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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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페티는 21세기 최고의 스타 경제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내가 회귀하기 직전에는 이러저러한 오류가 발견되어 비판도 받기는 했지만.
출간 당시만 해도 센세이션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그의 이론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냐를 떠나, 일단은 그가 시도한 분석 방식 자체가 워낙 독보적이었고.
‘1700년대부터 3세기에 걸친 방대한 양의 자본 및 소득 데이터를 분석했다는 거지.’
그렇게 도출한 장기적 사이클을 통해 키페티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경제성장률은 자본의 수익률을 쫓아갈 수 없는 만큼, 불평등이 심화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내가 방금 그에게 던진 질문은, 한 시대의 유명 석학을 향한 질문일 뿐 아니라.
회귀 전 그의 저서를 담당한‘번역가’로서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답변을 기다리는데, 키페티가 입을 열었다.
“흥미로운, 그리고 의미 있는 질문이군요.”
“···.”
“좋아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된 사회가 왜 문제가 되냐고 물었는데,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그가 청중을 죽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부를 독점한 소수는 자식에게 그것을 물려주려 하겠죠. 그러다 보면 스스로의 힘보다는 물려받은 재산을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이 훨씬 쉬운 사회가 될 거고요.”
쉬운 설명, 그리고 선 교수의 명확한 통역.
덕분에 사라졌던 청중의 호기심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고.
“그런 사회에서 경제적 인센티브의 의미는 퇴색될 것이고, 민주주의는 이익집단의 손에 휘둘리게 될 것이며···.”
결국엔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 토대가 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자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저는 불평등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 그 불평등에 마땅한 이유가 있느냐이죠.”
이제 청중은 강연이 시작된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 사회가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될 테니까요.”
질문에 대답이 되었을까요? 라는 선 교수의 통역에 나는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귀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선욱재 교수의 멘트가 이어졌다.
“의미 있는 질의응답이 오갔네요.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조금 분위기가 나아졌다 싶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음, 아무도 없을까요···.”
선 교수가 아쉬워하는데, 돌연 키페티가 입을 열었다.
「Bon, alors cette fois c’est moi qui pose la question(좋아요, 그럼 이번엔 내가 질문하죠).」
「Pardon(네)?」
그는 선 교수를 돌아보며 뭐라고 속삭였고.
선 교수는 당황한 가운데서도 진행요원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야, 아무래도 찬영이 널 보는 것 같은데.”
추의 말처럼 진행요원이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지.’
그와 동시에.
“좋아요. 그럼 이번엔 제 쪽에서 질문하겠습니다.”
키페티의 말을 한발 늦게 통역한 선 교수의 눈 또한 나를 향했다.
“···다름 아닌 방금 전, 내게 질문했던 학생에게 말이죠.”
요원에게 뻘쭘하게 마이크를 받아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의 질문을 기다렸다.
키페티의 눈이 흥미롭게 반짝이는 듯했다.
“나는 이런 강연에서 영감을 찾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편안하게 본인의 생각을 얘기해주면 됩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유례가 없는 역질문에 선 교수는 꽤 당황한 눈치였지만.
도리어 나는 이 예상 외의 상황을 마음속으로 반기던 터였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아닌가.
“사회의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아이디어 하나만 얘기해줄래요?”
하.
나는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회귀 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지금 이 상황에 오버랩되는 듯해서.
“음, 글쎄요. 막 대단한 아이디어까진 잘 모르겠고···.”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듯 말했다.
“세금?”
“응?”
“다들 공감하시겠지만, 나라에서 세금을 참 많이도 떼가잖습니까.”
그러자.
객석의 몇몇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인데, 특히 직장인이나 공무원들은 손에 쥐어보기도 전에 세금부터 나가버리니.”
편안한 분위기 속, 키페티만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운데.
“근데 이게 웃긴 게, 또 어떤 경우에는 재산은 많은데 일정한 근로소득이 없다고 복지 혜택을 더 받기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때.
키페티가 내 말을 가로챘다.
“일해서 번 돈보다는, 이미 갖고 있거나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번 돈에 세금을 더 매기는 게 낫다, 이 말이죠?”
내게 대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듯한 말투였다.
“어, 그게··· 그렇게 되나요?”
능청스레 대꾸했지만.
사실 저건 키페티가 1년 뒤에 내놓을 새로운 경제서이자, 내가 처음으로 번역한 책 의 핵심 주장이었다.
‘그 책의 후기에 이런 내용이 있거든.’
어떤 강연회에서 청중과 대화를 나누던 중.
‘월급의 거진 절반을 세금으로 떼어가니 일할 맛이 안 나요.’
객석에 앉은 누군가가 토로한 불만에 번개 맞은 듯 영감을 얻었고.
그것이 이 세금 혁명의 주요 골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나와 나눈 대화가···.
‘이 석학에게 스파크가 되어줄 수 있기를.’
아니나다를까.
토마 키페티가 눈을 번뜩이며 요점을 정리했다.
“요컨대, 근로소득보다는 금융소득의 세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죠.”
*
강연이 어찌저찌 끝난 후.
동기들과 떨어져 무대 뒤편으로 향한 나는 곧바로 키페티 교수를 찾았다.
그는 선욱재 교수 말고도 어느 여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선 교수님.”
나를 발견한 선욱재 교수가 활짝 웃었다.
“찬영 씨! 덕분에 살았어요. 아, 무슈 키페티.”
선 교수는 키페티 쪽을 돌아보더니 내가 자신의 제자이며, 프랑스어 통역 전공자라고 소개했다.
「Pas étonnant(놀랍지 않군요). 어쩐지 내 강연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했더니.」
농담처럼 말한 키페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악몽으로 남을 뻔한 오늘 강연이, 학생 덕분에 최고의 행운이 될 것 같아요.」
「최고의 행운이요?」
모르는 척 되묻자 하하 웃는 키페티.
「덕분에 아주 기막힌 영감을 얻었거든요.」
그 이상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나는 그 내용이 무엇일지 충분히 짐작갔으니.
한편.
그의 옆에 서 있던 여성이 나를 아까부터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뭐지.’
보아하니 학교 관계자는 아니고 키페티 쪽 사람 같은데.
“근데 여긴 무슨 일이에요?”
선욱재 교수의 말에 나는 가방에 넣어둔 원서를 꺼내 들었다.
“연사님께 사인을 받고 싶어서요.”
내 손에 들린 얄팍한 책을 발견한 키페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C’est pas possible(말도 안 돼)! 이걸 대체 어떻게 구한 겁니까?」
2주 전, 키페티가 이곳에서 강연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마존 프랑스로 간신히 구한 것으로.
세간에는 이 그의 첫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을 다 읽고, 교수님의 또 다른 책이 없나 찾아보다가 운 좋게 구했습니다.」
「와···.」
감탄사를 내뱉은 토마 키페티는 내 책에 묵묵히 사인을 해주었다.
[Avec sincère gratitude(진심 어린 감사를 담아), Thomas Kipetty.]씩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거 제가 대학 때 쓴 기고문들을 모아서 낸 건데. 초판도 소화 못 한 채로 절판된 비운의 책인 거 알아요?」
···지금이야 그렇겠지.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책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몇 년 뒤면 이 책의 가치는 재고될 것이고.
‘키페티의 숨겨진 데뷔작’이라는 이 초판본은 리미티드 에디션의 가치를 인정받아 수집가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희귀본이 된다.
거기에 키페티의 사인까지 있다?
‘게임 끝이지, 그냥.’
나는 마지막으로 키페티와 뜻 깊은 악수를 나눈 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왔다.
*
찬영의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던 키페티가 선교수를 돌아보았다.
「무슈 선, 아까 저 학생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찬영, 박찬영입니다.」
「저 박찬영 씨뿐인 것 같던데.」
「···네?」
「아까 강연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그 말에 선욱재 교수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키페티는 딱히 동시통역의 수준이 낮았다는 점을 지적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을 졸업할 때쯤 저 학생이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무척 기대되는군요.」
그 말에 선욱재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한편.
아까부터 박찬영을 유난히 주시했던 여성은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아까 그 학생, 통번역 전공자라니 우리 쪽 일을 맡겨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국내 최대의 종합출판사로 손꼽히는 ‘함영사’의 저작권 팀장 윤주하.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향후 스타 저자가 될 전도유망한 학자들에게 침을 발라놓는 것!’
이를 위해 함영사는 프랑스의 몇몇 학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었고, 그곳에 소속된 키페티 교수를 만나러 온 것도 그 연장선상.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온 김에 강소희 교수도 보고 가야겠네.’
함영사와 십여 년간 함께 작업해온 강소희 번역가.
그녀의 얼굴도 보고 안부도 전할 겸, 유망한 번역가 지망생을 소개받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그리고 잠시 후.
“···꼭 본격적인 번역에 나서지 않더라도, 책 보는 눈이 좀 있는 분이면 좋을 것 같아요.”
번역까지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리뷰서만 써줄 만한 사람이라도 괜찮다.
“괜찮은 리뷰어를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인 거 아시잖아요.”
윤주하 팀장의 요청을 들은 강소희 교수는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음, 염두에 둔 학생이 있긴 한데.”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
그주 주말.
좋은 소식이 있다며 집으로 오라는 형의 말에 그쪽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형에게 부탁할 게 있었으니 잘되었다 싶기도 했고.
“좋은 일이 있다더니, 보통 좋은 소식이 아닌가 보네?”
말술인 어머니를 닮은 나와는 달리, 형은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아버지를 닮았다.
그 탓에 평소에는 술을 잘 안 마시는 편인데, 웬일로 비싼 와인을 사다놓은 것을 보고 한마디하자.
“아, 좀 많이 좋은 소식이지.”
형이 활짝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전부터 얘기가 있던 승진 건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물론이고···.
“그게 다가 아니야.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새로 기획 중인 임프린트 있다고 했지? 거기 편집장을 맡게 됐다.”
“와, 임프린트 편집장? 그건 진짜 대박인데?”
임프린트.
출판사 내의 독립된 브랜드를 말한다.
“진짜 축하해, 형.”
그곳의 편집장을 맡게 되었다는 건, 형에게 독립된 권한이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
“그래, 다 네 덕분이다. ···무슨 뜻인지 알지?”
“아, 민망하게 왜 이래. 다 형이 잘해서 잘된 거지.”
우리는 그 이상 얘기하지 않았지만.
형이 수아 일로 내게 늘 고마워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내 입장에서도 형의 승진은 몹시 고무적인 일이었는데.
‘회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때의 형은 승진은커녕, 하루하루 버티기 급급한 상황이었다.
수아의 입원이 길어지니 형수님이 회사를 관두고 병원에 살다시피하며 아이를 간병해야 했고.
형은 형대로 대리운전까지 해가며 병원비를 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형수님도 계속 회사 잘 다니시지?”
“응. 지난번 출간한 책 반응이 생각 외로 좋아서 이번에 인센티브도 좀 들어왔어. 다음 달에는 담당하는 작가가 방한을 하는데···.”
둘이서 꾸준히 벌고, 수아도 아픈 곳 없이 어린이집에 잘 다닌단다.
그야말로 걱정할 것 없는, 평범하고도 행복한 가족의 일상.
···이것 또한 내가 회귀해서 생긴 아주 긍정적인 나비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맞다, 찬영이 너 나한테 뭐 보여줄 거 있다며.”
“아, 안 그래도 형.”
나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프랑스 그림책이네?”
얼마 전 통대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다시피할 때, 잡지와 함께 대출해온 것.
페이지당 한두 줄의 문장이 전부인, 서너 살짜리 아이들이 보기에 딱 좋은 그림책이었다.
“이거 말이야. 형네 출판사에서 한 번 검토해보지 않을래?”
그 말과 함께 미리 써온 검토서를 내밀자, 형의 눈이 커졌다.
“검토서도 다 써온 거야?”
“그게···.”
형이 다니는 출판사는 문학 전문이지만, 해외의 아동 문학도 폭넓게 출간하는 터.
“형이 보고 괜찮다 하면, 내가 번역해보고 싶어서.”
곧 다가올 수아의 생일.
내 인생을 다시 살게 해준 조카에게, 기억에 오래 남을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