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196)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자.
완전 발개진 얼굴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레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 은새랑 송하늬가 직접 물어보라고 했구나.’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걱정이긴 했지만, 내 결론은 이랬다.
···이런 레아가 너무 귀엽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너무 고마운걸?”
“···.”
본인답지 않게 발개진 얼굴로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한층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잠시, 서로 투닥거리며 농담을 하던 가운데.
나는 또 하나의 용건을 입밖으로 꺼냈다.
“혹시 괜찮으면, 부산영화제에 같이 안 갈래?”
“영화제?”
영화제 기간에 한국을 방문하는 배우의 통역을 담당하게 됐고 이틀간 부산에 머물 예정이다.
그렇게 설명하자 레아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의 정리를 마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다음 주까지 과제할 게 좀 있긴 한데, 영화 한두 편 정도는 괜찮겠지?”
부산에 가서 영화도 보고, 공부도 하며 과제도 하겠다는 레아.
···어쩐지 그녀라면 과제는 물론 스터디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문득 무서워지고 말았다.
여하튼.
우리는 치맥을 즐기며 부산에서의 일정을 즐겁게 논했다.
심야 영화도 보고, 해운대도 가보고, 부산의 정통 돼지국밥을 맛보고···.
그렇게 부산 체류 일정이 어느 정도 결정되고 나자, 레아가 문득 진지해진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나도 자기한테 좋은 소식 전할 거 있는데.”
“좋은 소식?”
“응, 다른 게 아니고···.”
기대감으로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10월 중순에 처음으로 정식 동시통역 필드에 나가기로 했다고 말이다.
“성주원 교수님이 직접 데뷔시켜주신대.”
“···!”
레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정식 졸업도 하기 전, 동시통역사로 현장에 나간다는 것 자체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성주원 교수님이 직접 데뷔를 시켜주다니.’
동시통역 쪽에는 ‘데뷔를 시켜준다’라는 말이 있다.
이게 뭐냐면, 아무리 수업 때 동시통역을 잘하는 학생이라도 처음 현장에 나가면 상상도 안 될 만큼의 긴장과 불안에 사로잡히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뇌가 오류를 일으켜 아웃풋이 엉망진창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 만큼, 처음 필드에 나오는 동시통역사에게는 반드시 10년차 이상의 경험 많은 통역사가 붙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 식으로 초짜와 베테랑이 2인1조를 이룬 채 몇 번 정도 동시통역 경험을 쌓고 나서야, 비로소 ‘데뷔를 치른’ 어엿한 한 사람의 정식 통역사로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여기 이 레아는, 역대급이라고 불리는 성주원 교수에게 그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졸업하기도 전부터 동시통역 필드에 서게 되는 것.
“진짜 축하해, 레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레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가 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기분이라고 하자, 레아가 생긋 웃었다.
“고마워. 근데 나, 엄청 긴장되는 거 있지.”
“당연히 긴장되겠지만, 성 교수님이 계시잖아.”
“응, 그래서 다행이긴 해.”
벌써부터 심장이 막 두근거린다는 그녀를 나는 몹시 사랑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내 여친입니다, 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은 기분이랄까.
“통역 준비하려면 바빠지긴 하겠네.”
내 말에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것도 그렇고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논문도 써야 할 것 같아.”
“아, 졸업 논문.”
통대에서 졸업 논문은 형식상의 졸업 요건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큰 부담 없이 임하고 있지만···.
‘레아처럼 박사 과정에 고려하는 경우는 얘기가 좀 다르겠지.’
“자기도 알다시피 통대에선 연구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잖아.”
그러니 아예 박사과정에 가서도 이어나갈 수 있는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는 게 좋을 거라고 성주원 교수가 충고했다는 것.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을 논문 주제로 삼으려고.”
레아는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흔들림 없는 눈빛 때문일까.
“···의미 있는 주제네.”
이유를 알 수 없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나는 한 박자 후에야 말을 받았다.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젠 정말로··· 나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생맥주집을 나서니 어느새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저멀리 어딘가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나와 레아는 가을밤 특유의 정취를 느끼며 거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찬 공기와는 대조적으로 맞잡은 손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지던 그때.
“근데, 나 솔직히 말하면···.”
여태 침묵을 지키던 레아가 입을 열었다.
“아주 조금, 불안해.”
“···불안하다니?”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다섯 걸음 정도 더 걷고 나서야 망설이며 말했다.
“나한테 이런 말들, 되게 안 어울린다는 건 아는데···.”
걸음을 멈춘 레아가 나를 돌아보았다.
취기 때문인지 살짝 달아오른 것이 더 아름다운 얼굴에, 미세한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레아 데주.”
“···응?”
“자기가 전에 그 배우의 수행통역을 담당했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인 그녀가 더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이름이 같은 것도, 괜히 신경 쓰이고.”
“···.”
전혀 의외의 말에 사고가 잠시 멈추었지만.
나는 금세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레아가 질투를 하고 있다, 이건가.
어쩐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맞잡은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진짜였다.
“···레아, 잠깐 고개 좀 들어볼래?”
“···.”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색이 옅은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내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나는 24시간 내내 불안한 거 알아?”
“···괜히 하는 말이면서.”
“아닌데?”
“···.”
불안하지만 늘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다, 라고 하자 레아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리고 사실.’
한 번도 그녀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아니 어쩌면 나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레아 데주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동기 레아의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 말까지는 굳이 할 수 없었지만, 이미 레아는 앞서 내가 했던 말로도 충분한 듯했다.
“···알겠어.”
그 말과 함께 곧바로 내 품에 쏙 안겼으니까.
그 따스한 체온과 달콤한 향기, 그리고.
“사실은 나, 단둘이 부산 가는 거 엄청 기대되는 거 있지.”
반칙으로 느껴질 정도의 귀여운 말까지.
···내가 그대로 그녀에게 입을 맞춘 것은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
그로부터 2주간.
평소와 마찬가지로 수업 준비와 과제, 스터디를 해나가는 것은 물론.
‘부산국제영화제 통역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지.’
앞서 했던 통역들도 거의 새로운 분야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회귀 전에 비슷한 형태의 현장 경험을 쌓아봤다면.
이번처럼 영화제 통역을 해보는 건 회귀 전까지 통틀어 난생 처음이었다.
‘영화제 통역이 뭐야, 영화제에 가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지.’
그러고 보니.
영화를 꾸준히 좋아했는데도 영화제에 직접 가볼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같이 갈 사람이나 기회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통역은 좀 부담이 되긴 하지만, 영화제 자체는 엄청 기대되네.’
그리고 영화제가 시작되기 불과 며칠 전.
나는 선욱재 교수의 교수실에 잠깐 들러 그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터였다.
‘선욱재 교수는 영화제와 여러모로 인연이 깊은 인물이니.’
한명외대 통대에 들어오기 전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맹활약하는 미남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렸는데.
부산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시상식을 진행한 경험이 있었으니 말이다.
“음, 뭐 영화제 통역이라고 딱히 특별한 게 있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운을 뗀 선욱재 교수는 막상 다양한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다.
영화제에 오는 팬들의 성향이라든가.
무대인사나 GV 행사 특유의 분위기라든가.
시상식마다 분위기가 좀 다른데 그중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지 등등···.
“물으나 마나 한 얘기이겠지만, 영화는 여러 차례 봤죠?”
어디 영화만 봤을까.
대본도 정독했고, 관련 기사 자료도 샅샅이 찾아보았으며.
특히 클로드 마리니 감독의 인터뷰들은 이전 작품에 관련된 것들도 대부분 숙지한 터였다.
“네, 프로덕션 측에 따로 요청해서 받았습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이 개봉하지 않은 탓에, 보안이 엄격하게 걸려 있는 디스크를 따로 받아서 몇 번씩 감상했다.
첫 번째는 그저 압도되어 넋 놓은 채로 봤고, 두 번째는 장면 장면을 음미하며 보았으며.
세 번째는 그 이면에 숨겨진 함의를 포착하며 보았다.
“···그 후로도 두 번인가 더 봤더니, 이제는 거의 머릿속에서 영화 장면이 자동 재생될 지경이네요, 하하.”
내 말에 선 교수가 씩 웃었다.
“이것 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 정도면 나한테 조언을 구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굳이 물어보러 오는 걸 보면, 찬영 씨도 참 성실한 성격이란 말이에요. 아, 그건 그렇고.”
선 교수는 화제를 전환해 마고 토렐리 통역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찬영 씨가 인사했던 동시통역사들 기억나요?”
“그럼요.”
“그 둘이 안부 좀 전해달라고 하던데. 그리고 동기인 한지선이 말로는···.”
한지선 선배가 무슨 말을 했을까 싶어 문득 긴장하는데, 선 교수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찬영 씨 실력도 실력이지만, 센스에 감탄했다고.”
“···.”
“대체 우리 동기들한테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아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던데.”
“아닙니다.”
아, 그리고- 라고 말을 이은 선 교수가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이런 말도 했구나. ···그 친구는 부스 안에 있기엔 너무 아까운 스타일이라고.”
“네?”
“아니, 찬영 씨가 동시통역을 희망한다니까 한지선이가 그러더라고.”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선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무대 위에 서 있을 때 온전히 빛나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 찬영 씨가 바로 그런 사람인 것 같다고 말이죠.”
“···.”
무대 위에서 있을 때 온전히 빛나는 사람.
···그 말을 들은 순간, 문득 마고 토렐리의 대담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직후의 느낌이 기억났다.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쾌감.’
그 거대한 무대와 수많은 시선에 압도되는, 혹은 잡아먹히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기분으로 위태롭게 통역을 이어갈 때마다 느껴지던, 현기증 나는 아찔한 쾌감.
···그런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선욱재는 이렇게 말했다.
“무대 위 통역은 또 그런 맛이 있죠, 안 그런가요?”
“···네.”
선 교수 역시 무대 위에서 유독 날아다니는 타입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제행사에서 섭외 1순위로 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했던가.
“타고난 성향도 성향이지만, 거기에 찬영 씨는 인지도와 스타성까지 갖추고 있으니 다양한 길을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한지선이 그 친구 말은.”
나는 그 말을 하나 하나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뭘요, 난 들은 걸 전해줬을 뿐인데. 아, 맞다. 근데···.”
선욱재 교수의 얼굴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찬영 씨 이번에 레드카펫 밟게 되는 거 아니에요?”
“레드카펫이라뇨.”
“전에 포토월 행사에도 섰잖아요. 그러니 이번에도-”
“설마, 아닙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은 아무나 밟는 것이 아니다.
영화제 조직위 측에서 사전에 엄선한 인물들, 배우와 감독은 물론이고 업계 관계자나 각계의 유명인사들이 포즈를 취하는 것.
‘작년엔 대략 300명 정도가 레드카펫에 섰다고 했지.’
내가 고개를 젓자, 선 교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왜요? 나도 레드카펫에서 포즈 취해봤구만.”
“···교수님이야 아나운서이셨잖습니까.”
“찬영 씨는 그때의 나보다 더 유명인인데, 레드카펫에 못 설 이유가 어딨어요 하하.”
선 교수의 농담에 진땀을 흘리던 나는 잠시 후 교수실을 빠져나왔다.
탁, 하고 등 뒤로 문을 닫은 순간-
부우웅, 하고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누구지.’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망설임 없이 받았다.
“여보세요. 한명외대 통대 센터 소속 박찬영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어버버거리며 이렇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네? 어, 저, 그러니까···.”
왜냐하면, 내게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사람이며.
그것도 심지어···.
– 호호, 당황하셨나 봐요. 방금 말씀드린 내용의 요점만 말하자면.
레드카펫 참가자 선정 담당자였기 때문이었다.
– 박찬영 통역사님이 저희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 참가자로 선정되셨다는 거예요.
···이게 대체 무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