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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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별이 지다. 그리고……. (2부 완)
139# 별이 지다. 그리고……. (2부 완)
북왕 아이벤의 전사 소식은 전후의 휴식을 만끽하던 주둔지 내를 일파만파로 뒤덮었다.
안 그래도 많은 사망자들을 낸 탓에 침울해져 있던 연합군의 분위기는, 아이벤의 사망 소식으로 인해 더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특히 아이벤을 숭앙하는 헌터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는 전사단의 막사 쪽은 상갓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암울한 공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에 휩싸인 건, 역시 아이벤과 개인적인 친교를 나누었던 아이리스의 헌터들이었다.
“어, 어떻게… 아이벤 님이 당했다고?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언니…….”
“세희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그분이 이렇게 허망하게… 그럴 리 없잖아!”
“…….”
말문이 막힌 안세희가 우물쭈물하며 답을 회피하자, 박지현의 커다란 눈망울에 맑은 물이 한가득 괴어 흘러내렸다. 선머슴 같은 그녀가 눈물을 보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억센 성미를 지닌 그녀도 깊이 동경하던 우상의 죽음은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저쪽에 있는 이두식 또한 우울한 낯빛을 띠고 있는 건 박지현과 다르지 않았다. 그 앞에는 평소의 웃음기를 싹 거둔 도일이 앉아 있었다.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혹시 잘못된 소식일 가능성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사령부에서도 몇 번이고 확인한 정보라고 하니까요. 아직 자세한 사정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면서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노구덕을 곁눈질하는 도일. 혹시 그가 알고 있는 다른 정보가 있다면 언질이라도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깊은 생각에 빠진 노구덕은 그쪽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북부는 난리가 났겠군요.”
“그럴 테죠. 북부에서의 북왕은 거의 살아있는 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잽니다. 당장 같은 십존인 청룡왕만 하더라도 그의 열렬한 추종자일 정도니까요. 아마 오늘 이후로, 북부의 판도가 크게 변할지도 모르겠군요.”
“예? 그건 무슨…….”
식견 깊은 도일이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그러나 곧장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 이두식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벤이 아무리 추앙받는 존재라 할지라도 일개 개인이다. 그렇다고 그가 남몰래 세력을 일굴 인물도 아니었으니. 북부 전체에 그 파장이 일 것이라는 도일의 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두식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두 사람의 주고받는 대화를 들은 박지현이 눈에 불을 켜고 악을 쓰기 시작한 탓이다.
“뭐라고! 좋을 대로 아이벤 님의 죽음을 단정 짓기는…! 시체라도 봤어? 봤냐고!”
“어, 언니… 제발 그만…….”
“…실언을 했군요.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취소해! 아이벤 님이 죽었다는 말, 취소하라고!”
눈이 벌겋게 된 박지현이 억지를 쓰자, 입장이 난처해진 도일과 이두식은 씁쓸한 표정이 되어 서로를 마주보았다. 평소 박지현이 얼마나 아이벤을 존경했는지 알기에, 딱히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던 노구덕이 지그시 눈을 뜨며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박지현. 엉뚱한 데 화풀이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라.”
“하지만 오너!”
“자리에 앉아.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윽…!”
깊이 들어가 있는 노구덕의 눈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할 기미를 보이던 박지현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의 위압에 짓눌린 박지현은 이내 힘없이 숨을 씨근덕거리며 막사를 나가버렸다.
휑하니 열린 막사 문을 두고, 노구덕의 눈치를 살피던 안세희는 조심스럽게 문가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아마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 박지현의 뒤를 따를 생각인 모양이었다.
“갈 필요 없다.”
“네, 네?”
“보나마나 제 숙소에 틀어박히러 갔겠지. 이럴 때는 혼자 두는 게 좋아. 세희 너는 여기 있어라.”
“네…….”
한숨과 함께 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안세희에게서 시선을 뗀 노구덕은 아직도 어색하게 앉아 있는 이두식과 도일을 바라보았다.
“도일, 잠시 나갔다 오마. 혹시 사령부에서 찾거든 곧 돌아온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도일에게 뒷일을 맡긴 노구덕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막사를 나섰다. 뒤통수에 따라 붙는 의문어린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그는 애써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막사를 나온 노구덕이 향한 곳은 그의 막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인적 드문 공터였다. 본래는 피에스타의 막사가 있었던 곳이지만, 오늘 전투로 큰 피해를 입은 피에스타의 병력이 대대적으로 철수하면서 공허한 빈자리만 남은 곳이었다.
“흐으…….”
식도를 타고 내려온 밤공기가 폐부를 싸늘하게 적시는 것만 같다. 평소라면 몇 번 크게 숨을 들이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확 트였을 테지만, 오늘만은 어째 예외였다. 바위가 얹힌 듯 텁텁한 가슴은, 몇 번이고 크게 한숨을 내쉬어도 그대로였다.
임유진과 데모나를 조기에 복귀시킨 게 정말 다행이었다. 결국 얼마 못 가 알게 될 사실이라지만, 이곳의 우울한 분위기에 일찍부터 전염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을 위해서라도,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갑작스레 불어온 스산한 바람이 코끝을 약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게 아가레스트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왔군요.’
노구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다. 어둠의 저편에서, 무표정 일색의 중년인이 소리 없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투가 끝난 직후 곧바로 종적을 감춘 사령관, 무릴로다.
노구덕은 유령처럼 기어나온 무릴로를 섬뜩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위원회 짓인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북부 세력구도의 재편. 적어도 동기는 확실하지.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나?”
“흠.”
짧게 신음한 무릴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면서 답변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일까.
노구덕이 대뜸 ‘북왕의 죽음’에 대한 배후로 위원회를 지목하고 나선 것에는 분명한 연유가 있었다.
북부의 정신적 지주, 북왕 아이벤은 위원회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건 검왕 김정인과 똑같았지만, 그 영향력의 범주가 달랐다. 김정인은 단지 동부에 속한 두 개의 대도시를 점거하고 있지만, 아이벤은 북부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거인이다.
덕분에 북부 왕국인 우르카와 듀폰은 위원회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이후에도 세력 유지에 큰 애를 먹고 있었다. 아이벤의 태도에 영향을 받은 북부 헌터들이 위원회와 구왕국에 곱지 않은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만한 동기가 있다면, 그의 죽음에 위원회가 관여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더군다나 ‘지배의 악마’를 지닌 무릴로가 직접 나섰다면, 시먼에게 몰래 암시를 걸어 일을 획책했던 것처럼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수를 썼을 수도 있었다.
“…북왕은 분명 달갑지 않은 존재였지. 하지만 섣부른 속단은 금물이다. 북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위원회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북왕은 일종의 제동장치였다. 마음만 먹으면 큰 세력을 일으키고 북부의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지. 십존, 헌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화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북부의 모든 헌터들이 그와 같은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하나?”
“…….”
“북부에도 구왕조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떨치고 싶어 하는 세력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웃기게도, 대륙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항쟁이 일어나 각지를 대표하는 세력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동안, 북부에서는 그 흔한 다툼 한번 일어나지 않았다. 왜일까? 그자들이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했기 때문에?”
“북왕… 때문이라는 건가?”
“그렇다. 그간 북부는 정체되어 있었지. 다툼을 싫어하고, 평화를 원하는 그 남자가 있었기 때문에. 팽배한 야심을 억누르고, 또 억눌러야만 했다. 그렇게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좋은 기회가 온 거지.”
노구덕은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눈을 들어, 무릴로의 음침한 낯짝을 응시했다.
“그 말… 북왕의 죽음에 정말로 누군가 관여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이쪽에서는 명왕 강문식이 연루되었다고 보고 있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명왕 강문식.”
노구덕은 무릴로가 언급한 그 이름을 되뇌었다. 섣불리 믿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괜히 하는 말은 아닐 터. 새겨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이중적이군. 그리고 이기적이야.”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음산한 얼굴에 진득한 비웃음을 머금은 무릴로가 보였다.
“이기적이라고?”
“이번 전투에서, 네가 조금만 더 빨리 나섰더라면 적어도 백이 넘는 헌터들을 살릴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왜? 나와 약속을 했으니까. 일부러 전투를 방관하고, 연합군의 전력이 약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약속 말이다.”
“…….”
“널 탓하진 않아.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결과니까. 중앙 위원회는 통제 불능이 된 독립 세력들의 힘이 약해지길 원했다. 그리고 너도, 아이리스도… 장차 서부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게 될 경쟁자들의 세력이 약해지길 바랐지. 인간이라면 당연한 이기심이야.”
무릴로의 입매가 교활하게 비틀어졌다. 그는 조롱기 다분한 시선으로 말이 없는 노구덕의 얼굴을 뜯어보며 그 정곡을 찔렀다.
“북부에서 일어난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크크크크…….”
옅은 숨소리를 내뱉는 노구덕의 입술은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노구덕을 앞에 둔 무릴로는 이내 재미없다는 듯 목을 꺾었다.
“할 말 없으면 이만 난 사라져주도록 하지. 조만간 또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군. 아, 그리고…….”
“이번 그림리퍼 전의 최고 수훈자라지? 늦었지만 축하하지. 크하하하하…!”
무릴로는 마지막까지 야멸찬 비웃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널찍한 공터에 홀로 남은 노구덕은 망부석이라도 된 양, 수십 분이 지나도록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최고 수훈자라…….”
픽. 두꺼운 입술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일그러졌다. 백이 넘는 헌터들의 희생을 방관하고 손에 넣은 타이틀이다. 헌터들이 그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지만, 미연에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았던 것은 사실. 세상이 이를 안다면 지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중적이다. 이기적이다. 무릴로가 멋대로 툭툭 내뱉은 말들이 가슴에 와 닿았다.
“똑같은 놈이 잘난 듯이 비웃기는…… 크크.”
노구덕은 웃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애처럼 자기 할 말만 하고 후다닥 도망치듯이 사라진 무릴로의 행동이 참을 수 없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의 말이 맞다. 자신은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인간이다. 그게 어떻단 말인가? 적이 잘 되면 배 아파하고, 내 식구가 다치면 분노하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본능이다. 그게 잘못되었단 말인가?
노구덕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갈 작정이었다. 무릴로가 겨우 말 몇 마디로 그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노구덕이란 인간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얕은 수작이었다.
백년 묵은 구렁이처럼 느긋한 웃음을 매단 노구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계속 상황을 지켜보았을 터인 아가레스트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 집어삼켜주마. 위원회든, 반군이든, 다른 잡놈들이든……. 죄다 부수고, 짓밟아서, 보란 듯이 끝까지 올라가주지.”
추악하고 더러운 세상이다. 그 아수라장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더럽고 추잡한 놈일 터. 그 배역엔 학 같은 고고함도, 사자 같은 위엄도 없다. 밑바닥의 벌레가 노리기엔 더없이 이상적인 배역 아닌가.
소슬한 겨울바람이 더욱더 가슴에 스며든다. 추위를 느낄 리 없는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문득, 작은 장작불이 가져다주는 작은 온기가 그리워졌다.
‘불이라도 때워야겠군.’
노구덕은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그를 기다리는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악취 나는 그를 반겨주는 유일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2부 완.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마침내 2부 완결입니다! 화수로 따져보니 1부와 2부가 비슷한 것 같네요.
2부의 끝은 아이벤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파장이 앞으로 크게 번져서, 어떤 도화선 역할을 할 예정입니다.
3부의 시작은 대략 5년 후로 잡혀 있습니다. 으음.. 등장인물들이 상당히 나이를 먹겠네요. 소ㄴ도… 크흠흠!
아마, 3부 첫 도입부에서부터 낯선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전적으로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예정이라서요. 주인공이라든가, 작품 내 분위기라든가 말이죠. 이번화 마지막의 분위기를 보시면 대충 짐작이 되실 듯합니다.
3부는 전쟁 전쟁 전쟁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김정인과 대립구도를 세우며 부딪치는 전개가 될 거고요. 여기저기서 피가 난무하겠네요..
너무 많은 힌트를 드리면 재미가 없을 테니 잡담은 이쯤 하도록 하겠습니다.
2부까지 완결 내는데 많은 도움과 사랑을 주신 독자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3부가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작품의 부제에 충실할 수 있겠네요. 1부 초반부터 왜 부제가 안티히어로냐는 질문이 정말 많았는데..
긴 과도기를 거치고 드디어 응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서없이 적다 보니 얘기가 조금 길어졌네요!
후기는 더 길게 적지 않겠습니다. 3부는 시간 끌지 않고 곧바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아… 하나 잊었네요. 3부 시작 전에! 번외격으로 작은 에피소드 하나 중간에 끼워넣으려고 합니다.
핏물 튀기기 전에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라고 할까요. 유진이나 데모나 시점으로 출산 직후의 일상을 써 보려고 합니다. 저번에 실렌 시점으로 짤막한 화가 나왔단 것처럼요.
누구 시점으로 할 지는.. 아직 미정. 코멘트 보고 결정할 수도 있겠네요.. 하하;
다시한번 독자님들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작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2부까진 완결냈으니 오늘은 꿀잠을 잘 수 있겠네요.
독자님들도 꿀잠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