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18
118
쿠웅―···!
비교적 깊은 지하에 있었음에도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따금 천장이 내려앉진 않을까 싶을 정도의 묵직한 충격이 일행의 머리 위로 자갈과 먼지를 떨어트렸다.
과연 초월자들의 싸움이다. 그 편린만으로도 지축을 울리고, 뭇 피조물들이 두려워할 위엄이 서려 있다.
천장을 힐끔거리던 이스라가 안광을 짙게 흩뿌렸다.
【대단한 결투로군! 예의 수녀원장은 영혼의 불꽃이 흐릿해 보였는데, 저리 격렬하게 싸울 줄이야! 덩달아 본인도 식어버린 피가 끓는 것만 같네.】
“영혼의 불꽃이 흐릿했다고요?”
【대개 거의 죽어가는 인간들이 그런 빛을 흘리더군.】
토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앞서 걷고 있는 로이니스도 분명 대화를 엿들었을 텐데,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데만 열중했다.
그들이 카타콤을 지나치는 와중에도 지상의 소음은 쉬지 않고 울려댔다.
내심 기젤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레벨 99의 능력치가 여태껏 그녀의 유구한 목숨을 붙들어놓고 있었겠지.
그래도 기젤은 자신이 캐릭터들 못지않게 공을 들여 육성한 동료였다. 성전사라면 막연히 암살자를 상대로 호각을 이룰 거라 생각했었다.
쿠웅, 쿵!!
굉음에 귀 기울이던 이스라가 중얼거렸다.
【밀리고 있군. 수녀원장도 나름 강해 보였는데, 누굴 상대하기에 저리 열세에 처한 건가?】
토드는 낮게 답했다.
“필연적 단말마. 전설적인 암살자입니다.”
파멸의 기사가 히죽 웃었다.
【호오, 살수란 말인가. 그래서 저리 빠르게 공격할 수 있는 거였군. 어쩐지 몸놀림이 날래다 싶었네만.】
도리어 그녀는 호승심이 이는 눈치였다.
【한번 붙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네만, 자네가 이리 만류하니 어쩔 수 없지.】
“······.”
토드는 입술을 곱씹었다.
단칼에 목이 날아갈 거다.
지금 수준으론 절대 상대해선 안 된다.
어찌 보면 저걸 피하려고 여기까지 온 셈이었으니까.
이 게임이 호평받는 이유 중 하나는 레벨이 절대적인 힘의 우위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플레이어가 클래스 간의 상성 관계를 이해하고, 환경에 따른 임기응변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
그 법칙은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일찍이 토드는 자신보다도 레벨이 높은 강자들을 여러 차례 쓰러트린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의 경우다.
‘암살자를 육성할 때, 마법사 전문 사냥꾼으로 키웠어.’
이 세상의 캐릭터들은 토드가 플레이했던 결과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다른 화신들은 토드보다 앞서 이 세상에 떨어진 만큼, 그간 암살자가 소리 없이 죽인 마법사만 하더라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내 레벨이 높았더라도, 암살자와의 싸움은 승산이 없을 텐데.’
토드가 기억하는 암살자의 이동기만 하더라도 4개. 암살자는 마법사를 상대로 기동성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다.
같은 유리 몸이라면, 암살자에게 선공권이 있었다.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목이 날아갈 테니, 애당초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다.
수천 명이 얽힌 전장에선 표적이 되기 어려우므로 사령술사가 활약할 수 있는 발판이 갖춰졌지만, 이런 소규모 교전에선 자연히 폭딜을 몰아넣는 클래스들이 강세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암살자를 이기는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다. 십중팔구 끔살당하는 최후로 상황은 귀결되었다.
기젤이 자신을 위해 시간을 벌어줬다. 어머니도 직접 경고해준 만큼, 도망쳐야만 했다.
토드는 이를 갈았다.
‘근데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지.’
기젤이 죽더라도 그리 슬프진 않을 것이다.
비록 그녀와는 인연이 있지만, 게임에서 간접적으로 만났던 기억에 그친다. 크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셰우드 님.”
토드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로이니스가 그를 재촉했다.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추적이 붙기 전에···.”
녹색 눈동자가 일렁인다. 사령술사가 나직이 속삭였다.
“가만 생각해봤는데, 지금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셰우드 님. 아빠티사님의 호의를, 이렇게 저버리실 생각입니까?”
“저는 기젤에게 나 대신 죽어달라고 부탁한 적 없습니다.”
“만용입니다. 셰우드 님도 그자를 아시는 것 같지만, 그는 악명 높은 청부사입니다. 교구 내에서 이름 높은 성전사 분들마저 목숨을 잃었고요.”
이젠 마법사뿐만 아니라, 성전사까지 잡았나.
힐탱 잡는 암살자라니. 상성 관계까지 뒤집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거다.
토드가 자가 엔딩을 내린 이후에도 캐릭터들은 계속 이 땅을 거닐었으니 그 세월 동안 나름의 노하우도 축적된 것이겠지.
게다가 시기상 암살자를 플레이한 시점과 토드가 사령술사로서 이 땅에 떨어진 사이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다.
플레이어로서 지식과 게임 이해도는 동일.
상성은 극도로 불리하며, 레벨마저 낮다.
평소였다면 이런 상황 자체를 회피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럼에도 무의식중의 반발심이 끊임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원인을 생각해보던 토드는 입을 열었다.
“도망치는 건 이제 신물 납니다. 절 대신해서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이 상황 자체가··· 짜증 나는군요.”
왜 자꾸만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나 싶었는데, 애써 잊고 있던 스승님의 최후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하수로를 통해 사령술사는 도망쳤었다.
자꾸만 시간이 끌리니 로이니스의 어조도 점차 격앙되었다.
“그렇다고 한들, 당신이 저자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변방에서야 활약을 보였더라도, 아득한 초인들의 수준엔 감히 범접하지도 못합니다!”
토드를 노려본 로이니스가 일갈했다.
“기껏 기젤라 님이 당신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는데, 그 결단을 개죽음으로 만들 생각입니까!”
무표정한 토드를 향해 로이니스는 한숨을 흘렸다.
“어서 달아나세요. 카타콤의 통로는 도시의 외곽으로 이어집니다. 아덴티아 포스텔룸에서 소동을 일으켰으니, 당분간 그도 당신을 쫓지 못할 겁니다.”
로이니스는 광륜표를 움켜쥔 채 입술을 달싹였다.
“목숨을 부지하세요. 사령술사. 은거하면서, 힘을 축적하고, 장차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세요. 그게 기젤라 님께서 당신에게 기대한 역할이니.”
사령술사는 삐뚜름한 미소를 흘렸다.
“돌아가긴 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꼬리를 말고 내빼고 싶진 않군요.”
“지금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를 가는 로이니스를 향해 토드가 읊조렸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최선이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헌데, 제가 상황에 휘둘려 다니는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신은 왜 흑색 학파를 재건하고 싶은 거였더라.
오드람의 북방 도시가 그토록 부러웠던 건.
교회처럼 굳건한 집단의 체계를 참고했던 것도.
외압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게 지독히 싫어서였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음지에 숨어 비굴하게 연명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토드의 사령술사로서 플레이 타임을 따져본다면 9할은 도주, 은둔, 위장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세상에 떨어졌는데,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하고 바라만 봐야 하는 건 지독한 고문이 따로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쳐봤자, 또 시간을 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말인즉슨 최선의 수이지만, 최고의 수는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을 비롯한 사령술사들의 대의가 이 땅에 바로 서려면, 앞으로도 이런 도전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강해지려고 레벨을 올린 게 아냐. 도망치지 않으려고 올린 거지.’
쉬이 납득하지 못한 로이니스가 반문했다.
“그를 맞서 이길 수 없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일 테죠. 당신도 그걸 뻔히 알면서 미련하게 덤비겠다고요?”
돌연 토드는 향로에 불을 붙였다.
“가급적이면 추후 교단과의 우호 관계를 고려해서, 잠든 분들을 건드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향로의 흐릿한 불빛이 벽면에 안치된 석관을 비추는 와중에 토드의 말을 헤아리던 로이니스가 경악했다.
“다, 당신··· 설마.”
수녀원 밑의 카타콤은 깊은 지하에 있어, 시신들을 안치하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더욱이 교회에서 장례 미사까지 거행한 뒤 안장된 시신들이라 상태마저 훌륭했다.
“제아무리 잘난 암살자라고 하더라도, 이만한 숫자의 성인분들이라면 애를 먹겠죠.”
묘소에 안치된 성직자들을 일으키겠다는 발언에 로이니스가 휘청였다. 애써 몸을 가눈 그가 광륜표를 부여잡았다.
“이, 모독적인. 아아, 구주시여. 우리를 용서하여주시옵고···.”
“일단 양해는 나중에 구합시다. 당신도 기젤이 죽는 건 원하지 않잖습니까.”
표정을 와락 구긴 로이니스가 항변했다.
“그렇다고 어찌 영면에 드신 분들에게 불경한 사술을 남발한다는 발상을!”
“제가 알기로 기젤은 시성 후보자라고 들었습니다. 여기 누워계신 분들도 자신들의 후배가 웬 근본 없이 뒷골목에서 굴러먹던 도둑놈에게 뒤통수 칼침 맞고 천상에 실려 오는 꼴을 바라실까요? 정말요? 그 꼴을 보느니, 혈압이 올라서 관짝 부수고 나오는 걸 바라지 않으실까요.”
쉬지 않고 신성 모독을 일삼는 언행에 로이니스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어, 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지요.”
눈을 질끈 감은 로이니스가 대꾸했다.
“그렇다고 고결하신 분들의 유해를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추후 구주께서 약속하신 영혼과 육신의 부활이 거행되려면!”
팔짱을 낀 토드가 삐딱하게 웃었다.
“육신의 부활이요? 경전에 나오는 구원의 언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교리를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어찌 이런 모욕적인 망발을···”
카타콤을 돌아본 토드가 벽면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렸다.
“그럼 이보다 수백 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은요. 경전에 기록된 태초의 사도와 같은 분들은 이 땅에 유해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두 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분들을 비롯해 태양 제국 시절의 선대 신도분들은 백골마저 분해되어 시신조차 없을 텐데, 그럼 그분들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겁니까?”
정말 시신이 필요하긴 한 거냐? 이미 고대 신도들은 뼈도 못 추리고 잿가루가 되었는데?
토드의 지적에 로이니스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한숨을 흘린 토드가 읊조렸다.
“···경전에서 시신에 손대지 말라 강조한 건, 무분별한 도굴을 방지하고, 제대로 된 장례 절차를 준수하라는 의미에서 수록된 항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신의 보존은 구원의 유무와 별반 상관없습니다. 육신은 허물에 불과합니다.”
“아, 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안치된 분들을.”
점점 천장의 진동이 미약해지고 있다. 토드는 로이니스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로이니스. 당신은 저 때문에 기젤이 죽는 걸 원합니까?”
“······아뇨. 절대 아니죠. 당신 같은 사령술사 때문에 기젤 님이 죽는 건···”
씨익 웃은 토드는 그를 놓아주었다.
“그렇죠? 저도 죽기 싫고, 기젤이 죽어야 하는 이 상황도 싫습니다. 일단 제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어떻게든 그 암살자를 붙들어놓고 있을 테니 당신은 이대로 나가서, 최대한 외부의 인력을 부르세요. 도시의 성전 기사단이나, 주둔 병력이든, 아무나요.”
아무래도 이런 소요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아무런 원군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모종의 수단으로 수녀원 일대가 차단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그 범위가 지상에만 한정된 모양이지.’
토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그래도 당신이 상대해봤자 시간을 얼마 벌지도 못할···.”
“뭐하러 제가 직접 그자와 상대하겠습니까.”
비열한 미소를 흘린 사령술사가 향로를 흔들었다.
“사령술사는 사령술사답게 싸워야죠.”
암살자를 상대로 이길 순 없다. 그래도 당분간 자신을 쫓지 못하도록 결정타를 입힐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정보의 우위.
‘암살자’가 4회차 시점에서 이 땅에 떨어진 인물이라면, 당시엔 사령술사가 미구현 상태였으므로 상대방은 자신의 스킬을 모른다.
반면 토드는 암살자의 주요 스킬들을 숙지하고 있었다.
“사령술사 토드 셰우드가 부르나이다.”
향로에서 피어나온 연녹색 향연이 손을 모은 유해들에게로 스며든다.
카타콤의 규모가 상당한 만큼, 일대에 매장된 시신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긴 잠을 깨우는 무례를 용서하소서. 간악한 자객의 비수가 솔마르의 복된 자녀, 아빠티사 기젤라를 노리고 있나니.”
회오리치듯 빨려 들어간 향연이 백골의 눈자위에 맴돌다가, 백색과 녹색이 섞이며 이내 청록색의 밝은 안광으로 타오른다.
뿌드득···!!
오래된 관절 부위가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하나둘씩 꿈틀거렸다.
“부디 고결한 그대들의 도움을 간청하나이다.”
암살자는 모든 스킬이 1:1 대인전에만 맞춰져 있다. 잡몹을 쓸어담는 몰이 사냥에 특화된 클래스가 아니었다.
【누···구여! 씨···불! 누가 여기서 영들을 깨우는 불경한···! 소리를 내었어!】
케케묵은 성전군 시절의 갑주를 입은 해골이 철퇴로 관을 부수며 튀어나오는가 하면,
【시끄러. 이놈아. 큰소리치지 말어. 골 아프니께.】
금 간 백골을 문지르던 유골은 엉거주춤 머리에 모자를 걸치곤 황금 광륜표로 장식된 주교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여기 잠들어있던 이들은 잡몹이라 부를만한 수준이 아니다.
오랜 세월 카타콤에 잠들어있던 성인들의 유해가 사령술사의 부름에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