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in A Love Comedy RAW - Chapter (189)
Chapter 189 – 크리스마스 #3
“후배님.”
“예, 스승님.”
“제가 심사숙고해보았는데, 후배님, 그리고 하나자와 후배님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는 결론이 도출되기에 이르렀어요.”
이 기계적인 말투는 뭐지? 색다르다.
“그래요?”
“네. 하지만 저는 렌카와도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홀로 외롭게 있는 렌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이해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후배님과 하나자와 후배님만 괜찮으시다면 늦은 시간에 만나도 될까요…? 제가 두 분이 있는 곳으로 갈게요.”
늦은 시간이라… 왠지 묘하게 들린다.
“물론 괜찮습니다.”
“다행이에요. 그런데 만나서 무엇을 하실 생각인가요?”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찾아 간단하게 맥주를 한 잔 하려고 합니다.”
“낫… 맥주요?”
“예. 혹시 드셔본 적이 없나요?”
“가끔…? 자주 마시지는 않아요. 가끔가다 렌카가 술이 당길 때가 있거든요? 그때 간단하게 하는 정도에요.”
아예 마신 적이 없다고 하면 몰라도,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다. 계획대로 하자. 적당한 취기는 용기를 내는데 도움이 되겠지. 미유키나 치나미는 물론, 그리고 나도.
“딱히 마시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고요?”
“네. 괜찮아요.”
“그럼 됐네요. 그렇게 결정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치나미의 말투는 꽤나 경직되어있었다. 매번 동성 친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다가 남자와 보낸다고 하니 긴장한 건가? 아니, 어쩌면 머릿속으로 야한 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치나미는 변태니까.
긴장을 풀라는 뜻으로 치나미의 뒷머리를 사근사근 쓰다듬어준 나는, 프힣… 하는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후 산책을 할 겸 동산을 올라가다가, 벤치에 앉아있는 렌카를 발견했다.
또 혼자서 휴대폰을 보고 있다. 새로운 피규어라도 떴나? 아니면 만화를 보고 있는 건가? 아주 조심스럽게 렌카의 뒤로 접근한 나는 그녀가 뭘 하는지 확인해보았다.
[아키하바라 프라모델 매장에서 알바 구합니다.] [시급 1000엔, 하시는 일은 계산, 정리, 프라모델 조립 도우미에요. 이쪽에 지식이 있으신 분을 우대합니다.] [피규어에 관심 많으신 분!] [피규어를 제 몸처럼 소중히 다루실 수 있으신 분은 저희 매장으로 오세요! 복리후생 업계 최고수준! 지원은 이쪽 링크로!] [알바 구함] [홀서빙, 남녀무관, 20세 이상, 시급 1200엔, 최소 3개월.]알바 구인 공고를 보고 있었구나. 렌카답게 서브컬처계 알바를 우선적으로 찾고 있다. 장난기가 생긴 내가 렌카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대고는 물었다.
“알바하려고요?”
“흐아아악!!”
양팔을 위로 번쩍 들며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는 렌카. 귀신이라도 본 양 몸서리를 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 무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심하게 놀랄 줄은 몰랐네요.”
“하아… 하아… 야! 왜 남의 휴대폰을 함부로 봐!?”
그게 중요한 거였어? 하긴, 너한테는 그럴 만도 하지.
“함부로 본 게 아니라 저절로 눈이 간 건데.”
“몰래 다가와서 봤으니까 함부로 본 거지!”
“그러네요. 근데 웬 알바에요? 홀서빙 하려고요?”
일부러 피규어 매장 알바를 언급하지 않고 홀서빙 공고부터 본 척 연기를 하자, 표정이 다소 누그러진 렌카가 대답했다.
“어.”
“왜요?”
“왜냐니… 학생들이라면 흔히들 하잖아. 방학 때 용돈벌이 알바.”
“그렇긴 하죠. 근데 알바를 하려면 삼촌네 가게에서 하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가끔 도와주러 가는 정도면 괜찮지만 매일 하기엔 너무 멀어.”
“숙식을 거기서 하면 되잖아요.”
“난 내 집, 내 방이 아니면 잠을 잘 못 자.”
“저번에 호텔에서는 잘만 자놓…”
“그만! 그만!”
렌카가 다급하게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호텔을 언급하니 창피한 기분이 든 모양. 여느 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이 있나 없나 확인해본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부실을 턱짓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일해.”
“저번부터 계속 그러시네. 일은 다 했는데.”
“다 했으면 연습해. 대회가 코앞인데 미적댈 시간 있어?”
“그럼 내려치기 봐줘요.”
“내가?”
“예.”
“난 상단세 잘 모르는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은 하지 말고요.”
“…..”
인상을 팍 찡그리는 그녀. 콧등에 주름이 살짝 생기는 모습이 귀엽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녀는,
“좋아. 자세 잡아봐.”
연습을 하겠다는 날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결국 제안을 승낙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장은 부장이구나. 소외된 부원을 가만둘 수 없어 챙겨주는 참 리더… 감격스럽다. 반쯤은 억지로 챙겨주는 거긴 하지만 뭐 어때. 챙겨주기만 하면 된 거지.
**
“메리 크리스마스.”
미유키를 데리러 온 내게, 미도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왔다. 여전히 풍만한 그녀의 선물주머니를 흘끗거리며 차에서 내린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념일 잘 보내세요, 아주머니.”
“고마워. 오늘 늦게까지 놀 예정이니?”
그 말에 미유키가 미도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며시 찔렀다.
“아 엄마…! 왜 사람 면전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해…!”
“뭐 어때? 그냥 크리스마스니까 늦은 시간까지 노는 거냐고 물어보기만 하는 것뿐인데. 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가만 보면 미도리의 장난기도 카나만큼 심하다. 갑자기 미도리의 학창시절이 궁금해진다. 인기가 엄청 많았으려나?
와타루는 평범하게 인자한 인상이지만 그 속에 중후함이 섞여있는 걸 보면, 그 또한 어렸을 때 평균 이상으로 생겼었을 것 같다. 아니면 어딘가 특출난 면이 있거나.
확실한 건, 와타루가 테츠야 포지션의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거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미도리와 결혼하지도 못했겠지. 이건 당연하다.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은 나는 어머니와 티격거리기 시작한 미유키를 만류하고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께서 빨리 보내라고 말씀하시면 빨리 보내겠습니다.”
“아냐. 느긋하게 놀다가 와.”
‘느긋’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착각일까?
“그럼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여유를 가져야 돼. 알았지?”
착각이 아니었구나. 유부녀가 이렇게 야하면 자꾸 나쁜 마음이 드는데… 참아야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름 의미심장한 대화를 끝내고 미유키를 차에 태우고 아카데미로 향한 나는,
“어?”
차에서 내린 미유키가 고개를 치켜든 채 의아한 탄성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이네?”
그 말마따나 하늘에선 두툼한 눈송이가 몇 개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대여섯 송이만 내리던 눈은, 곧 함박눈으로 변해 주변을 새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어?” “와아…!”
주위에서 다른 학생, 교사들의 상기된 감탄사가 크게 들려올 정도로, 눈은 갑작스레, 그리고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기세를 잃지만 않는다면 부활동이 끝날 때쯤엔 많이 쌓여있을 것 같다.
“마츠다 군, 이거 봐.”
뻗은 손바닥 가운데로 떨어진 큼지막한 눈꽃을 내게 보여주는 미유키. 체온으로 인해 사르르 녹아내리는 눈을 빤히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예쁘게 생긴 눈이네.”
“응. 저녁에도 이렇게 내렸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일기예보 봤어?”
“아니.”
“근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러브 코미디물의 주인공이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의 기본 옵션이니까 확신할 수 있지.
“그냥 알아.”
그리 말한 나는 미유키의 밝은 갈색머리 위에 그녀의 보온용 털장갑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러자 미유키가 장갑 안으로 자신의 가녀린 손가락을 들이밀더니 물었다.
“오늘 되게 감성적이네?”
“그래 보이냐?”
“응. 들어가자.”
밝게 웃는 미유키의 입술을 덮치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면서, 나는 그녀와 함께 교정을 가로질러갔다. 그러다 저 멀리서부터 학생회장이 미유키를 부르자 인상을 찌푸렸다.
“미유키! 마침 잘됐다, 잠깐 이쪽으로 좀 와줄래?”
왜 오붓한 우리 둘 사이를 방해하려는 거지? 무릎을 꿇린 다음 저 동그란 안경에 허여멀건한 씨즙을 뿌려버리고 싶구나.
“아, 네! 갈게요! 마츠다 군, 먼저 들어가. 이거 혼자 먹지 말구.”
자신이 들고 있는 곰돌이 젤리를 내 손에 쥐어준 미유키의 말.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그녀의 가방을 가리켰다.
“가방 줘 그럼.”
“알았어. 고마워.”
재빨리 가방을 벗고 내게 건넨 미유키가 후다닥 학생회장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미유키를 지켜본 나는, 그녀의 가방을 앞으로 매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다가 교문으로 들어오는 치나미와 렌카를 보며 히죽 웃었다.
“엇!? 후배님! 메리 크리스마스에요!”
자신들 쪽으로 오고 있는 날 발견하고 손을 마구 흔드는 치나미. 텐션이 잔뜩 올라가있는데, 눈 때문인 것 같다. 그 옆에 렌카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속에 상기된 기색이 담겨져 있었다. 쿨한 척은 하고 있지만 그녀도 함박눈이 좋나보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치나미와 렌카의 곁으로 간 내가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부장도요.”
좋은 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 싫었던 걸까? 고개를 끄덕인 렌카가 나름 진정된 투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도 잘 지내봐요.”
“아직 새해 아닌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앞에 맨 가방은 뭐야?”
“이거? 미유키 거예요.”
“심부름 잘하네?”
“마음대로 생각하십쇼. 스승님은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네요?”
그 말에 치나미가 자신의 머리에 묻어있는 눈을 훌훌 털어내었다.
“갑자기 눈이 내리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부활동 시간까지 눈이 충분히 쌓이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어 봐요.”
“그래요. 부장도 껴서 같이 만들죠.”
“그럴까요? 친우님, 부활동이 끝나기 30분 전에 동산으로 올라오실래요? 다 만들고 같이 사진 찍어요. 어때요?”
순진한 눈망울을 한 치나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건지, 렌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난 좋아. 그렇게 할게.”
그리고는 은근슬쩍 자신을 끼워버린 날 한 차례 쏘아보았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표정이다. 오히려 조교욕구가 마구 솟아오르기만 한다. 어깨를 으쓱이며 렌카의 시선을 넘겨버린 나는, 치나미와 몇 차례의 대화를 더 나누고 교실로 향했다.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날짜만으로 따지면 오래 걸렸지만, 체감 상으로는 굉장히 짧게 느껴진다. 오늘 하루는 미유키, 치나미가 즐거워하는 걸 목표로 잡자. 낮에도, 저녁에도, 그리고 밤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