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81
◈ 맹화 (5)
* * *
남제(南帝).
가장 높은 방위에서 눈길을 아래로 내리깐 자. 늘 남쪽을 바라보기에 남제였다.
북방제일인에게는 격조가 있었다.
씨족이 씨족을 잡아먹으면서 배 채우는 광경이 몹시도 역겨웠다.
요족(妖族). 요사스러운 야만의 씨족. 남방인들이 붙인 말. 하지만 정작 북방 강호인들은 그 같은 멸칭을 자랑으로 여겼다. 두려움을 방증하는 말이라면서.
남제에게 와닿길, 그의 격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풍토였다. 타고난 지배자에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차라리 꺼슬꺼슬한 멧돼지 가죽이라도 씹어먹는 편이 나을 것인데. 내공으로 소화시키면 못 먹을 것이 없지 않은가.
그는 과거 씨족의 동료들에게 ‘쇠로 두드린 멧돼지 가죽’이라고 불렸다. 달리 애신각라(愛新覺羅) 노이합적(努爾哈赤).
풍족한 땅을 바랐다.
흉년으로 모든 대지가 녹슨다지만, 원래부터 메말라 있던 북방과 명족들이 터 잡은 명나라는 달랐다. 더욱이 천하 흉년의 원인마저 명나라에 있었다.
항상.
늘 남방(南方)을 내려다볼 수밖에.
스스로 싸움 신의 오른팔이 된 이유였다.
후욱!
이 순간 그는 황야에서 거대한 인마 한 쌍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천하 북도의 압도적인 기세도 남제의 자연체(自然體)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자연체.
키가 큰 인영이 평온하게 서 있는 모습.
하지만 북방 요족들에게 전설로 알려져 내려오는 무공 경지다. 지극한 자연스러움으로 우두커니 선 자세였다.
공능이 있다.
초식을 펼침에 있어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술법무공의 영역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씨족의 대의를 생각하다 크게 깨달아서 얻은 심득으로, 북방제일인의 발아래가 곧 지옥이란 말이 나온 이유다.
이 같은 풍문은 근래에 이르러 북방 강호의 격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원영신으로 자연체를 펼칠 수는 없다. 극강의 의념이 온몸을 둘러친 상태인 탓.
즉, 지금 현현한 남제는 본신이었다.
북도 역시 그것을 안다.
그는 아득히 높은 전투마 위에서 남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야율을 파군으로 봉(封)했다. 그는 이제 육원성군이니, 네가 죽이게 둘 수 없다.]웅웅거리는 북도의 이야기를, 남제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헛소리다.”
그 말에 남제가 조용히 물었다.
“용맹한 풍습? 굶주림에 죽어가는 씨족의 어디가 용맹한가?”
[씨족의 얼은 언제나 담대하고 사나웠다. 하지만 싸움 신은 훗날 명나라란 용광로를 취하여, 거기에 우리의 고귀한 정신을 들이부어서 녹여버릴 심산이다. 용납할 수 없다.]“대화가 제자리걸음이니 질린다. 어차피 네게 가능한 일은 그것뿐이다. 시신들의 탑처럼 서 있는 것.”
남제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남녘 강호의 여령을 쥐도 새도 모르게 복속시키고, 조카를 여령주로 앉히고, 그렇게 어둠 속에서 손가락 하나만으로 명나라 강호의 태반을 무너뜨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필요에 의해 북왕 중 하나로 받아들여진 명교주가 싸움 신을 재림시키면, 남제는 기꺼이 북방제일인이란 이름을 버릴 심산이었다.
그리고 투신의 가장 강력한 병장기로서 장성을 무너뜨리리라.
그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이제 됐다. 시간 낭비는 여기까지다.”
후욱!
문득 새까만 안개가 일어나 남제의 몸을 빈틈없이 둘러친다. 그 서슬에 인근의 햇빛이 반대 방향으로 휘우뚱 구부러졌다.
혹정(惑情).
북방제일인의 천단광갑.
호신강기를 크게 일으킨 것만으로도 섭리가 일그러진 것이다. 더는 대치 상태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남족에서 무신(武神)의 묘목이 올라왔다. 북왕 야율은 그런 자다. 찢어서 죽여 두어야 해.”
[안 된다.]북도는 완고했다. 순간 남제의 음성이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당장은 야율을 도모하지 않겠다. 하지만 너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전장의 균형이 무너졌음을.”
[아직은 모를 일이다.]“야율은 우리처럼 무수한 싸움을 건너 온 자다. 이대로면 싸움 신이 아니라 우리 땅을 죽일지도 모른다.”
[…….]“너도 폐허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네 뜻이 싸움 신을 떠났다 해도, 씨족은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의 허여멀건 입김이 어둠 속을 유영하는 뱀처럼 일렁인다. 어떤 수단으로든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음에도 남제가 굳이 북도와 마주하고 있었던 이유.
회유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강자에게 호의적인 북도의 성품을 안다.
이처럼 오랜 대치로 서로의 힘을 다시금 자각시키고, 함께 공통된 목적을 인지한다. 그리하여 마경 일통(一統)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일은 중요하지 않다.
북도의 거취야말로 마경에게 큰일이니까.
[그 말은.]반응이 있었다. 강대하게 웅웅거리던 음성이 동굴의 미풍마냥 내리깔린 것이다.
[옳다.]순간 북도의 전투마가 투레질했고, 그 거친 입김은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허공으로 크게 번져 올라갔다.
“옛 동무여, 그걸로 족하다.”
남제가 웃었다.
“이제 가자. 씨족의 위협을 돌아볼 시간이다.”
다음 순간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우웅―
남제의 시야가 끝없이 넓어지며 광활한 평야를 두루 살피는 한편, 동시에 그의 몸은 청광평을 고요하게 가로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망랑안(望狼眼).
독문 안법이다. 싸움 신의 가장 치명적인 병장기로서, 스스로 모든 전장을 조망하기 위해 창안했다.
공능은 하나뿐이다.
시야가 뚫려 있다면, 그 거리가 지평선에 이른다 해도 바로 눈앞에 있는 것마냥 급격히 확대시킨다. 평야를 가로지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야전(野戰)에 절대적인 신공 안법. 한때 건릉제가 그의 눈을 경계하여 따로 내공의 안개를 일으키는 전쟁 무공이 창안된 바 있다.
‘허나 황제 건릉은 싸움 신에게 죽임당했다.’
이제 남제의 망랑안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이 순간 한없이 확대된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웬 여인이었다.
순간 남제의 몸을 둘러싼 칠흑의 구름이 웃는 것마냥 미미하게 일렁였다.
새빨간 장포를 걸친 묘령의 여자.
분명히 야율보다 작은 체구인데, 어째서인지 야율이 보인다. 축골공(縮骨功)을 한계까지 연성하기라도 한 걸까. 근골의 태가 놀랍도록 유사했다.
양옆으로 곧게 뻗어 있다가, 위쪽 팔뚝에 이르러 실로 입체적인 곡선을 그리는 어깨. 또 명문혈(命門穴)을 둘러싼 경맥이 매끄럽게 질주할 수 있도록 잘 휘어진 등허리.
그밖에 얼핏 미미한 듯해도 내가고수(內家高手)들에게는 완전무결해 보이는 몸 선들…….
앞서 남제의 원영신이 야율왕을 처음 보았을 때, 무인으로서 아름답다고 느낀 몸태 그대로였다.
‘야율, 또 야율이구나. 네가 바로 남녘 강호다.’
주저 없이 휘풍령의 소리동굴을 연다.
―모일 때다. 낯선 것들을 죽여라.
광활한 전음공간에 낮게 울려 퍼지는 속삭임.
남제의 음성은 그의 강대한 수하들과 이어진 휘풍령은 물론, 북왕들이 모인 휘풍령으로도 펴져 나갔다. 당장 야율이 들을 텐데도 개의치 않은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내 나담(НААДАМ: 축제)이다.
한편 붉은 여인의 어깨 너머로 평야를 벗어나고 있는 염정과 문곡이 비쳤다. 저마다 격전을 치른 몰골.
남제는 천 리를 넘나드는 전음으로 물었다.
―염정, 문곡. 도망치는 것이냐.
곧장 두 사람의 대답이 돌아왔다.
―닥쳐라!
―예, 패퇴당했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황야를 스쳤고, 남제의 전음은 문곡에게만 이어졌다.
―패퇴당했다?
―터무니없이 강하더군요. 저렇게 개성이 제각각인 이들을 하나의 무맥으로 일통한 걸 보면, 아무래도 당대 신검단주는 괴물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탈하는 것인가?
―두고 보겠습니다. 원래는 해빙산 쪽으로 돌아가서 신투를 살필 심산이었지만… 쫓아오는 이들의 서슬이 매섭습니다. 묵자(墨子)에서 이르길, 쉼이야말로 만사의 시작이라 했는데.
거기까지였다.
두 절대자의 퇴각은 남제에게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했지만, 그는 그쪽으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붉은 여인과 함께 여덟이나 되는 입황성 종자들이 두 육원성군을 추격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퇴각을 마음먹은 육원성군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천하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붙들어놓을 수 있었던 남녘 강호인, 개방주 주광신개의 영락으로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다.
대전사(代戰士)가 아니라 대전사(大戰士)였던 인물.
그 늙은 대전사의 질주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나오지 않는 한, 이제 북방 여섯 별의 경공 기동이 타의로 멈추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펄럭―
이 순간 남제는 아득한 상공에서부터 문곡군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온몸에 두른 먹구름을 황족의 예장(禮裝)마냥 휘날리면서였다.
청광평의 마지막 싸움이 이어지는 곳.
가장 소란스러운 장소다.
쿠구구구궁!
육원성군 문곡의 아들, 거대한 흑마에 탄 무심령주(無心囹主)가 기마 군세와 함께 평야를 뒤집어엎고 있다. 전장에서 가장 풍채가 좋은 사내였다.
그들과 맞붙은 것은 무지갯빛 냉기를 전신에 두른 백수십의 고수들이었다.
북해빙궁. 새외의 왕실.
본래는 명교주 서천명왕을 지원하기로 했다가, 무슨 까닭인지 야율에게 붙은 변절자들이다.
이 순간 얼어붙은 양귀비를 연신 씹어대는 청년과 함께였다.
그 사내.
남제의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인물이다.
가장 돋보인다.
눈 밑으로 옅지만 나른하게 자리 잡은 그늘과 달리 몹시 화려한 무공.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순간 손끝에서 대기를 짙게 일그러뜨리며 회오리치는 열양의 힘은 물론, 기마 군세를 교묘하게 이끌어내면서 틈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문제다.
빙궁의 강자들이 그 빈 공간으로 파고들면서 냉기 맺힌 손을 떨치자 낙마하는 요족 무인들이 속출했다.
말발굽들 속에서 포말처럼 거센 파문을 터뜨리는 서릿발. 쩌저적― 하고 모랫바닥 겉면이 허옇게 얼어붙었음은 물론이다.
‘황보세가의 태염룡.’
타고난 변절자. 경멸받아야 마땅한 애송이.
하지만 인마(人馬)의 파도를 유려하게 헤쳐나가는 몸놀림만큼은 놀라웠다. 그 모든 동선이 결과적으로 기마군세를 박살 내고 있었으니까.
전장을 뜻대로 조율한다.
무위 이전에 자질의 문제로, 타고난 전투 감각이 싸움터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남제는 저런 자질을 본 적이 있다.
건릉제, 명교주, 그리고 싸움 신에게서.
손아귀로 가져오든, 한 줌의 핏물로 으깨버리든 여기서 정해야 할 일이었다.
쿵!
때문에 그는 전장 한복판으로 착지하자마자 묵묵히 양손을 떨쳤다. 새까만 천단광갑이 양팔에서 선녀의 옷자락마냥 너울지고 있었다.
군갑개변(軍鉀改變) 암심뢰(暗深雷).
남제의 호신강기가 거무스름한 벼락처럼 수십 줄기로 갈라지면서 뻗어 나가고, 갑작스런 난입에 빙궁의 강자들이 눈을 부릅뜬 것도 잠시.
“……!”
그들이 걸친 늑대의 모피는 파지직 마찰음과 함께 갈기갈기 찢겼다. 방어에 특별한 강점이 있는 빙공(氷功)의 내공방벽이 잠시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본래 사람이었던 살점과 뼛조각들이 얼어붙은 모랫바닥으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고.
우우우우웅!
곧장 허공섭물에 휩쓸린 그들은 온갖 방향에서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저마다 북방제일인의 기파를 증강시키는 진법의 일부가 되어 파묻히는 것이었다. 생전의 내공을 고스란히 품은 상태로.
북방의 도시 곳곳에 세워진 시체들의 탑과 똑같은 역할이다.
태염룡이 멀리서 그들 쪽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할 때, 남제는 빙판길을 귀신처럼 빠르게 미끄러져 오면서 허공을 한 번씩 후려쳤다.
쾅! 콰앙―!
짓쳐들어오자마자 그의 손날에 머리가 터져 나가는 남녀가 있었다.
북방 자연체(自然體)의 경지. 모든 몸동작에 어색함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적이 운명처럼 모든 일격에 걸려든다는 의미였다.
[빙궁 이궁주(二宮主) 휘하의 좌호법. 남방 강호인명록을 기준으로 했을 때, 육십구(六十九)와 격이 같다.]어느새 남제의 옆에는 전장에서 가장 거대한 인마 한 쌍이 서 있었다. 천하 북도. 방금 죽은 시신들의 신분과 무위를 가늠하는 시선이었다.
[이쪽은 이궁주의 우호법. 팔십(八十)과 동격이다.]남제북도(南帝北刀)의 동행.
인근을 둘러싸고 돌던 문곡군의 기세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포효와 말발굽 소리가 전에 비할 바 없이 커다란 울림으로 전장을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황실삼대고수나 삼방대장군 중 일부의 합공이 아니면 받아칠 수 없었다는 전력.
그나마도 어느 순간부터 북도가 투신을 적대했기에 장성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일직선으로 길이 뚫린다.
대적 불가였다.
쾅! 콰앙―!
늑대 가죽을 걸친 빙궁 강자들의 몸이 폭죽마냥 터져 나가고, 막상 아무런 출수도 하지 않는 북도의 기세에 스스로 멈칫했다가 남제에게 머리가 뽑혀 쓰러지는 이들.
“제일부군, 퇴각을….”
“말로만 듣던 그자입니다! 남제, 남제가…!”
그렇게 북방제일인이 만들어낸 길은, 빙궁주의 하나뿐인 반려 쪽으로 올곧게 이어져 있었다.
“공을 좀 세워 보나 했더니.”
태염룡의 그늘진 눈 아래로 희미한 웃음이 맺힐 때였다.
“변절자야.”
어느새 태염룡의 코앞에 이른 남제가 거대한 체구로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나와 함께 가자. 네 몸을 제대로 고칠 방도가 무엇인지 안다.”
“……!”
“저어된다면 죽어라.”
대수롭지 않게 흘러나온 말에 태염룡의 눈이 커진다. 일순간 전장의 시간이 정지된 듯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매는 양귀비 향기처럼 권태롭게 휘어졌다.
터무니없이 파격적인 제안.
북방제일인이란 자에게 무엇이 그리 급할까. 아마 남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평야의 바깥에서 몰려오는 천재지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