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49
◈ 마경 (4)
* * *
역루성.
북방 요족이 지었다.
그들의 풍채마냥 거대한 외성과 내성을 주로 채우는 건 두 무리다. 북방의 괴물들과 남녘 도망자들. 크나큰 성곽의 안팎이 그들의 세상이었다.
그래서일까.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종종 큼직한 석벽과 몸을 부대끼는데, 그 마찰음이 유난스럽게 묵직했다.
말 그대로 온갖 종류의 기파가 대기를 내리누르고 있었던 까닭이다.
역루성을 보금자리로 삼아 칼 재주를 파는 한족 낭인들.
어떤 이유로든 씨족과 떳떳하게 어울리기 힘들어진 명족 무인들.
씨족 전체가 요족에게 흡수되어, 그 본래의 모습을 찾기 힘들어진 요동의 여진 무리.
몹시 강대했던 옛 원나라의 잔당들.
남녘에서 올라온 도망자들을 묵묵히 눈에 담았다가, 저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거나 그들 중 일부를 소리 없이 끌고 가는 북방 대지의 요족 강호인들.
그들 사이에서 비범한 자질을 갖고 태어난 기재들까지.
역루성은 차가운 용광로였다.
흉년의 겨울. 서늘한 북녘의 땅에 세워진 요새로, 강력한 씨족들이 난잡하게 섞여 있는 곳.
“이게 무슨…….”
“신왕! 신왕께서 어찌…!”
그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장소가 역루성의 내성이다.
압도적으로 크고 웅장할 수밖에 없다.
천장의 높이가 십여 장에 달하고, 넓은 휘장들이 장내의 기둥과 지붕 안쪽을 이어붙이며 어지럽게 늘어져 있다.
그 겉면에는 금(金)이니 대청(大淸)이니 하는 글귀들이 굵은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제각각 미미하게 세월의 흔적이 다른 모습으로.
그 모든 게 한자였다.
역루성주가 요족과 한족의 혼혈이며, 역루성이란 요새 자체가 남녘에서 도망쳐 온 이들을 전력으로 흡수하는 도시였던 까닭이다.
저마다 다른 전통과 풍습, 사고관이 이 장소에서만큼은 하나가 되어야 했다.
그처럼 온갖 씨족을 찍어 눌러야 하는 자의 거처.
그 바깥에선 안법의 달인이라 알려진 몇몇 고수들이 창 틈새로 내성 안쪽을 훔쳐보는 형편이었고.
이 순간 그들이 서찰을 써 내려가는 것과 별개로 장내에선 큰일이 거듭 벌어지고 있었다.
“…맥이 사라졌다.”
“죽었다. 왕께서 승하하셨다.”
투박한 말들이 울린다.
거구의 시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
차디찬 돌바닥에 누워 있는 그 시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풍채 역시 못해도 칠 척에 이르렀다.
요족 강호인들. 하나같이 철갑을 이어 붙인 듯한 몸태를 지녔음은 물론이다.
그때였다.
정확하게 세 계단 위에서 바닥을 깔아보고 있는 태사의.
“아직도 그자가 왕으로 보이나?”
은가면을 쓴 이방인이 방석마냥 깔린 호랑이 가죽에 대충 앉은 채 묻는다. 두꺼운 피풍의를 두르고 있어 몸태가 정확히 보이지 않는 행색으로.
정연신이었다.
뚝, 뚝.
그의 양팔을 타고 을씨년스럽게 떨어지는 핏방울.
쥐다 만 주먹의 손 마디마디마다 살갗이 뭉개져 있고, 소맷자락과 팔걸이 사이에는 핏물이 눅진하게 고여서 질척거리는 와중이었다.
“…….”
요족 강호인들이 입을 다문다.
그중 누구도 정연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무시가 아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다.
그저 정연신에게 몸을 돌리길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타고나길 여느 명족보다 본능적으로 곤두선 기감 탓에.
사아아―
한편 정연신의 옷자락 겉면에선 하얀 연기마저 아른아른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은 시신으로 누워 있는 염열신왕이 그에게 꽂아 넣은 열기였다.
그 모든 광경이 이 순간 태사의에 앉아있는 정연신의 신형을 압도적인 무언가로 만들었다.
당장 자신보다 거대한 씨족의 강호인들을 굽어보는 품행이 자연스럽게 보일 만큼.
“이제는.”
은가면을 쓴 그가 말했다.
“내가 역루성주고, 이 땅의 왕이다.”
양팔의 옷자락을 검붉게 물들인 모습으로 내뱉은 이야기였다. 순간 장내의 적막이 짙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다.
염열신왕을 죽이고 태사의에 앉은 그의 언행과 몸가짐이 북방 대지에 몹시 어울렸기에.
신분마저 무(武)에 의해 정해지는 땅은 이러했다.
멀찍이 물러서 있던 거적때기 비단옷의 사내, 북녘의 문지기도 입을 다물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양친 중 한쪽이 요족인가…?’
그가 의문할 때.
정연신은 죽은 염열신왕 쪽에 모인 이들 중 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전대 역루성주로군.”
“…….”
“네가 모시던 왕이 죽었고, 내가 새로운 북왕의 좌(座)에 앉고자 한다. 탐탁지 않으면 지금 말하라.”
본래 역루성주였던 자.
유난히 키가 큰 사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일그러져 있던 얼굴을 더욱 구기기만 했다.
끝내.
그는 달려들지 않았다.
메마른 바람의 뭉치가 웅웅거리며 거대한 창틀을 연신 때린다. 오직 그 소리만이 장내에 선명했다.
* * *
어찌 되었든 일이 좋은 쪽으로 잘 풀렸다. 정연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행이지.’
역루성 내성.
굉장히 많은 이들이 드나들지만, 그럼에도 이 도시에서 가장 존귀한 대전(大殿)을 내려다본다.
“…….”
태사의 아래로 펼쳐진 공간의 넓이 자체가 호화롭다. 무엇이든 큼지막했다. 정말로 임금이 신하들을 데리고 정무를 보는 내실인 것처럼.
‘북왕. 왕이란 이름이 붙을 만했어.’
이 순간 정연신은 모든 생각을 은가면 속으로 숨기고 있었다. 양팔이 불살라지는 듯한 통증을 참으면서.
호신강기 천단광갑을 두른 열양진기(熱陽眞氣)의 북방 절세고수에게 이긴 여파였다.
북왕 중 염열신왕이라 했던 자.
―명족 관리를 죽이고 왔다지? 가면을 벗고 내 심복이 되어라.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거든 네 스스로 강자임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녀를 알현한 정연신이 대뜸 듣게 된 말로, 몹시 터무니없었다.
입황성 신검단주는 마을 촌로에게 고개를 숙일지언정 다른 이의 수하 따위가 되어선 안 된다. 아무리 암행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추후에 그런 행적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그때는 입황성 전체의 위신이 깎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용희명과 정연신은 그런 존재였다.
천하에서 가장 존엄한 신검. 당장 가면을 썼다고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증명해 보지.
정연신은 격한 접전 끝에 그녀를 적수공권으로 때려 죽였다.
말 그대로 맨손이었고, 이제 천하 강호에 익히 알려져 있는 연화나타 섬예의 기예는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 입은 상처의 값으로는 아주 넉넉하다고 할 것이다.
당장 그녀의 수하였던 자들이 지금 정연신의 눈짓을 따라 장내를 치우고 있으니까.
―잘…된 거죠? 수틀리면 제 손이라도 보태려고 했는데. 맞아, 손! 손 안 아프세요? 지금 금창약을 바르면 모양새가 안 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많이 아프면 꼭 말하셔야 해요.
신소빈의 전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지금 그녀는 정연신이 앉은 태사의의 바로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정연신은 그 자리에서 정색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밀리면 달아나야지.
―어, 싫은데요? 저도 체면이 있어요.
―이래서 애는….
―저희 동년배인 건 아시죠? 전부터 대주님의 생각이 궁금했는데.
정연신은 다짐했다. 신소빈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이지 않도록 단단히 약조해 두기로.
대도독 전우립이 말하길, 북왕은 모두 절세고수라 했다.
명나라의 황실 고수와 군부가 모조리 장성을 틀어막고 있었던 이유.
남녘으로 치면 궁명왕 같은 번왕이나 십삼천주, 혹은 구대문파의 장문인에 비견되는 존재들이다.
투신 역시 그들 탓에 북방을 일통하지 못했다. 일부는 그를 따랐으나, 또 일부는 그에게 반기를 들었기에.
그래서 정연신은 다소 무리해서라도 그들 틈에 섞여 들어야 했다.
다행히 북방 강호는 한족과 명족 도망자들마저 흡수해 가면서 그 땅의 무(武)를 부풀리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실로 어려웠다.
위신을 지키면서 북녘에 섞여 드는 일도.
적수공권으로 북왕과 같은 괴물을 상대하는 것도.
그럼에도 정연신은 진정한 신분을 숨겨야 한다. 적어도 본성의 동료들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북궁 선배랑 위지 선배는 무사히 풀려나셨을까.’
당장 답이 나오지 않을 일을 생각해 보는 사이.
핏물이 닦였고, 시체가 사라졌다.
정연신은 그 시간을 묵묵히 지배하면서 자연스럽게 역루성의 우두머리로 화했다. 정당한 생사결의 결과에 반기를 드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북방은 이런 땅이었다.
―저 성에 붙은 역루(役褸)란 이름은 너희 땅의 인간들을 하찮게 부리는 우리 씨족의 턱짓을 뜻한다.
북도가 했던 말.
정연신은 이제 야율이란 이름으로 그 선두에 있어야 한다. 물론 북도의 말대로 행세할 마음은 없었다.
북방의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신분을 얻었으니, 이곳 북녘 대지에서 나름대로 크게 움직이며 내부 붕괴를 꾀해 봐도 될 터였다.
다른 북왕 세력이 그의 신분을 들춰내지 못하도록 조심하면서.
‘그보다 당장은…….’
염열신왕을 상대하며 느낀 미진함에 신경이 쏠렸다.
최초에 그는 검을 쓰고자 했다.
첫째로 검법과 환강이 아니면 염열신왕을 상대하기 쉽지 않겠다는 직감이 있었고, 둘째로는 태염룡 같은 열양공의 무인을 대강으로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짧은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새삼스럽게 다시 인식한 뒤에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환강이 빠진 권각법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검단이 이 땅으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정연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비단옷의 거지꼴 사내, 북녘 문지기를 향해서였다.
“너희들의 호신강기.”
“어, 음…?”
무심코 반문하는 사내.
그는 정연신을 호천성주 마마광멸도에게 인계했다가, 자신이 통과시킨 빈객이 염열신왕과 싸우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성으로 온 참이었다.
정연신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천단광갑은 너희가 익힌 기공에 따라 다른 공능을 발휘하는 건가? 네 호신강기와 염열신시(炎熱神尸)의 수법이 달랐어. 그녀의 것은 호신강기라 하기 힘들 만큼 공격적이었다.”
북왕을 왕이라 부르기 저어되었던 탓에 시체로 칭했는데, 제법 입에 감겼다.
무수히 많은 무당제자들을 비롯해 온갖 남녘의 무인을 몰살시킨 절대자들. 장차 왕(王)이란 이들의 호칭을 모두 시(尸)로 바꿀 수 있다면, 선제 현공진인처럼 슬픈 스승들도 줄어들지 않을까.
스윽.
그는 한쪽 팔을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강맹한 열기가 내가중수법으로 침투한 상태였다. 당가 남매가 두드려 준 호신강기, 진여휘성천이 투명하게 휘감겨 있음에도 이 모양이다. 살갗의 미세한 결마다 통증이 저며오고 있었다.
한편 문지기 사내는 황망해진 것 같았다.
“…차라리 구결을 알려달라고 하지 그러오?”
“그건 경우가 없는 자들이나 저지를 일이다. 나는 무력으로 횡포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야.”
순간 정연신은 곁에 선 신소빈의 작은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기척을 느꼈다. 이유는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사이에 잠시 침묵한 북녘 문지기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이 맞소. 천단광갑은 내공심법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무공이오. 어떤 무공을 익히든 치명적인 형(形)으로 가시를 세워주니, 가히 천하제일의 전장 무공이라 할 수 있소.”
“투신이 창안했다고?”
“그가 아니면 누구겠소? 그토록 싸움에 신들린 자는 고금을 통틀어 한 명뿐이오. 강호를 넘어 나라마저 건국할 그릇이지.”
이렇게 하나씩.
북방 무공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그 모든 것들이 투신의 흔적인 듯했다.
“보통의 권각법으로는 힘들겠군. 만약에라도 연전을 이어가게 된다면.”
낮게 뇌까리는 정연신.
문지기 사내가 얼굴 가득 놀란 빛을 지우고 빙그레 웃는다. 출신 성분이 어찌 되는지 몰라도, 혼백 자체가 굉장히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옳은 생각이오. 당장 이곳 내성의 강호인들은 당신과 염열신왕의 싸움으로 당신을 인정했지만, 뭇 북왕들은 당신을 달리 볼 거요. 당장 인근의 치극왕과 용음사사왕이 접견을 청해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도 모르고.”
“그래서 말인데.”
“……?”
“이제 역루성의 전력은 내 것인가?”
북왕 야율.
요족들의 풍습을 파고들어 스스로 왕이 된 자의 물음이었다.
그 순간.
문지기는 어째서인지 적극적인 태도로 그렇노라고 대답했고, 곧장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방금 내가 한 말은, 정치를 잘해야 한다는 뜻이오. 언변과 몸가짐으로 하는 외줄 타기 말이외다. 역루성의 전력을 운용하는 것도 그렇소. 내 당신을 보아하니 검성이나 낭성 같은 독보강호의 절세무인 같은데, 그렇다면 군주로서의 경험이 일천할 것 같소만…….”
“잘할 거다.”
정연신은 단언했다.
신검단주 대리라면 몰라도, 북왕 야율에겐 큰 책임이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