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17
117
사령술사는 속삭임을 들었다.
소리의 서가 자신을 부른다.
무의식중에 손을 뻗으려던 토드가 망설였다.
“흑색 학파의 유물을 제게 내어주는 것이, 교단의 의지입니까?”
기젤은 예의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제가 모든 교구의 목소리를 대변하진 않습니다.”
“이걸 섣불리 반출했다간 당신에게 불이익이 가는 게 아닌지요.”
드물게 기젤은 흐릿하게 웃었다.
“사려 깊게도. 걱정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는 적들로부터 이 물건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비단 교단의 적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전 교단의 적이 아니라는 겁니까?”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없습니다.”
토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 의견에 다른 교구의 주교들도 동의할진 모르신다는 거군요.”
“애석한 일이지요. 높은 곳에 다다를수록 일광은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구주께 가까워질수록 겸허해져야 하는 법인데, 교회 안에는 바닥이 아닌, 천장만 올려다보려는 자들이 많답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쓸어내렸다.
“저와는 다른 의미로 눈이 멀어버린 이들입니다. 그들에게선 구주의 빛이 떠나갔으며, 진정한 적을 구분할 지혜마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탐욕만이 그들을 이끄는 지침이고요.”
기젤의 목소리에서 은은한 적의가 느껴진다.
더욱이 기젤은 사후 성인으로의 추대가 확정될 정도의 저명한 거물임에도, 그녀와 뜻을 달리하는 자들이 많다는 건 교회 내부의 분열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함을 암시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기젤이 광륜표를 비추자, 서책을 얽매던 사슬들이 떨어졌다. 토드는 조심스레 서책의 일부를 받아들었다.
토드의 손에 잡힌 서책은 저절로 책장을 펼쳤다. 뼈로 만들어진 책날개는 마치 양손을 뻗은듯한 형상이었다. 사령술사는 기꺼이 익숙한 손길을 받아들였다.
‘견진의 축가.’
그대여, 기뻐하라.
나의 품에서 그대가 열매를 맺을 지어니.
이제 그대는 하수인이나 추종자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으며, 경지에 도달한 이들에게 은혜를 하사할 수 있노라.
되찾은 책장은 견진의 축가였다. 이젠 은혜를 통해 하수인을 간접적으로 강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토드가 직접 선별하여 개별적인 육성을 짤 수 있는 방도가 열린 것이다.
‘이것도 추후 연구할 여지가 있네. 효율을 잘 따져봐야겠어.’
하수인의 역량은 곧 사령술사의 힘이다.
먼 길 끝에 알찬 수확이다. 뻗어 나온 손가락들은 토드의 살갗을 헤집고 체내로 파고들었다.
완전히 서책을 섭식한 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복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방으로 돌아온 토드가 곧장 물었다.
“허면 기젤. 태양신께선 당신을 통하여 제게 호의를 베푸신 건데, 어찌 그분의 수족인 성전사들이 여태 저를 쫓았던 겁니까? 저로선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기젤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예상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아니요. 토드. 영원의 성화가 꺼진 이후로 구주께선 구체적인 통고를 내리지 않으십니다.”
“예? 분명 카셀미어 주교후는 전언이 있다고···”
그녀는 광륜표를 들어 보이며 속삭였다.
“그분께선 빛으로 하여금 피조물이 나아갈 길만 밝혀주실 뿐이지요. 이건 순전히 제 주관에 의한 판단이랍니다.”
토드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이게 당신의 독단에 의한 결정이라고요?”
언뜻 그녀의 입가가 미세하게 휘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대는 비교적 근래에 들어 제게 발견되었답니다. 그로부터 저는 줄곧 그대를 주시하고 있었지요.”
여태껏 모종의 권능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니, 조금 오싹한 기분이었다.
“저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건.”
고개를 기울인 기젤은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곡조이긴 한데, 잘 떠오르진 않는다.
“어느 예배당에서, 이 노래를 들어보시지 않으셨나요.”
토드의 눈이 흔들렸다.
뮌파흐의 예배당에서, 자신을 부르던 정체불명의 노랫소리. 그땐 막연히 영가들의 염원이 일으킨 현상이라 여겼었다.
“그게 당신이었다고요?”
기젤이 미소지었다.
“육신의 눈을 잃었지만, 저는 구주의 성사 덕택에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본답니다.”
그녀가 손을 모은 채 말을 이었다.
“세간에 저는 구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저는 구주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뮌파흐의 예배당에는 구주의 손길을 애타게 부르짖는 이들이 남아 있었죠.”
당시 이리공의 병사들은 예배당에 있던 이들을 모조리 끌어내 공양했다.
얼굴을 찌푸린 토드가 중얼거렸다.
“분명 끝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기젤은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네. 그들의 성토가 제게 닿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 그들은 지나친 고통을 겪은 끝에 천상에 귀의하지 못하고, 영영 지상을 배회하는 신세가 되었었죠.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을 위해 무력하게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가 눈을 떴다.
“그런데 돌연 그들의 절규가 멈추더군요. 저로선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을 달래는 듯한 휘파람이 제게도 들렸고, 그 뒤엔 고요한 안식이 있었습니다.”
토드를 바라보는 기젤의 시선에는 진심 어린 존경이 담겨 있었다. 토드로선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행동이라 멋쩍은 기분이었다.
망자를 인도하는 건 사령술사로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던 탓에.
“덕분에 그대의 존재를 알 수 있었고, 저는 미력하나마 제 권능이 닿는 장소로 그대를 불러냈었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요.”
거기서 성물을 획득했던 게 기젤의 안배 덕택이었나. 그때를 회상하던 토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그 촛대. 촛대를 녹인 게 신성모독을 하려고 벌인 짓은 아니었습니다. 별 뜻이 있는 건 아니었고···”
기젤이 살포시 웃었다.
“괜찮습니다. 성물은 표상이 아닌, 형태에 불과하니까요. 그를 통해 고통받는 이들을 조금이나마 덜려던 뜻이 실현되었다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 것이겠죠.”
어색한 미소를 흘린 토드가 중얼거렸다.
“관대한 아량에 감사를.”
“그대가 예배당에 들어선 덕에 구주의 빛이 미쳤고, 그 뒤로 저는 그대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대의 여정 중에 행한 위업이나, 선행도요.”
아직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예상하지 못한 인물에게서 들어서 그런 걸까.
“선행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분명 그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엔 닿을 수 있는 대로의 선을 행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고결한 인간이라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저는 사령술사로서 시신들이 방치된 채 뒹구는 꼴을 묵인하기 어려웠을 뿐입니다. 저를 너무 띄워주시는군요.”
“이토록 어두운 시대에는 작은 선행을 행하는 것조차 적지 않은 대가가 따르는 고행이니까요. 그대는 이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젤은 토드의 손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토드. 그대가 비록 우리와 방식은 다르나, 분명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대가 여로의 끝까지 도달하길 바라고 있답니다.”
대앵-.
종탑의 청아한 소리가 정오를 알린다.
손을 떼어낸 기젤이 나직이 덧붙였다.
“적어도 그대만큼은. 길에서 이탈하신 다른 분들과 달리, 무사히 여정을 완수하시길.”
대앵.
토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안톤이 죽었습니까?”
대앵···.
“아니요.”
대앵-!
“그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지만, 살아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만나려 하지 마세요. 아직 그대는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요?”
기젤은 다소 서글픈 음성으로 답했다.
“제가 아는 안톤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파괴하려 들 테니까요. 안톤은 절대 타협하지 않을 거예요.”
한숨을 흘린 토드가 입을 열었다.
“기젤, 안타깝지만 그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저로선 그를 배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직위를 고려하면 안톤의 위상 또한 높을 테니, 제 행보에 적잖은 걸림돌로 작용하겠죠. 더욱이 그가 온전치 못한 지경에 처해있다면···”
고개를 저은 기젤이 대꾸했다.
“토드. 왜 신들께서 직접 현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말씀을 전하시는지 아시나요?”
“글쎄요. 나름 피조물과 간격을 두시고 경외감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시는 게 아닐까요.”
“신들께선 비정하시고, 권위에 찬 분들이 아니세요. 그들은 오히려 피조물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그럴 수밖에 없으셔요.”
기젤이 말했다.
가로되, 누구도 나의 얼굴을 보곤 살아남을 수 없으리니.
“피조물이 신과 직접 대면하면, 존재가 녹아내려요. 누구보다도 강인한 육신과 정신력을 지녔더라도.”
돌이켜보면 토드도 한때 어머니가 매정하신 분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신도가 이토록 개고생하고 있는데, 따뜻한 격려의 한마디조차 없으셨으니. 물론 지금이야 다르지만.
‘이따금 주물이나 서책을 빌어 말씀을 전하시는 것도 그 탓이었던 걸까.’
“···그걸 알아냈다는 건, 안톤이?”
기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톤은 평생 이 땅의 불의를 정화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겨왔습니다. 그러다 돌연 성전사들에게 힘을 내려주는 영원의 성화가 꺼졌고, 교단엔 내부적으로 엄청난 동요가 일었고, 분열될 조짐이 다분했습니다.”
토드가 기억하기로, 언데드나 악마에 대항하는 성전사의 불꽃은 설정상 영원의 성화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서술이 있었다.
‘사제 계열 너프는 내가 주술사를 플레이하던 중에 있었으니, 시기상으로 안톤 엔딩 이후의 이야기야.’
게임 밖의 영향이 이렇게 작용된 건가. 토드는 탄식했다.
“안톤은 어떻게든 성화에 다시 불꽃을 붙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솔마르와 직접 마주하는 것이었군요. 결과가 좋진 못했고요.”
“···승천 의식은 실패했고, 안톤은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를 구심점으로 돌아가던 교단의 지지자들과 무수한 성전 기사단들이 와해되었고, 안톤은 자기 자신, 심지어 최후의 인간성마저 잃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에게 남은 게 뭡니까?”
“열의. 그것 말곤 없습니다. 안톤을 본 추기경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유폐하도록 명했어요. 교단의 분열이 극심해진 이후론, 암암리에 그의 추종자들이 남아 있고요.”
대앵.
12번의 타종이 끝났다.
“돌아가세요. 토드. 가서 그대의 사명을 지속하고, 그대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으며 다가올 폭풍에 대비하세요. 요 몇 달간의 극심한 혼란은 장차 도래할 사건의 전조에 불과하니까요.”
토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언뜻 제 지인에게서, 수도에 계신 황제 폐하가 주교들의 축복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이미 한계에 봉착한 지 오래입니다. 아마 이번 여름을 넘기지 못하시겠죠.”
아직 초봄. 그렇다면 서너 달 정도의 말미가 있다. 준비를 하기엔 다소 빠듯한 시간. 분주히 움직인다면 충분하다.
“적어도 동부 교구에 한해선, 교회가 그대를 적대시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편은···.”
“나머지는 제가 직접 설득해야겠군요. 그게 아니라면 충돌할 수밖에 없겠지만.”
고개를 숙인 기젤이 읊조렸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어쩌면 섣불리 저를 지지했다가, 교구 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괜찮겠습니까?”
“일찍이 그대가 속한 흑색 학파 또한, 열성 신자들과 은둔을 자처한 계파가 투쟁을 벌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교단 또한 그와 비슷한 진통을 겪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내전까지 각오한 말에 토드도 내심 놀랐다.
기젤은 책꽂이에서 여러 책을 꺼내왔다.
“이건 흑색 학파의 역사와 기원을 기록한 책입니다. 비록 다른 원본들은 기록 말살형에 처했으나, 다행히 필사본이 하나 이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중요한 자료다. 더욱이 후학 사령술사들을 양성하려면 필수적인 지식이 담긴 것들이었다.
반색한 토드는 공손히 책들을 소매에 감쌌다.
“이리 귀한 걸, 감사합니다.”
“···그대가 이끄는 흑색 학파라면, 분명 이전과는 다른 모습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해해주셔서 다시금 감사합니다. 기젤.”
사르륵――.
손가락들이 꿈틀거린다.
갑자기?
속삭이셨다.
―속히 이곳을 떠나라.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깜빡. 그것으로 손가락들이 걷혔다.
어머니는 명백히 경고를 전하셨다.
토드가 다급히 외쳤다.
“기젤.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상황이 위험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곧장 탁자의 종을 흔들었다. 밖에 나서있던 수녀들이 일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로이니스더러 휴게실의 손님들을 데려오라 전하세요. 나머지는 외부의 경계를.”
맹인 수녀들이 옷자락을 걷어 올리자, 그 안에서 하나 같이 플레일이나 메이스 따위의 살벌한 둔기가 튀어나왔다.
어머니가 직접 경고를 전할 정도라면 누가 온 건지 뻔하다.
“기젤, 아마 제가 아는 자가 맞다면, 이들론 상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기젤이 고개를 기울인 채 답했다.
“······그는 저도 익히 알고 있답니다. 토드. 저는 이미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직접 만났었다고요?”
그녀가 읊조렸다.
“예. 저더러 동침하자고 제안하더군요. 거절했습니다.”
미친···. 머리가 어지러웠다.
때마침 로이니스가 토드 일행을 데리고 들어섰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로이니스가 안내할 테니, 카타콤을 통해 빠져나가세요.”
【누가 오기라도 한 건가? 마침 복도에서 성기사의 명화를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던 참인데, 이리 급하게 부르다니!】
기젤과 같이 싸울까?
아니. 자신이 여기 있어봤자 짐밖에 되지 못한다.
기동성, 은밀함, 1:1 결투와 순간 폭딜에 특화된 암살자, 허약한 사령술사의 상성은 최악이다.
더욱이 기젤과 마찬가지로 암살자도 본래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면, 하수인들을 뚫고 단숨에 자신의 목을 가져가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둘의 싸움에 괜히 일행들이 휘말리면, 피해를 감당하기 어렵다.
“미안합니다. 기젤.”
“아닙니다. 토드. 부디 무사히 돌아가시길.”
“이스라! 일단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어서!”
【어, 어어. 뭐 저쪽에 급한 용무라도 있다던가? 수녀원이 낮잠 시간도 보장해주는 줄은 몰랐네만.】
토드는 헛소리나 하는 이스라의 등을 떠밀었다.
어영부영 토드 일행을 지하 계단으로 떠나보내고, 기젤은 비밀 통로를 닫은 뒤 열쇠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빠드득···!
손아귀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곤죽이 된 열쇠는 흔적을 알아볼 길도 없이 녹아내렸다.
곧 방 안에 켜져 있던 촛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어둠이 내려앉는다.
광륜표를 들어 올린 기젤이 중얼거렸다.
“구주께서 제게 임재하소서.”
그러자 그늘이 드리워진 방구석에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안녕, 기젤라! 미모는 변함없네.”
휘파람을 불며 경박하게 발걸음을 옮긴 라노는 수녀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전에 했던 제안은 아직 유효한데. 어때?”
수녀원장은 어느새 폼멜에 광륜표가 장식된 장검을 쥐고 있었다.
“무례하도다. 그대는 구주의 집을 침입했다.”
손을 내저은 라노가 너스레를 떨었다.
“딱딱하기는. 뭐, 그래. 성녀면 이런 지조가 있어야지.”
그녀가 쥐고 있던 스틸레토가 빙그르, 돌아간다. 예리하게 절단된 수녀의 목이 바닥을 굴러갔다.
입술을 훑은 암살자가 속삭였다.
“그 사령술사만 내어주면··· 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절대 안 내어줄 거지?”
기젤라가 목에 메고 있던 광륜표를 악력으로 끊어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표상으로부터 불꽃이 인다.
그녀를 마주 보던 라노가 히죽 웃었다.
“근데 난 너같은 애들 깔아뭉개는 게 더 좋더라. 이전과 이후의 간극이 날 미치게 한다니깐.”
“음욕으로 가득한 자여! 그대의 탐욕스러운 마수가 결코 내 손님에게 미치진 못할 것이니.”
장검을 치켜든 기젤라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정면으로 내지른 칼날이 상단부를 노리고 파고든다.
멀뚱멀뚱 칼날을 응시하던 라노는 유유히 그 위로 주사위를 던졌다.
칼날 위로 뛰놀던 주사위가 저들끼리 부딪치며 멈춰선다.
달그락.
나온 수는 3, 4. 그리 높지 않다.
‘오늘은 영 별로네.’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살며시 발을 빼면서, 양손에 각각 스틸레토와 맹고쉬를 쥐었다.
가볍게 날을 세운 맹고쉬가 장검을 밀어내고, 곧장 스틸레토가 기젤라의 등 뒤를 노린다.
“까꿍?”
익살스러운 외침에 수녀원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흡!”
가까스로 몸을 비튼 기젤라는 손목을 가격해 스틸레토의 궤도를 빗겨냈다.
바닥을 뒹군 라노를 향해 장검을 내리치려던 중.
다름 아닌 그림자에서 끝이 유달리 뾰족한 배즐러드가 튀어나온다.
“······!!”
이미 몸이 너무 앞으로 기울어진 상태.
섬광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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