새 도착한 복도 끝에는 누군가가 서있었다. 정확히는 두 사람이.
“···.”
“뭐야, 유정이 너 왜 멈췄···.”
참 오랜만이었다.
비운의 걸그룹.
나와 함께 찍었던 뮤직비디오로 2차 역주행까지 맞이하며 말도 안 되는 역전을 그린 걸그룹.
스테이미(Stay me).
그 중 한 명인 한주희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신우 배우님?”
넋이 나간 듯이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 날 초대해준 숙소에서 술을 마신 게 마지막이었지 아마.’
왜 그리 게스트 정체를 꽁꽁 숨기나 했더니만.
놀란 한주희나 곤두선 채로 딱딱하게 굳은 도유정이나 이야기를 전해듣지 못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
하여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당황한 속을 최대한 숨기며 자연스럽게.
“오랜··· 만이네요.”
“이게 진짜 얼마만이에요 와!”
그나마 살짝 머뭇거렸던 인사에 한주희가 화답하기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던 도유정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 반가. 아니. 오랜만··· 그게 그러니까.”
어쩐지 고장이 난 모양새로.
주춤거리던 도유정이 슬며시 입꼬리를 반달로 그었다.
“자, 잘 봤다구요. 드라마······.”
“쿡.”
“웃지 마요.”
얼마 전 본 밤하늘에 걸린 달처럼.
은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