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04
◈ 입황대전 (4)
* * *
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
야트막한 계곡처럼 쌓인 인마의 시체들 틈에서 검붉은 핏물이 졸졸거리며 흘러나와 땅속으로 스민다.
음공의 여파.
죽은 사마외도의 비린내가 천천히 짙어졌고, 그 위로 건조한 겨울날의 햇살이 시신들의 얼굴에 흰빛을 덧씌웠다. 그들은 죽어서 투명했다.
또각.
무거운 말발굽 소리. 홀로 정연신과 악수림 위를 넘어간 군마녹림의 총채주가 말 머리를 반쯤 튼다.
그러고는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려 정연신을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천하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태백부왕 제강천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쩐지 미미하게 능청스러운 어조였다.
“당신은 모를 거요. 이만한 기마 군세를 꾸리는 데 얼마나 무시무시한 시간과 심력, 재물이 쓰이는지. 적어도 칼이 내뱉은 음률 한 소절에 으스러져선 안 되었소.”
그가 말했다.
실제로 이 순간 입황성 정문의 남쪽 전장은 몹시 고요했다.
“…….”
금전에 칼재주를 팔던 낭인들이 얼어붙은 것은 물론, 다수의 십삼천 고수들마저 뒤로 훌쩍 물러서더니 경악한 눈으로 인마의 시산혈해를 샅샅이 훑는다.
그중 일부만이 이곳저곳을 향해 억지로 몸을 날리며 전열을 다시 짤 뿐이었다.
반면에 본성 고수들은 제자리에서 숨을 고르거나 운기조식에 임했다.
마치 절대적인 무언가가 지척에서 호법이라도 서 주는 것처럼. 그들 중 누구 한 명도 성벽 위에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임무를 바삐 오간 탓에 섬예 정연신을 실제로 보지 못한 이들이 많은데도 그랬다.
위계에 대한 신뢰.
맹목적이란 말이 걸맞는다. 어릴 적부터 입황성에서 삶을 보낸 이들은 더욱 그렇다.
역대로 모든 자색이 본성 고수들의 기대를 뛰어넘어 왔다.
신천화, 마연적, 신벽, 용희명.
하나같이 강호 무림의 전설이다. 그처럼 노을은 양양에 피고 지는 기적의 빛깔이었다.
푸르르―
홀로 살아남은 군마녹림 총채주의 전투마가 낮게 투레질했다. 체온이 달아오를 만큼 달아오른 준마의 입에선 공포 때문인지 호승심 탓인지 모를 입김이 옅게 새어 나왔다.
두 눈이 무채색 안광으로 가득한 전투마의 시선은 정연신을 비스듬히 비껴갔다.
곧이어 총채주는 전투마 위에서 정연신을 물끄러미 살피다가, 이내 작게 웃어 보였다.
“정 공은 안목이 좋구려.”
“…….”
“그대가 쓰고 버린 그 도끼, 강선부(强琁斧)라고… 내 아들놈의 것이오. 그토록 귀하다는 현철이 섞여 있었지. 북방에서 제법 유명한 요족 야장의 작품이었소. 귀중한 장물이랄까.”
그의 말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우리네 무인들의 목숨처럼 허망하게 흩어졌지만, 제법 요긴하게 쓰인 듯하니… 그걸로 족할 거요.”
방금 정연신에게 명줄이 끊어진 이들 중 자식이 섞여 있었다는 의미. 하지만 마치 수하의 죽음을 입에 담은 것마냥 평이한 어조였다.
정연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아―
그의 입가에서 새하얀 김이 번져 나온다.
심법의 날숨이었다.
이 순간 정연신은 능법광륜기의 호흡을 들이켜고 내쉬며 백회혈을 식히고 있었다. 당연히 검가의 반동 탓이다.
이제는 완전히 방파대전의 결전병기가 된 수법. 위력을 높일수록 남발하기 힘들다.
특히나 방심한 이들도 아니고, 방금처럼 개세적인 수법으로 돌격해 들어오던 대방파 하나분의 전력을 사라지게 만든 뒤라면 더욱 그렇다.
총채주는 악위관천하를 함께 시전했던 수하들을 잃었고, 정연신은 그들을 일시에 몰살함으로써 크나큰 상단전의 부담을 떠안은 것이었다.
“정 공, 그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총채주가 빙그레 웃었다.
“사람 같지 않게 숨을 쉬는구려. 하긴, 몸의 윤곽부터 남다른 게… 엄밀히 보면 인간 흉내를 내고 있는 영물이 따로 없소. 이거 실제로 보니 아주 섬뜩한걸.”
정연신의 몸 상태와 약점 따위를 떠보는 듯한 언행.
방금 크나큰 상실을 겪은 자답지 않다. 천하 도처에 산적들이 깔려 있으니 언제든 수하를 벌충할 수 있다는 의미일까.
“너.”
정연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대는 입황성을 기마무공으로 뭉개버리고자 했던 적이다. 존대를 존대로 갚아줄 이유가 없었다.
“이쪽으로 완전히 돌아봐라.”
그가 얘기했다.
그 말에 곧장 반응한 건 총채주가 아니었다.
정연신의 등 뒤에서 제각각 도끼와 창을 내려 쥔 남녀 중년인이 눈을 부릅뜬 것이다. 검가에서 살아남은 초고수들이었다.
“언행을 똑바로 하시오.”
“제아무리 자색의 신분이라도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가 있소! 저분께선…!”
그들 두 사람의 품행은 마치 군문의 장수와 같았다.
당장 어조의 끝부분 음계가 조금쯤 아래로 떨어지는 건 북방 너머의 방언이 섞인 탓인데, 그럼에도 목소리에 실린 힘이 강렬해서 칼처럼 정제된 느낌이 묻어났다.
태생이 산적과는 다르다.
분명히 군마녹림을 개파한 사연이 깊을 텐데, 정연신은 짧게 중얼거리기만 했다.
“아랫것들이 입을 여는군.”
“아, 미안하오.”
총채주가 사과를 건네며 목례했다.
그는 준마와 함께 옆으로 비스듬히 돌아선 상태였다.
그 탓에 반대편 허리춤에 매달린 머리들의 뒤통수가 드문드문 보였지만, 정확한 이목구비를 식별할 수는 없었다.
후욱!
한편 영물에 가까운 듯한 전투마의 숨결이 불현듯 총채주의 날숨과 흰 연기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여느 대방파의 검진처럼 강력한 공력 파동이 양측의 기운을 북돋는 형태. 모종의 기마무공이 시전된 것이었다.
그 역시 정연신과 마찬가지로 출수를 준비하고 있다.
절세고수 된 눈으로 정연신의 상태를 헤아렸을 텐데도, 오히려 자신이 한림원의 학사마냥 이모저모 이야기를 풀며 시간을 끈다.
당연히 보통 비범한 일격이 아닐 것이다.
그사이에 사방에서 일부러 크게 터뜨린 듯한 육합전성이 울렸다.
[시작하라!] [어차피 자색은 저자뿐이다!] [우회! 해일권천께서 계신 곳으로 우회해! 우리가 연화나타보다 먼저 들어갈 수 있어!]수백이 죽었지만, 그럼에도 내공으로 호흡하는 자들이 정문 양쪽으로 펼쳐진 성벽에만 수백이 더 남아있다.
북방 전선의 붕괴가 없었다면 역적 지명과 함께 황군이 거병했을 일. 하지만 이 시점에선 본성에 남은 입황성 무인들이 온전히 감당해야 할 싸움이었다.
파라락! 쩌정!
입황성의 적은 몹시 많다.
정연신을 피하고자 빠르게 질주해 성벽을 넘어가는 자들. 곳곳에서 옷자락이 격하게 펄럭이고 발경의 충격파가 터져 나온다.
전장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신검단주 대리의 큰 패를 하나 확인한 참이다.
천하에서 손꼽히게 고강한 대방파의 고수들이 그 파훼 방안을 고안하지 않을 리 없다.
접근하지 않는다.
다른 십삼천주가 정연신을 막는 사이에 최대한 그를 피해서 움직인다.
압도적이라고 해도 ‘한 번’뿐인 출수로는 그들을 억누르지 못했다.
신검단주 대리가 종전의 광역 기예처럼 터무니없는 수법을 지닌 만큼, 입황성의 현판을 떨어뜨렸을 때 강호에 번질 파장 또한 몹시 클 터였다.
“그러고 보니, 악가는 연달아 횡액을 맞이했군.”
총채주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정연신의 곁에 선 악수림을 향해서였다.
“내가 알기론 전대 가주가 화산지약에서 실의를 겪고 폐관에 들면서, 당대 가주가 가문을 이어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주창절(珷柱槍絶) 악대경(岳大鯨) 말이오. 신창의 큰 조카라고 들었소. 맞나?”
“…….”
“애석한 일이오. 내 정중히 조의를 표하겠소.”
그러고는 정갈하게 두 손을 모아서 올려 보인다.
굉장히 공손한 공수(拱手)였는데, 활짝 펼친 손에 주먹만 덧대는 무림인들의 포권과 달리 고개마저 살짝 숙이는 모습이다. 흡사 서생과 같은 예법이었다.
총채주의 품행을 본 악수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정연신의 기억에 없던 모습이다. 그녀의 시야에서 정연신이 사라지고, 총채주 제강천만이 남은 게 분명했다.
“그에겐 죄가 없었소. 그저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것뿐이지.”
파앙!
순간 도끼를 훅 내린 그의 손짓에 먼지가 파도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극상의 삼화취정을 이룬 자답게 말을 내뱉으면서도 운기에 집중한 걸까. 어느샌가 제강천과 전투마의 몸선을 따라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출수의 전조였다.
그가 말했다.
“난세는 산사태처럼 모두에게 공평하오. 악인과 선인, 위정자와 양민, 그리고 무림 호족과 산적 나부랭이를 가리지 않고 밀려들지. 이 하잘것없는 산적 놈에겐 고고한 팔가주들의 머리가 필요했소.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이름을 떨쳐야 했거든.”
“덤비라고 했지.”
악수림이 낮게 뇌까렸지만, 이 순간 그녀는 강호에 널리 명성을 떨친 창수(槍手)가 아니라 적수공권의 맨손 무인이었다.
허리춤에 보조로 패용하고 다니는 단창이 무장의 전부.
앞서 정연신의 앞길을 뚫고자 창을 투척했던 까닭이다.
만전의 상태로도 감당하기 힘든 대적(大敵) 앞에서 살기를 드러낼 만한 상태가 아닌데, 이 순간 악수림은 등허리의 단창조차 꺼내지 않은 채 한 걸음 내디뎠다. 작은 얼굴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사락.
그녀의 새까만 소맷자락이 위태롭게 휘날릴 때.
화아아아악!
돌연 새하얀 빛줄기가 대기를 거칠게 가르며 정연신의 손을 스쳤고, 그대로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하더니 악수림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가 잡혔다.
앞서 그녀가 던진 장창이 정연신의 만천화후 흡자결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총채주가 악가를 입에 담은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시선이 정연신을 힐끗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총채주의 허리춤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대로 돌아보라고 했는데.”
정연신이 말했다. 어느새 그의 호흡은 고요하게 잦아든 상태였다.
총채주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내 아직 준비가 덜 끝났으니 조금만 기다려 줄 수는 없소? 원래 기마 돌격이란 게 이처럼 한번 멈추면 끝장인 경우가 많아서… 여하간 이 대계는 여령주가 몹시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이오. 기본적으로 장기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졌지. 여기서 우리와 손을 섞는 동안에도 그대의 적들은 끝없이 몰려들 거요. 아주 오랜 기간 입황성이 만들어 온 원수들이지.”
또각.
“그러니.”
총채주가 준마와 함께 천천히 돌아섰다. 그렇게 완전히 정연신의 정면을 바라보게 된 순간에도, 그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빨리 끝날 거라 생각지 마시오. 내 장담하건대, 이 싸움은 장맛비처럼 지겹도록 길어질 거요. 그간 입황성이 천하의 치안을 떠받쳐 오며 만들어낸 은원의 무게가 그렇소. 우리에겐 증원이 많고, 귀하의 증원은 그대 하나뿐이지 않소?”
정연신은 대꾸하지 않았다. 곧이어 악수림도 걸음을 우뚝 멈췄다.
총채주 제강천의 허리에 매인 얼굴들이, 그들에게도 몹시 익숙할 수밖에 없는 정문의 관도를 마침내 바라보게 됐다.
수려한 명족의 머리와 붕대에 감겨 이목구비를 확인하기 힘든 얼굴.
소연대주와 명류대주였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소. 당신, 입황성 자색은 두 사람을 탓해선 안 될 것이오.”
“우리가 그들을 애도하오.”
군마녹림의 남녀 초고수들이 뒤편에서 그렇게 말했다.
정연신과 악수림은 인마의 시체 더미를 한쪽에 두고, 앞뒤로 각각 총채주와 그 수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동시에.
[용― 희― 명―!]콰아아아앙!
양발을 땅과 격하게 마찰시키며 착지해 온 거구의 인영, 무룡회주 혁련풍월이 손아귀에 잡혀 있던 이들을 양옆으로 내던졌다.
쿠궁!
곧장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의족의 중년인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밀려 나갔고, 큰 키에 깡마른 검객 사내는 그대로 고랑을 만들며 땅바닥에 박혀 들었다.
각각 신검단 무극전주와 창천대주였다.
“정명…!”
퍼뜩 고개를 든 무극전주가 소연대주의 머리를 보곤 침음했다. 반면에 창천대주는 몸을 가누기 힘든 모습으로 즉각 일어서지 못했다.
달리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게, 목울대의 맥박이 굉장히 희미했다.
혁련풍월이 혀를 끌끌 차며 입을 열었다.
“무극대, 아니 이제 무극전이라 했나? 자넨 사람 잡아두는 데 일가견이 있군. 입황성에선 무극무맥이 섬예무맥과 쌍벽이라던데, 그것이 정말로 과언이 아닐 줄이야.”
“…….”
“아, 섬예. 오랜만이군. 아까는 참으로 놀라웠네. 날붙이로 그처럼 고절한 음공을 쓰다니? 내공 기예가 하늘에 닿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걸세. 다음번엔 나도 한번 쬐게 해 주게. 꽤나 짜릿할 것 같으니까. 여기선 자네가 용희명을 대신해야 하지 않겠나?”
잔잔한 수다였다.
그처럼 무룡회의 수장은 강호에 익히 알려진 광기를 평이하게 드러냈고, 별다른 선전포고도 없이 양양 땅에 천하 강호가 모였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입황성의 고수들 중 누구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혁련풍월은 입맛을 다셨다. 그들의 시선은 군마녹림 총채주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뭐, 문도나 동료가 죽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일세. 참으로 애달프지만, 무극(武極)을 이루는 길에 하찮은 인명이 무슨 필요인…!”
그는 말을 하다 말았다.
어느샌가 청년 자색의 눈동자에서 청백색 안광이 명멸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완전히 눈이 뒤집혔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지막한 진동 소리와 함께 위아래 좌우 대각선으로 빛살처럼 움직이는 눈동자. 섬뜩한 살기를 띤 눈짓을 따라 은은한 광채의 잔상이 남는다.
그렇게 무수한 생각의 단상들이 정연신의 눈에서 뇌리로 흘러 들어갔고, 찰나지간 그가 뒤로 뻗은 손아귀에선 반투명한 바람들이 구름처럼 뭉클거리며 후방을 점령했다.
만천화우(滿天花雨).
후웅!
정연신은 미친 듯이 외마디 구결들을 머릿속에서 섞었다. 이제 강호 견문은 충분하다 못해 지긋지긋했다.
이미 모든 것이 그의 심상에 있었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수법에 걸맞는 마음뿐이었다.
‘십전(十全). 외도(外道).’
우우우우우웅!!
도끼와 창, 도검을 비롯해 주인을 잃은 병장기들.
전장에 비석처럼 널브러져 있던 수백의 날붙이들이 둥실 떠오르며 흙가루를 떨어뜨린다.
언젠가 사천의 십전문주 만병제가 열여덟 병기술을 자랑할 때마냥 제각각의 방위가 미세하게 다른 모습으로, 혹은 천극문주가 발 구름 한 번으로 일으켰던 검의 운해와 같은 광경으로.
“…….”
당장 총채주 제강천과 그가 탄 전투마, 그리고 둘만 남은 군마녹림 초고수들의 눈에 똑같은 광경이 맺혔다.
“오늘.”
자색 장포의 청년이 무수한 병장기의 바다를 등진 채 무표정으로 입을 움직이는 모습. 그것은 지극한 살의의 또다른 얼굴이었다.
신검단주 대리가 말했다.
“강호는 죽는다.”
입황대전(入荒大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