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95)
헌터클럽 790화
219. 사람은 변하게 마련
“고민이라도 있나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윤희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슬그머니 호주머 니에 잠겨 있던 손을 뺀 그녀는 어 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소피아 씨?”
“왜 그러죠? 도둑질이라도 하다 걸 린 것처럼.”
소피아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허리 춤에 매달린 호주머니를 향했다. 마 치 그곳에 뭐라도 숨겨두고 있느냐 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다.
기껏 이지러졌던 입매가 다시 뻣뻣 하게 굳어졌다. 그 눈길을 피하려는 듯 비스듬히 허리를 튼 윤희지는 고 운 눈썹을 촘촘히 가운데로 모았다.
“어찐 일이죠? 당신이 제게 말을 다 걸고.”
“우후홋. 당신 말고는 달리 아는 사람도 없잖아요? 왜,비천한 포로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도 안 되나 요?”
“이제 포로 신분은 아닐 텐데요.”
“네,일단 형식상은 말이죠.”
잔뜩 비틀린 말본새가 심히 날카롭 다. 찍찍 부리로 찍어대는 듯한 말 투만 봐도 그녀의 적대감이 하늘을 찌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럴 만도 했다. 전향을 택함으로써 억류 상태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그 행동반경에는 엄연히 제약이 따 랐다. 게다가 마법이나 정령도 쓰지 못하고,소냐를 비롯한 다른 포로들 과 면회조차 가질 수 없다.
주둔지 일대만 조금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뿐이지,실상 그녀의 일 상은 포로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 라진 게 없었다.
소피아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갔 으나,윤희지도 머리가 어지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잖아도 신경이 곤 두선 상황에서 소피아의 투정까지 받아줄 여유가 없었던 그녀는 살짝 신경질적인 투로 말했다.
“지금은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네요.”
“어머,그런가요? 이거 아쉬운 걸요.”
“할 말은 다 끝났나요?”
“아뇨. 아직 안 끝났어요.”
대화를 기피하는 윤희지를 억지로 잡아 세운 소피아는 추궁조로 질문 했다.
“검신,그 사람 얘기예요. 대체 어 떻게 된 거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로 일 관하려했던 윤희지다. 그러나 소피 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검신’이란 단어는 절로 그녀의 고개를 돌아가게 만들었다.
“……의도를 모르겠는데요?”
“제네시스에 도착하면,저더러 레그나토르군 앞에 나서서 대대적으로 항복 연설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오늘 아침에 일방적으로 통보받 았어요. 물론 거부권은 없다는 말과 함께요.”
윤희지의 목울대가 작게 꿈틀댔다. 김정인이 아침나절부터 소피아의 막 사에 들렀다는 얘기는 들었는데,그 런 말을 하고 왔을 줄이야.
“네,이해는 가지요. 처음부터 이럴 용도로 절 회유한 것일 테니까요. 전직 대신(大臣)에,무신의 아내였던 여자가 뜬금없이 적군의 선봉으로 나타나서는 장황하게 항복 선언문을 읊어대면, 누구라도 기가 꺾이 겠죠. 저열하기는 해도 전략적으론 나쁘지 않은 방법이에요.”
“……그래서요?”
“문제는,제게 강권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검신 본인이라는 거죠. 그토록 고고한 남자가 어쩌다 이렇 게 되었죠? 언제부터 그 방식이 이 렇게 더러워졌나요? 당신이라면 알 것 같은데요.”
언제부터였냐고? 나도 알고 싶어. 그 사람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 지. 어쩌면 처음부터 그 모습 그대로였던 게 아닐까?
목구멍 끄트머리까지 걸린 수많은 말들을 간신히 눌러 삼킨 윤희지는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저도 모르겠네요. 혹시라도 알게 되면 알려주세요.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당신……
윤희지를 쏘아보던 소피아의 얼굴이 살짝 떨떠름해졌다. 김정인에 관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던 여자가 갑자기 딴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건조한 반응을 보이니 머리가 복잡해진 것 같았다.
“당신도 변했군요.”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니까요. 그 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지금은 너무 피곤하네요.”
손사래를 치며 몸을 돌리자,등을 향해 물끄러미 꽂히는 소피아의 눈 길이 느껴졌다. 잔뜩 의혹어린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한 윤희지는 힘겨 운 발걸음을 끌며 어딘가로 향했다.
소피아와 헤어진 그녀의 발길이 향한 곳은 주둔지 중심지의 어느 외진 막사였다.
외진 막사라고는 해도,그 주변 경 계는 다른 어느 곳보다 삼엄했다. 심지어 김정인이 머무는 지휘막사보 다 많은 인원이 배치되었을 정도니 말은 다 한 셈. 게다가 그 경비 총 책임자는 부사령관인 로열나이트 김상목이 었다.
“총사. 여긴 어쩐 일이신지?”
보기에도 묵직한 중무장을 갖춘 채 사무적인 말투로 일관하는 김상목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주인의 명이라면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것 같은 충직한 사 냥개 같은 사내가 김상목이다. 만인의 귀감이 되는 그의 충정은 윤희지도 높이 사는 바였지만…… 요즘은 그를 볼 때마다 가슴에 얹힌 체증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포로들의 상태를 살피러 왔어요.”
“주군께 따로 허가를 받으신 겁니 까?”
어김없는 질문에 윤희지의 눈매가 송곳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총사가 포로들을 살피겠다는데 사 령관의 허락까지 받아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다른 문제가 없다면 이만 비켜주 세요. 오늘 오전에도 그이가 들렀다고 들었으니까요.”
“으음.”
김정인이 따로 명령이라도 내리지 않는 한,윤희지의 앞을 제지할 구실은 없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는 김상목을 무섭게 노려본 윤희지는 이내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김상목은 수하를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주군께 보고하라. 총사가 그녀를 만나러 들어갔다고.”
“예.”
나름대로 조용히 말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그들의 대화는 성큼 성큼 걷는 윤희지의 귀에 똑똑히 전달되었다.
‘흥.’
윤희지의 안색이 눈발로 뒤덮인 것 처럼 싸늘해졌다.
김상목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김정인이 이곳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는 건 확실했다. 정확히는 이곳이 아니라 이 장소에 구금되어 있는 인물에게 신경 쓰고 있는 것일테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이제 거의 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아직까진 약간의 응어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지고 메스꺼울 지경이었으니.
‘아직도 질투라니…… 정말이지 멍청한 여자네.’
들불처럼 일어난 감정의 격류가 진정될 때까지 심호흡을 한 윤희지는 천천히 막사 내부의 깊은 곳으로 들어섰다.
군막 특유의 찌든 냄새를 참아가며 도달한 곳은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늑한 실내였다.
아른거리는 불빛의 조도가 다소 낮 다는 점을 제외하면,평범하게 몸을 쉴 수 있는 방이라고 봐도 무방한 장소. 심지어 벽면과 진열장에는 아 기자기한 장식품들과 서책까지 구비 되어 있다. 어딜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포로가 머무는 곳과는 큰 차이가 나는 장소였다.
불편한 눈초리로 실내를 훑어본 윤희지의 눈길이 방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의자,그중 하나에 가냘픈 체구의 여인이 앉아 그녀를 빤히 바라 보고 있었다.
“소냐.”
“……”
“불편한 건 없나요?”
우두커니 앉은 소냐에게선 어떤 대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깐 윤희지를 향했던 시선도,어느새 다시 돌려져 공허하게 정면만을 응시할 뿐 이다.
그녀는 포로로 잡혔을 때부터 쭉 이런 상태였다. 다른 사람이 오건 말건,누가 말을 걸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그저 인형처럼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그나마 사람답게 행동할 때는 깨작이며 식사를 할 때와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할 때가 전부였다.
“들었던 대로네……
비꼬는 것일까? 길게 늘어진 윤희지의 말꼬리가 어쩐지 미묘하다. 윤희지는 반응 없는 그녀 맞은편의 의자를 내빼서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는 첨예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무표정한 얼굴을 직시했다.
조금 전에 만난 소피아와 쌍둥이 자매라고 여겨도 될 만큼 판에 박은 얼굴이다. 다만 눈썹 한 올까지 전부 백발인 소피아의 분위기가 다소 이질적이라면,이쪽은 보다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든 것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고요한 호수를 연상시키는 차분한 분위기. 아직 만발하지 못한 꽃이라는 점도 가산점을 더한다.
소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윤희지는 솔직한 감상평을 내뱉었다.
“참 예쁘네요. 질투가 날 정도로요.”
대화는 여전히 윤희지 혼자만의 메 아리였다. 하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진중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그이가 당신에게 쏟는 관심이 각별하다고요. 일부 병사들은 벌써 당신이 그이의 여자라도 된 것처럼 얘기들을 하고 있어요. 하긴, 포로치고는 지나치게 후한 대우에, 그 김상목 대장이 직접 막사 앞을 지키고 있으니 영 뜬소문만은 아니 겠죠
“……”
“말해 봐요,아가씨. 그이가 바깥에 떠도는 소문이 정말 사실인가요? 그 이가 그런 말을 했어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망연히 외딴 곳을 바라보던 시선이 그제야 윤희지의 눈길과 맞닿았다.
“그랬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호호호.”
윤희지는 별안간 짤랑이는 교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언제 그랬냐는 듯 뚝 웃음을 멈춘 그녀의 표정은 지나칠 정도로 무덤덤했다. 맹랑한 되받아치기에 화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요것 봐라?’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뭔가 있긴 있었던 모양이죠?”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말투는 딱딱 끊어지고,얼굴은 살며시 구겨졌다.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상대의 반응에도 불구하고,윤희지는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그 사람,참 신기하기도 하죠. 십 년을 부대끼고 산 우리에게는 일절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면서,초면인 소녀에게는 이렇게나 집착하는 모습 을 보이네요. 그래도 여자로서 나름대로 매력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 아가씨가 보기엔 어때요? 나, 매력 없어 보이나요?”
지그시 눈을 감은 소냐는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후후. 나이답지 않게 단호하네요. 그 점이 귀엽기도 하고……. 그래도 너무 매정하게 굴진 말아줘요. 오늘은 그냥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찾아온 거니까. 책망하거나 탓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어차피 난 그 사람 눈밖에 난지 오래거든 요. 단둘이 이야기를 한 지가 언제 인지…… 이젠 기억도 안 나네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간직한 여인의 독백은 옆으로 기울어졌던 소냐의 낯빛이 미미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추잡한 소문에 화가 나서 따져 물으러 온 줄 알았더니,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실눈을 뜨고 곁눈질을 하다 윤희지와 눈이 마주쳐버린 소냐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숙연함을 벗고 나이다운 풋내를 풍기는 소냐를 귀엽게 쳐다보던 윤희지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바꿔보죠. 아가씨가 본 검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기대에 충실히 부응하는 인물상이었나요?”
감싸 안는 것처럼 부드러운 말투가 적응이 되질 않는지,잠시 머뭇거리던 소냐는 간신히 말문을 텄다.
“생각과는……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달랐죠?”
“제가 생각했던 검신은 좀 더……”
“광명정대(光明正大). 맞나요?”
소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그녀가 본래 생각했던 검신의 이미지는 딱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실제 만나본 검신은 기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말투 하나하나가 뱀의 헛바닥처럼 독랄했고,음습했으며, 침울하게 가라앉은 그 눈에 선 형언키 어려운 광기마저 느껴졌다.
게다가 그는 노구덕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다. 그런 인간에게서 달콤한 제안을 받았을때의 그 오싹함이란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좋아요. 적어도 누구처럼 구제불능의 콩깍지가 쓰이진 않았네요.”
자조어린 말투를 들은 소냐는 그 ‘누구’가 윤희지 본인을 가리키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가씨가 그 사람 말에 따르든 말든 그건 아가씨의 결정이니,내가 뭐라 할 사안이 아니죠. 다만 내가 말해두고 싶은 건…… 조심하라는 거예요. 그 사람,밖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딴판이니까……
그때였다. 막사 바깥의 천이 젖혀지는 소리가 나더니,김상목의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총사,주군께서 찾으십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
쉬잇. 입술에 손가락을 올린 윤희 지는 작게 도리질을 했다. 저쪽에 괜한 대화를 들려줘서 의심을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여튼,힘내도록 해요. 일정 대로라면 오늘 내로 제네시스에도 착할 테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죽고,포로로 잡히겠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테지만,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레그나토르에 승산은 없어요.”
윤희지는 일부러 ‘포로’라는 단어 에 악센트를 주었다. 그리고 소냐는 그 의미를 모를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결국은 아가씨도 같은 선택지를 강요당할 거예요. 소피아 씨가 그랬던 것 처럼요. 그때가 되면……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라요.”
격려인가,위로인가. 의미 모를 말을 남긴 윤희지는 입가에 띤 처연한 미소와 함께 빙글 몸을 돌려 소냐의 눈앞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