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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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이이제이(以夷制夷)
205# 이이제이(以夷制夷)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부 전선에 이어, 서부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먼지구름이 번지기 시작했다.
거창한 출병식과 함께 제네시스에서 출진한 레그나토르의 병력은 약 4만. 그 외에 다른 지역에서 합류하는 병력들까지 합치면 도합 7만에 이르는 대병이었다.
총사령관은 말할 것도 없이 노구덕이고, 십존에 오른 두 명의 재상들도 모두 참전했다. 뿐만 아니라 각지의 지방관, 관료로서 책무를 다하고 있던 간부들까지 대부분이 동원된, 그야말로 국력을 모조리 끌어 모은 전력이었다.
노구덕이 정한 레그나토르 군의 집결지는 오렌(Oren) 평야였다. 오렌 평야는 이레시온의 서부 국경을 책임지는 대도시, 세인트 오렌(Saint oren)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광활한 벌판의 이름이다.
“콜트레인 지방관님의 제 2군 1만 8천, 지금 도착했습니다!”
“황석문 지방관님의 제 3군 1만 2천도 방금 당도했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전령의 외침에, 군의를 진행 중이던 제장들의 이야기가 일순 끊어졌다. 지휘막사의 상좌에 앉은 노구덕은 길쭉한 펜대를 빙글빙글 굴리며 싱겁게 웃었다.
“똑같이 도착한 걸 보니, 오는 길에 만나서 사이좋게 같이 왔나 보군.”
“그런 것 같네요.”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막사 문이 걷히며 두 명의 장한이 들어섰다. 빈틈없어 보이는 무장을 갖춘 이들은 레그나토르의 지방관, 콜트레인과 황석문이었다.
“주군을 뵙습니다.”
두 사내의 군례를 받은 노구덕은 각잡힌 군례로 마주 답하며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먼 길 고생 많았소. 앉으시오. 회의가 한창이니.”
“하하. 그런 것 같군요. 저희가 좀 늦었습니까?”
“늦은 건 아니고, 적절한 때 왔다고 해야겠지. 잡담 시간이 방금 끝났거든.”
“이런, 오자마자 일이로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늑장을 부릴 걸 그랬습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은 콜트레인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의 장난기를 싹 걷어낸 진지한 목소리였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 세인트 오렌은 그리 만만한 도시가 아닙니다.”
“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던 만큼, 노구덕은 짧은 콧김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레그나토르와 이레시온이 국경을 맞댄 지역은 굉장히 광범위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요충지라고 한다면 역시 세인트 오렌을 꼽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서부 지구와 중부 지구를 관통하는 젖줄, 킹스로드(Kings road)가 지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킹스로드는 군다르의 정복자 갈드루헨 시절에 만들어진 거대한 도로다. 또한 대륙에서 가장 폭이 넓게 정비된 길이기도 했다.
워프게이트가 활성화된 지금에야 도로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지만, 여전히 큰 규모의 상행에선 도로의 편리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구와 지구 간의 이동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상단이라 해도, 모든 물품을 워프게이트로 이동시킨다면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 테니까.
하물며 국가 규모의 물자가 동원되는 전쟁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7만에 달하는 군대를 먹여 살릴 보급선은 당연히 도로를 통할 수밖에 없고, 차후 갈수록 늘어질 보급로를 고려해 봐도 킹스로드의 점거는 필수 불가결이다.
노구덕이 첫 번째 타격 목표를 세인트 오렌으로 결정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렇다면, 노장 콜트레인은 어떤 이유로 세인트 오렌 공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것일까.
그 대답은 재상 유메르바인에게서 나왔다. 이레시온과 오래도록 국경을 맞대었던 도미니온 출신인 만큼, 그녀는 대도시 세인트 오렌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세인트 오렌의 상태는 잔뜩 독 오른 암호랑이와 같아요. 빗대자면 도시 전체에 광폭화 주문이 걸렸다고나 할까요.”
“광폭화라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부 분들은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해 드리자면, 세인트 오렌의 원래 지명은 오렌(Oren)이었어요. 그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도시의 정체성이 확립되면서 그 앞에 세인트(Saint)란 단어가 붙여진 거죠.”
“정체성이라면….”
“네. 세인트 오렌은 종교도시예요. 그것도 전쟁교단 론다리온의 총본산이죠.”
간략하지만, 충분한 설명이었다.
전쟁의 신 론다리온을 모시는 교단은 아벨 교단처럼 대중적인 종교는 아니다. 솔직히 말해 인지도로 따지면 아벨 교단에 비할 바 못되는 작은 세력이다. 그 명성 또한 본산지 세인트 오렌 주변 일대에 거의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하나 그게 전쟁교단이 약하다는 의미는 못 되었다. 오히려 전쟁교단의 전력은 대륙적으로 퍼진 아벨 교단을 한참이나 압도했다.
아벨 교단이 널리 퍼진 건 전승되던 신성 주문을 대중적으로 공개한 이유가 크다. 어느 사제든 간에 아벨의 주문 서너 가지 정도는 기본 소양으로 알고 있을 정도니까. 그리고 아벨 교단이 비전을 대대적으로 공개한 배경엔, ‘아벨의 손’ 같은 일부 최고위 주문을 제외하면 대체적인 수준이 다른 교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까닭도 있었다.
그러나 론다리온의 교단은 아벨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그들의 전승 비전은 ‘전쟁의 신’을 모시는 교단답게 매우 강력했으며, 신도들은 하나 같이 호전적이었다. 오죽하면 아벨 교단에 비해 훨씬 소수임에도 전력상 압도한다는 평을 들을까.
“세인트 오렌은 전쟁교단의 본거지이기도 하고, 또 유일한 거점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교단이에요.”
“대도시 하나를 본거지로 삼았다면 소수라 보기도 어려운데요.”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전쟁교단의 신도들이니, 평신도들까지 합치면 적어도 오만은 된다고 봐야겠죠. 전투능력을 갖춘 교단의 병사들은 1, 2만 정도로 추산되고요. 무엇보다 소수 정예란 특성상, 그들은 서로 간의 유대감이 무척 강해요.”
“한마디로 최소 5만의 광신도들이 우릴 향해 이를 갈고 있단 소리다. 교단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에드가를 보란 듯이 참수한데다, 교단의 신물까지 강탈했으니까.”
노구덕의 깔끔한 정리에, 곱게 눈을 감은 유메르바인의 얼굴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네. 제가 드리려던 말씀을 해주셨네요.”
“음,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요.”
좌중의 분위기가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유메르바인과 노구덕의 말을 듣고 앞으로의 싸움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물론, 레그나토르의 전력은 전쟁교단이 아니라 전쟁교단 할아비가 오더라도 손쉽게 짓밟아 버릴 수 있을 만큼 쟁쟁하다. 십존 수준의 강자도 여럿이고, 그에 준하는 실력자들도 널려 있었으니까.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전력상 아군의 우위는 확실합니다. 아무리 전쟁교단이라 하더라도 일방적인 양상이 되겠지요. 하지만 역시 걸리는 건….”
“네. 시작부터 도시 하나를 몰살시켜야한다는 거죠.”
종교가 불러일으키는 집단광기는 그 어떤 광폭화 주문보다도 무서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심지어 전쟁교단의 영향력은 세인트 오렌이라는 대도시 전체에 미친다. 도시 안에는 신성모독을 당한 광신도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레그나토르의 군대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전투원이 아니다. 다른 때라면 평범하게 지냈을 도시의 일반 시민들이다. 그런 이들이 남녀노소할 것 없이 부엌칼을 들고, 쟁기를 들고, 하다못해 길가의 돌멩이를 쥐어서까지 살의를 불태우는 중이다.
멀리서도 느껴진다. 도시 전체에 스며 번들거리는 순교(殉敎)의 광기, 용암이 튀는 듯한 맹렬한 적의가. 보지 않아도 훤하다. 성갑왕 에드가를 죽인 레그나토르는 그들에게 있어 반드시 타도해야 할 악당이니까.
“어중간한 싸움은 안 됩니다. 처음부터 뿌리를 뽑는다 생각하고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광신도들이 벌이는 짓거리란 때론 상상을 초월하니까요. 일반 시민들도… 예외는 될 수 없습니다.”
“초전부터 살육극을 펼쳤다가는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전쟁이란 그런 겁니다. 일반 시민들과 론다리온의 광신도들을 구별할 방법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어느 쪽이든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세인트 오렌은 그냥 중소 규모의 도시도 아니고 수만의 인구가 상주하는 대도시다. 그런 대도시의 인구를 남김없이 몰살시킨다면… 병사들에게 큰 악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적당히 상대할 수도 없다. 성갑왕을 배출한 전쟁교단의 비전은 대륙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막강하다. 전쟁교단의 사제들이 옥쇄를 각오했다면, 상상 밖의 수작을 걸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예컨대 자기희생주문이나 대대적인 자폭 주문이 등장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난제에 빠진 모두가 토의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힘없는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성갑왕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 싸움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말을 꺼낸 이는 안세영이다. 그녀를 일별한 노구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피할 수 없었을 거다.”
“역시… 그렇겠죠?”
“그래. 에드가를 그냥 보냈더라도 놈은 저 도시에서 우릴 막아섰겠지. 시나리오는 똑같다. 단지 에드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야.”
“달리 말하면 이레시온은 처음부터 성갑왕을 버림패로 사용한 셈이죠. 저희가 어떤 식으로든 세인트 오렌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는 걸 예측하고 있었던 거예요.”
소피아의 말이 맞았다. 이레시온… 아니, 발레기우스는 성갑왕 에드가를 버림패로 사용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상 자치령이나 다름없는 세인트 오렌을 레그나토르 앞에 제물로 던져버린 거다. 론다리온의 광신도들을 격분시켜 레그나토르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깎아먹으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알비온이라고 했던가? 놈에겐 그 힘을 흡수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생각을 마친 노구덕은 갑자기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난잡하게 흩어져 있던 시선들이 그의 얼굴 한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이목을 집중시킨 노구덕은 두꺼운 입매를 씰룩이며 웃었다.
“소피아. 듣자 하니, 리베르타의 초전이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서? 뭐라고 했더라… 고영환인가? 그놈 말이야.”
“아, 네. 변경도시 센츄라스에 자폭기능이 내장된 아다만티움 골렘 열 기가 매복해 있었지요. 전대 십존인 골렘 마스터 고영환이 지휘관이었고요.”
“리베르타 군이 바로 진격했으면 상당힌 피해를 입었겠군. 그런데 검신의 활약으로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을 점령했다고 들었다.”
“…자기 주둔지에서 성벽 위에 올라있던 고영환을 베어버렸죠. 조종자를 잃어버린 골렘들은 당연히 기능도 하지 못했고요. 정보에 따르면 성문과 성벽까지 일시에 베어버렸다고…….”
“허참, 들으면 들을수록 신통방통한 일이야. 그게 사람이 가능한 일인가?”
“…….”
좌중은 일제히 입을 다문 채 노구덕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들의 왕이 뜬금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탓이다.
여전히 입매에 미소를 단 노구덕은 느긋이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능력 없다. 동부의 검신이니, 서부의 무신이니 치켜세워도 어쩌겠어. 가진 실력이 딸리는 걸.”
“크흐흠… 폐하. 아무도 그런 생각은….”
“그래도 역시, 그놈한테 지는 건 싫단 말이야.”
갑옷이 쩔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어난 노구덕은 원탁에 놓인 작전지도를 반으로 덮어버렸다.
“회의는 이만 끝이다. 초전은 내가 열겠다.”
갑작스런 종료 선언에 어리둥절해진 제장들은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폐하, 갑자기 무슨 말씀을….”
“초전이라뇨? 아직 작전이 정해지지도 않았잖습니까?”
“설마 그냥 힘싸움으로 가시는 건…?”
“그게 아니다.”
고개를 가로저은 노구덕의 시선이 문득 한 사람에게 미쳤다. 제 3군 사령관 황석문이다.
“황석문, 그 부대를 준비시켜라.”
“그 부대라 하시면… 음, 그렇군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갑작스런 명령이었지만, 금세 왕의 의중을 파악한 황석문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군례를 했다.
아직 맥을 잡지 못한 이들이 의아해하는 사이, 노구덕은 내친걸음으로 막사를 나섰다.
“다른 부대는 필요 없다. 다른 지휘관도 필요 없어. 나와 근위대, 제 3군에서 차출한 일개 부대만 나선다. 너희는 구경이나 해라.”
“폐하, 그건 너무 무모합니다!”
터무니없는 명령이다. 물론 노구덕이 가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긴 했지마는, 이번 것도 납득하기가 힘들다. 주변에서 반발하며 만류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노구덕은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다는 듯 태평했다.
“괜찮다. 광신도에는 광신도가 제격이니까.”
“예?”
“보면 알아.”
한순간에 멍해진 제장들. 그런 그들을 막사에 남겨둔 노구덕은 홀연히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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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황석문. 부대. 광신도.
쉽게 추측 가능한 부대겠네요.
즐거운 금요일 밤 되시길 바랍니다!
혹시 궁금한 것 있으시면 이번화 댓글에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