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 쇼핑은 끝나지 않았다
기자재업체 쇼핑의 결과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술잔의 술이 식기 전에 쇼핑을 끝내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지 근 보름 가까이나 됐으니, 궁금해 죽을 지경일 것이다.
누가? 우리 최 상무 말이다. 자재를 총괄하는 최석홍 상무.
“어, 유 이사! 어서 와, 어서 와. 이거 얼굴 보기가 왜 이리 힘들어?”
“부산 가서 돈자랑 좀 하느라요.”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실종신고를 해야 하나 싶었다니까. 허허. 그래서 뭐 돈은 잘 쓰고 왔어?”
우리 회사에서 돈을 관리하는 살림꾼이 어머니라면, 수많은 선박 부품들 관리하는 선박의 어머니는 단연 최 상무이다.
우리 조선소에는 하루에도 수십 대의 트럭들이 오고 가며 기자재들을 내려놓고 있다. 얼핏 보면 자재 수급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세상일이 겉에서 보이는 것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겠냐.
자재 관리. 그 많은 기자재업체들한테 발주서 보내면, 원하는 날짜에 딱딱 도착하고, 쓰고 남은 자재 파악하면서 새 발주서 보내고.
말은 참 쉽지만, 원하는 자재가 제때 도착하는 일은 결코 없다. 사람이 하는 일은 늘 변수로 가득하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기자재를 선정해서 해당 업체와 수량, 납품일정을 다 협의해서 끝내놓지만, 물건 들어올 때까지 긴장의 연속이다. 선박 건조가 하루도 안 끊기고 계속 이어져야 하기 때문에 기자재 담당은 그냥 일 년 내내 긴장만 하며 산다고 보면 된다.
어떤 건 너무 빨리 와서, 어떤 건 제때 안 와서 문제이고. 모든 것이 잘 처리됐다가도, 화물 싣고 오는 트럭 타이어가 난데없이 펑크 나기도 한다니까.
겁박하고 사정하고 욕도 하고 달콤한 소리도 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등등. 온갖 짓을 다 해야 제때 들어올까 말까 한 것이 자재 관리이다. 잘 하는 건 기본이고, 못 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다 먹어야 하는 일.
그 험난한 일을 하는 최 상무는 금융위기 이후로 확연할 정도로 부쩍 늙어버렸다.
그만큼 기자재업체 관리하는 일이 헬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다. 선주들이 조선소 망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우리는 기자재업체 망할까 봐 안절부절인 상황.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멀쩡하던 회사가 야반도주하는 일도 생기고, 빈틈을 노린 신생업체들의 도발도 잦고.
그래서 내가 부산 가서 회를 그렇게 먹고 왔다는 거 아니야!
“이제 기자재 문제로 골치 아플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 많이 줄어들 겁니다.”
“작년부터 그럴 거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이뤄냈구만. 신경 써줘서 고맙네, 고마워.”
“그동안 캐파 늘리고 수주 확보하는 게 급해서 기자재 쪽은 신경을 많이 못 썼습니다. 우선은 급한 대로 중요한 기자재만 확보했는데, 다음에 기회 봐서 더 많은 업체들을 인수할 생각입니다. 아, 물론 이스턴캐피탈이요.”
“우리도 참 복이 많은 회사야. 좋은 투자자 만났고, 그걸 잘 활용하고 있고. 유 이사가 중간에서 고생이 많네.”
“그저 회사 수익 개선하기 위한 몸부림일 뿐입니다. 뭐 굳이 생색을 내자면 우리 상무님 피부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랄까요? 금융위기 여파는 상무님 혼자 다 맞으신 것 같네요. 동안을 자랑하던 그 얼굴은 다 어디로 간 겁니까?”
“허허허. 하도 신경을 썼더니 나 혼자만 폭삭 늙은 느낌이야. 우리 부서가 인력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는소리하기도 뭐하지 않나.”
“죄송하고 고맙고 그렇습니다. 이제 주요 기자재업체들이 한 식구가 됐으니까, 담당자들끼리 마사지라도 받으러 다니세요.”
“허허. 그럴 여유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내 팔자가 그런가 보다’하고 사는 거지 뭐.”
늘 걱정을 안고 사는 최 상무는 팔자 좋은 삶을 애써 거절하고 나섰다. 걱정 많은 사람은 걱정 없는 것이 더 불안한 건가 싶다. 내 걱정을 덜어가 주는 이들이 함께하고 있으니 나에겐 좋은 일이지 뭐.
“근데 말이야. 이번 인수는 그 이스턴캐피탈 거기가 다 맡은 건가? 우리 회사 돈은 안 들어가고?”
“그럼요. 6개 업체 합쳐서 1100억 정도 썼다고 하네요.”
“응? 그거 밖에 안 해? 거기 매출만 합쳐도 5000억이 넘을 텐데?”
“이스턴 측에서는 그것도 비싸게 샀다고 불만이 많아요. 이번에 인수한 회사들이 빚더미에 파묻혀서 똥 씻어내려면 3000억 정도 더 들어갈 것 같다네요.”
“하긴…….”
“그 알짜회사들이 금융위기 터지고 1~2년 사이에 아주 거지꼴이 된 거죠.”
“허허, 참.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금융위기가 좋은 회사들 여럿 죽였네그려. 참, 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그 이스턴캐피탈은 무슨 돈이 그리 많아서 이쪽에 그리 돈을 때려붓는 거야? 이 바닥 살아나려면 앞으로 몇 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
돈이 얼마나 많은지, 왜 그 돈을 주저앉고 있다는 우리나라 조선업에 투자하는지 무척 궁금하지요? 돈 주인이 나라서 그래요.
그렇게 쓰고도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으니, 돈이 엄청 많은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 돈이 돈을 벌면서 불어나고 있으니, 돈이란 것이 그리 무서운 것이랍니다.
늘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연기해야 하는 내 신세. 이번에도 얼렁뚱땅 넘길 수밖에 없네.
“뭐 저도 속내는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조선업에 관심이 아주 많다네요. 거기가 금융위기 때문에 돈을 벌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금융보단 제조업 투자에 중점을 두고 있답니다. 어찌 보면 되게 바람직한 곳이죠.”
“금융이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 제조업이야 벌이는 시원치 않아도 욕심 안 부리면 먹고살 수 있고, 지역경제도 먹여살리고, 얼마나 좋아?”
“욕심부린 회사들도 많았죠. 이스턴캐피탈이 우릴 선택한 것도 우리가 욕심 안 부리고 한 우물만 팠기 때문이 아닐까……. 뭐 제 추측입니다.”
“미국놈들치고 생각하는 것이 남다르구만. 뭐 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즐겁게 일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쪽 사람들 언제 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나면 고맙다는 소리는 꼭 해야겠어.”
“자재관리 잘 해서 생산성과 수익성 개선하는 것이 감사의 뜻을 전하는 걸 겁니다.”
진짜 이런 천사 같은 투자자가 어디 있어. 최 상무 아재요, 그러니까 나한테 잘 하세요.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의 자전거 공장이 따로 없다니까.
요즘 조선업이 어렵다는 얘기가 유행처럼 퍼지면서 나타난 변화가 몇 가지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렇듯이 불황이라는 얘기가 나오면 조이고 잘라내기에 집중한다.
기존 직원들 내보내고, 채용 막아서 인건비 줄이기. 인건비가 제일 만만하니까.
그런 이유로 생산에서는 쉽게 채용하고 쉽게 내보낼 수 있는 하청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빡세고 위험한 일은 하청한테 맡기면서도 돈도 적게 들고. 불황을 오히려 학수고대한 것 같다니까.
그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고.
그런데 설계를 외주로 돌리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해외 유수의 엔지니어링업체에 대적할 전문 엔지니어링 회사가 필요하다고 포장하지만, 결국 인건비 줄이기 일환이다. 그 많은 설계인력을 끌고가기 싫다는 것이지.
우리 회사는 살아남은 조선사의 행태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뭐? 기술 좋은 생산직들이 인력시장에 대거 출몰하고 있다고? 그럼 전부 데려와야지!
뭐? 설계 외주에 불만을 품고 사표 낸 설계자들이 많다고? 이게 웬 노다지야. 전부 데려와야지!
아버지는 당연히 언성을 높였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나 뭐라나. 내가 그거에 굴할 놈인가? 이 바닥 일은 사람이 하는 거다. 그깟 인건비 비중 좀 높아지면 어때? 인재는 다다익선인데.
“허허. 그러고 보면 우리 유 이사가 직원들 그렇게 닦달하는데, 그게 또 좋은 결과로 이어진단 말이지. 의도했던 안 했건.”
“아이고, 누가 들으면 제가 직원들 엄청 갈구는 줄 알겠습니다.”
“정 전무님 말로는 아주 죽겠다던데? 허허.”
“그래요? 전무님한테 가서 좀 따져야겠네요. 최 상무님이 그렇게 얘기했다고 하면서…….”
“이거 원,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어. 허허허.”
뽑은 직원들 놀면 심심할까 봐 일거리 좀 줬다고 저리 앓은 소리가 나온다니까. 난 그저 월급 주는 만큼만 뽑아먹는다는 등가원칙에 의거했는데, 뭐 죽는소리들을 그리 하는지 원.
“상무님 자재 관리 힘드실까 봐 대주주 찾아가서 기자재업체 인수해 달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왔는데, 이런 저의 노력을 몰라주시다니요. 살짝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허허허. 알았대두. 우리 유 이사 고생하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그래서 정말 정 전무님이 죽겠다고 하셨습니까?”
“아이고, 허허. 내가 죽는소리 그만하라고 단단히 혼내 놓겠네. 그럼 됐지?”
“눈물이 그새 말라버렸네요. 저희 하던 일 얘기나 마저 하시죠.”
“참! 그거 잘 진행되고 있는 거지? 기자재업체들 인수야 잘 마무리됐으니까 걱정할 것 없지만, 그건 행여나 문제가 생기면 안 되네.”
“아이고, 이거 또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응? 왜 또?”
“제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그거라고 하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 맞네, 맞아. 허허. 그 뭐냐. 아이고, 이름이 생각 안 나네. 덴마크 걔네들 있잖아?”
“올보르그랑 합작사 세우는 것 말씀인가요?”
“아, 그래, 그래. 그거 중요하다고. 이제 곧 머스트 물량 건조 들어가는데, 올보르그가 기자재 제때 납품해줘야 해. 그거 늦어지면 배만 진수시켜놓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도 있어.”
“걱정 마세요. 다음 달에 공장 착공 들어가서 빠르면 올해 말부터 가동 들어갑니다. 뭐 이것저것 인증받느라 시간 좀 걸리겠지만, 아무리 늦어도 내년 상반기부턴 제품 쭉쭉 나올 겁니다.”
머스트가 빨아주는 덴마크 기자재업체 올보르그와 세우기로 한 합작사 준비도 다 끝났다.
아버지는 왜 5대5로 하기로 한 걸 8대2로 바꿨냐면서 돈이 썩어나느냐고 한 소리했지만, 나중에 그 소리한 걸 민망해 하실 거다.
걔네가 만드는 기자재들이 머스트의 2만TEU급 컨테이너선 바람을 타고 얼마나 잘 나가는데! 우리한테 떨어질 수익을 생각하니 너무 달달해서 충치 생기게 생겼어.
그것뿐이야? 투자금 늘리는 조건으로 올보르그한테서 특허도 몇 개 가져왔지.
지금이야 잘 안 쓰이는 것들이라 올보르그는 선심 쓰듯이 편히 쓰라고 했지만, 나중엔 얼마나 배가 아플지 모르겠다. 배탈약 좀 사서 보내줘야겠어.
이렇게 부지런히 파종했던 것들이 뿌리를 잘 내리며 풍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니 걱정을 해야겠어요, 안 해야겠어요?
“유 이사가 걱정 말라면 걱정 말아야지. 국내도 문제없고, 해외 것도 문제없으면, 이제 근심할 이유가 없지. 허허.”
“상무님은 이제 말 안 나올 정도로 납품 단가 조절해 가면서 구내식당에 고기반찬 올라올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
“매출은 자네가 키울 테니까, 수익은 내가 책임지라는 소리 같네.”
“아이고, 상무님 앞에서는 무슨 말을 못 하겠습니다.”
“허허. 아니라고는 안 하는구만.”
최 상무는 또 죽겠다는 표정을 선보였지만, 얼굴에 가득한 여유로움마저 감추진 못했다.
그래, 이제 좀 살 것 같습니까? 제가 상무님 웃는 얼굴 좀 보겠다고 4000억 넘게 돈을 썼습니다요. 그거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요.
“우리 회사가 그동안 성장만 하느라 내실을 충분히 다지지 못하긴 했어. 뭐 내 책임도 크지. 급해서 자재 비싸게 받아온 것도 있고, 상생한다고 남들처럼 못 한 것도 있고.”
“잘 해 오셨으면서 그리 겸손을 떠십니까? 상무님 덕분에 우리랑 거래하는 업체들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도 우리가 잘 돼야 더 잘 챙겨주는 법이지. 매출이 빠르게 오르고 있는데, 수익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 헛장사하는 거야. 내가 수익개선을 위해 열심히 달려보겠네. 뭐 그렇다고 해서 기자재업체들 쥐어짜겠다는 건 아니고. 허허.”
“기자재업체들한테 전화해서 상무님 경계경보 발령해야겠습니다.”
“허허허. 나도 이제 실력 발휘해야지. 그나저나 이제 유 이사는 좀 한가해지겠네? 이래저래 벌여놓은 일들 마무리돼 가고 말이야.”
한가? 내 두 번째 삶에서 한가란 단어가 있었던가?
기자재업체 쇼핑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한 발 더 남았다고.
진짜 거액을 들여야 하는 마지막 미션. 그게 끝나고 나면, 그때 한가란 단어가 있었는지 살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