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48
◈ 마경 (3
)
정연신은 웃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속에 작은 의구심을 품은 채였다.
‘천극문주?’
넓은 저잣거리에 좌우로 늘어선 좌판들. 그 틈새에 섞여 있던 삿갓의 외팔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인다.
평범한 체구였다.
당연히 요족이 아니다.
동시에 천극문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 몰골이 압도적인 검객의 몸태와는 거리가 멀었던 까닭이다.
요족을 흉내 내는 것마냥 깊이 쓴 삿갓에, 북방 전선에 걸맞은 행색. 애초에 몸이 온전한 자가 많지 않은 곳이다.
강호인이라면 ‘천극’이란 말에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저 어떤 이유로든 남녘을 등진 중원인이었을 뿐.
칼 한 자루로 천하를 논하는 외도제일검이 아니었다.
“…….”
정연신은 눈매의 힘을 풀었다.
과민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천하오검처럼 강대한 무력이 북녘까지 올라와 있다면, 정연신조차 대(對)북방 임무를 재고해야 하니까.
게다가 당장은 혈혈단신에 가까운 상황이니, 팔방을 경계하는 게 맞았다.
‘북왕들은 물론 명교와 빙궁도 언급됐어. 여기에 오검(五劍)까지 들어오면 그게 마경이야.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땅이 되겠지.’
천하오검 신검단주 대리는 옆을 힐끗했다.
“괜히 놀랐네요.”
신소빈이 십년감수했다는 듯 그녀의 명치 어림에 손을 올린다. 사락 하고 옷자락을 덮는 손길에 점혈의 묘리가 실려 있다.
혈류와 진기의 요동을 마음대로 억제시킨 것인데, 그녀의 매 순간이 정가동공임을 방증했다.
거적때기 비단옷을 걸친 사내, 문지기 초고수가 피식 웃었다.
“그쪽은 외도제일검과 은원이 있나 보군.”
“제 사문이 그자한테 원한을 품었거든요. 저만 이런 게 아니에요.”
신소빈의 음성은 얼어붙은 나뭇잎처럼 스산했다. 정가동공을 익힌 이후 감정의 오르내림이 커진 느낌.
‘내 근골이 문제인가…?’
정연신은 스스로 의문했다.
심신, 즉 몸과 마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소림과 무당의 정종무공이나 여타 마공(魔功)만 봐도 그랬다.
동시에 그는 문득 칠사도를 떠올렸다.
정가동공의 구결이 없음에도 어느샌가 자신과 유사한 느낌으로 근골이 바뀌어 있던 여인. 당연히 광기로는 그녀가 으뜸이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타고난 성품 탓인지, 정연신과 비슷해진 사지 근맥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준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만약 후자라면 신검단 광예결의 무인들을 전술적으로 운용할 때 고려해 둘 필요가 있다.
정가동공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라 해도 무공에 걸맞게 몸이 변하기 마련이니까.
‘우회가 없는 동선. 한 번에 승부를 보는 일직선의 경공 질주로 적들을 덮쳐야….’
정연신이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문지기 초고수는 그와 신소빈에게 역루성에서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마치 경공을 쓴 것마냥 성미가 급한 걸음걸이와 함께였다.
“이 북녘은 모든 것이 달라. 아래쪽 강호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말일세. 자네들이 올라온 곳, 귀쟁이들에게 빼앗긴 남쪽은 배분부터 땅 기운까지 모든 게 어그러졌음에도 황실 주씨들이 가장 존귀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네.”
그는 두 사람이 별다른 기파도 없이 자신을 따라붙자 흡족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걸음걸이도 강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면서.
“이 땅의 질서는 힘에서 비롯되지. 강호와 나랏일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누군가의 존귀함이 태생으로 결정되지도 않는다는 뜻일세.”
“잘 적응하신 것 같네요.”
신소빈이 담담하게 내뱉는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했다.
“요족들은 천하 모든 씨족의 예법과 전통을 존중하고, 스스로 의형제라 여긴 이에겐 천단광갑 같은 신공비기를 거리낌 없이 베풀지. 이처럼 동등한 조건에서 조금이라도 더 고강한 자가 윗사람이 된다네. 바로 나처럼.”
“…신분을 여쭤도 될까요?”
신소빈의 물음에 사내의 입가 양옆에 팔자로 낀 주름이 짙어졌다.
“북녘땅의 문지기.”
그가 말했다.
“나는 투신과 이야기를 나눴고, 그와 같은 군영에서 잠을 잤으며, 끝내 그 존엄한 존재에게 천단광갑과 흘황십결(屹潢十結)을 배웠네. 이 땅의 무수한 요족들이 그렇듯, 나 역시 그의 제자라 할 수 있지.”
본래도 큰 신소빈의 눈이 동그랗게 넓어진다. 정연신 역시 처음으로 그를 온전히 두 눈에 담았다.
신소빈이 불쑥 물었다.
“지금 투신을 직접 겪어봤다는 거죠?”
“물론이지. 그는 어디에나 있었네. 지금은 종적이 묘연하여 온 천하가 비어버린 느낌을 주고 있지만….”
잠시 말끝을 흐린 사내가 얘기했다.
“여하간 장차 마주할 상대보다 자네들이 더 고강하다면, 따로 품행을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이곳은 명족 나부랭이들이 말려버린 땅과 달리 무(武)가 곧 신분이고 예법이니. 참으로 명쾌하지 않은가?”
“여기도 만만찮게 건조해 보이는데.”
신소빈이 발 앞코로 땅을 툭툭 건드려 보이며 말했다.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본래도 척박했던 땅이 더 메말라 있는 형편이지. 하지만….”
그가 무미건조한 눈으로 정연신, 신소빈과 연이어 시선을 맞췄다. 그들을 합한 것만큼 긴 세월이 깃든 눈길.
“그거야 남녘의 발 달린 나무, 천하목 때문이고.”
“…….”
“아, 물론.”
어느새 흙이 아니라 벽돌담으로 쌓은 성벽이 흐릿하게 비치는 시점이었다.
흙먼지 속에서 거대하게 일렁이는 윤곽. 인근에서 유난히 짙은 기운들은 모조리 그 안에서 불꽃마냥 요동치고 있었다. 역루성의 내성이 가까워진 것이다.
그 가운데 사내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자유롭지만, 한 가지는 조심해야 해. 북방은 강호와 군문이 합일된 곳이니만큼, 존중과 별개로 경계가 없지는 않네. 혹시라도 자네들 중 하나가 나조차 감당키 힘든 강자라면…….”
불현듯 사내의 말이 느릿해졌다.
“북왕(北王)이 현현하겠지. 하나든 둘이든.”
“많이 강한가?”
정연신은 조용히 물었다. 곧장 우스운 말을 들은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는 사내.
“그야 당연하지! 투신도 이 땅을 일통하진 못했고, 그 이유는 끝내 진영에 합류하지 않은 몇 북왕들에게 있네.”
한편 신소빈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북방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두고 싶은 눈치였다.
“전부 무공 군세를 이끄는 절세고수라던데… 맞나요?”
“그렇네. 무리를 지어서 함께 치고 빠지는 절세고수들은 천재지변마냥 결코 손에 잡히지 않아. 골치 중에서도 골치였지. 아…!”
사내가 손뼉을 쳤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역루성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인물은 염열신왕(炎熱神王)이란 괴물일세. 그녀뿐만이 아니야. 인근의 군영에 두 북왕이 더 당도해 있지.”
신소빈이 작게 흠칫한다.
“세 명이나…?”
“이 천박한 역루성이 근래에 조용해진 이유일세. 북왕이 셋이면 그곳이 북녘의 지옥이거든.”
저벅.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자신은 여기까지라는 듯이.
“나머지는 호천성주 마마광멸도가 안내해 줄 걸세. 자네들이 북새풍에 스러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정연신의 이기어검을 받아내고 살아남은 마마광멸도.
지키던 요새를 잃은 자.
만약에라도 정연신을 알아보고, 북왕들을 부른다면 어찌 될까.
순간 신소빈의 목이 마른침으로 작게 움직였고, 정연신은 용희명이 만들어낸 전설 같은 일화들 중 하나를 떠올렸다.
무룡회주와 암야전주의 합공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였다는.
그들 둘은 모두 남녘에서 이름난 절세고수였다.
그중 암야전주와 손을 섞어본 정연신이지만, 당시에 상대한 암야전주와 남궁제일검은 수십 일 밤낮으로 용희명에게 기력을 쏟아낸 상태였다.
그들이 신검단주 격살의 천라지망에서 주축을 맡고 있었던 까닭이다. 심지어 정연신은 그때 진명조의 도움으로 암야전주의 목을 벴다.
물론 당시의 용희명보다 지금의 용희명이 더 고강하고, 정연신 또한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력이 온전한 남궁차하검과 암야전주, 또 그들과 동격인 자를 동시에 상대하는 격이라면…….’
남화광태극을 펼쳤을 때 몇 명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스윽.
정연신은 긴장으로 어깨가 굳은 신소빈의 목덜미를 추궁과혈(推宮過穴)로 주무르며 생각했다. 이런 땅에 걸맞은 처신과 임기응변이 필요하겠다고.
그는 나지막하게 전음을 보냈다.
―소빈아, 요족들이 어떻게 도발하건 일단은 참아야 해. 네 기파에 입황신가의 무공이 섞여 있는 만큼 알아보는 놈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조금 힘들더라도 군자처럼 행세하자.
정연신은 수제자와 함께 마경으로 발을 디뎠다. 여전히 차갑고 메마른 북새풍을 살갗으로 느끼면서.
‘당분간 자중해야겠지.’
당장 맞닥뜨린 북방 강호.
번잡스러운 난세에 끝을 고하는 임무다.
지원이 필요했다.
언젠가 천라지망의 용희명에게 당도한 정연신처럼, 정연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 터였다. 안정적으로 모든 무공을 펼치게 만들어 줄 인물이.
* * *
[제이궁주(第二宮主) 친전.본궁 대궁주(大宮主)의 황보 씨족 첩실에 대한 보고.
一. 빈객일 때부터 광오한 성정을 드러내고 다녔으나, 오히려 그 같은 성품과 용모가 대궁주의 눈에 띄어 첩실로서 입궁.
二. 가깝게 지내는 자가 전무. 사적으로 친밀한 인물이 없으며, 내궁에 술을 공급하는 주상(酒商:술장수) 정도만 궁 바깥에서 한 번씩 말을 붙이는 형편.
三. 본궁의 시비 중 미색이 뛰어난 이들을 붙여 보았으나, 아부용(阿芙蓉:양귀비)에 취해 돌아오는 사건이 거듭 발생. 결과적으로 대궁주의 총애가 두터워진 탓에 일을 중단.
四. 만약의 경우를 상정, 마찬가지로 비범한 미색을 지닌 남아들이 입궁.
五. 당일 내궁의 연무장에 머리부터 거꾸로 박힌 전원을 발견. 해당 남아들에게 제삼궁주(第三宮主)가 보냈다 말하도록 조치해 두었으나, 그날 제이궁주전에 마광익 태염룡의 이름으로 서신이 도착. 글귀 대신 토사물이 묻어 있어 폐기.
六. 모호한 무위. 머릿속에 세 송이의 꽃이 피었는지 불명. 정확히 알아봐야 할 필요성을 인식.] [제이궁주(第二宮主) 친전.
본궁 대궁주(大宮主)의 제일부군에 대한 보고.
一. 도발이 몹시 잘 통하는 성품. 제이궁주전과 제삼궁주전의 검은 이리들이 싸움을 걸었고, 제일부군에게 연이어 패배. 세 송이 꽃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으나, 그와 같은 영역의 무위를 확인.
二. 대궁주의 회임(懷妊:임신) 이후 제삼궁주 측이 제이궁주전으로 연통. 같은 의견. 강력한 견제의 필요성을 인식.
三. 결함을 발견. 입황성을 화제로 둔 이야기에 민감한 응대. 대궁주의 아기씨에도 같은 반응을 보일지 확인해 볼 것.
四. 투신 휘하 염열신왕의 사자가 본궁을 방문. 해당 회합에 제일부군이 대궁주와 동석. 명나라 장성과 마주보는 호천성 및 막대한 양의 미곡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남하를 결정.
五. 모든 빙궁인이 입황성 출신의 제일부군을 주시 중. 배반의 기미가 보이는 즉시 참살해도 무방.
六. 먼저 역루성으로 내려가겠다는 명교의 연통. 제이궁주전의 안법 고수들이 제일부군의 동요를 확인. 눈동자가 미세하게 진동.
七. 대궁주전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 본래도 무위가 모호했으나, 지금에 이르러 어떤 경지를 초월했음이 확실시되는 형편. 어찌 된 연유인지는 확인 불가.
八. 대궁주와 함께 남쪽으로 출정.]
* * *
[지급(至急:매우 급함).대북해빙궁의 제이궁주께 고합니다.
호천성은 붕괴되었으며, 지금 역루성과 그 인근에 머물고 있는 대전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염열신왕.
치극왕(恥極王).
용음사사왕(龍音娑娑王).
명교주 소천무적.]
* * *
[지급으로 별첨.―역루성. 절세검객 출현.
―북녘 문지기의 보증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
―근접 박투술로 염열신왕 격살. 해당 요새로 진입 시 후폭풍을 경계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