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16
116
기젤라의 눈동자는 그녀의 백발처럼 희게 물들어 있었다. 얼핏 유리알처럼 보이는 기묘한 모양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 들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녀원장이 손짓하자 그녀 곁에 있던 수녀들이 모두 물러섰다.
사뿐히 다가온 기젤라는 대뜸 토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뭐야.’
당황한 토드가 뒷걸음치니 수녀원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속삭였다.
“부쩍 경계심이 많아지셨군요.”
“일면식 없는 타인이 갑자기 들이대면 누구나 경계하기 마련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대와 저는 비교적 막역한 사이일 거라 생각했는데요.”
토드에겐 단순히 게임 속 동료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기젤라가 안톤과 겪었던 여정을 어떻게 생각할진 감히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분명 1회차 플레이의 기억은 선명하다.
그러나 게임으로만 향유했던 과거와, 직접 체화되어 경험하는 지금은 명확히 구분 지어야만 한다.
적어도 그게 옳다고, 토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선을 그었다.
“엄연히 지금의 저와 아빠티사님은 초면입니다.”
그러자 수녀원장이 속삭였다.
“의아하네요. 그건 평소 육신은 허물에 불과하다던 그대의 주장과 상충되는 견해가 아닌가요.”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대. 토드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빠티사께선 제가 영혼이 분절된 존재기에, 안톤과 제가 같은 이라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허나 제가 생각하기에 누군가의 본질은 기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토드의 말을 되뇌었다.
“기억, ···기억인가요.”
“예. 분명 안톤이 저였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회랑에 가득한 작품들이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더군요.”
사령술사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제가 이 땅에 떨어진 건, 그 이후의 일입니다. 그간 저는 이 세상에 대해 다시 익혀야만 했고, 새로이 배운 지식과 경험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동일 선상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갈라져 나간 경로에 따라 삶의 궤적은 무수한 변동성을 지닌다.
토드는 일찍이 세파에 굴복한 오드람을 목격한 바 있었다.
적어도 사령술사는 주술사처럼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를 이해할지라도, 동의하진 않는다.
“지나간 기억들이 저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사령술사로서의 사역에 순명합니다.”
어쩌면 토드의 발언에 수녀원장이 태도를 돌변할 수도 있다. 일찍이 후단이 자신에게 주술사로의 전직을 제안했던 걸 생각해보면, 마찬가지로 기젤라도 토드가 다시금 성전사의 역할을 수행하길 기대하고 불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토드는 그녀 앞에서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혔다.
‘확인할 필요가 있어.’
솔마르가 구태여 사령술사인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까닭이나, 교회의 저의나.
단순히 회유가 목적이었다면 만남은 이것으로 결렬이다. 빠져나갈 자신은 있다. 비록 영혼 목걸이를 쓰고도, 사지 한구석은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런 토드의 각오가 무색하게, 수녀원장이 차분히 읊조렸다.
“그대의 견해가 그렇다면. 사령술사 토드.”
의외로 수긍하는 눈치다.
“허나 다름 아닌 그대가 절 아빠티사라 부르는 건 다소 용납하기 어렵네요. 다소 격이 느껴지는 지칭입니다.”
뜬금없는 구석에서 딴지가 들어온다. 토드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의 지위를 감안하면 적절한 호칭이 아니신지.”
수녀원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기젤. 기젤이면 충분합니다.”
“으음···.”
토드가 난색을 표하자, 수녀원장이 속삭였다.
“그대가 달라졌을지 몰라도, 저는 변함없이 아퀼리사의 수도녀, 기젤이랍니다. 흘러간 과거일지라도, 그대와 함께했던 여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눈이 멀었어도, 시선은 강렬하다.
“그대가 그때를 기억하는 한, 부디 저를 아빠티사가 아닌, 기젤이라 불러주세요. 그대에게 드리는 마지막 간청입니다.”
“거 참, 이게 그렇게까지 부탁드릴 것도 아니긴 합니다만.”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가, 이내 작게 덧붙였다.
“···게다가 수녀원장은 괜히 나이 들어 보이잖아요.”
어째 지나치게 애틋함으로 포장하려 들더니만.
“흠. 안톤으로서의 행각이 꽤 오래전의 일이었던 걸로 아는데, 그걸 감안하면 지금···”
살기가 느껴지기에 입을 다물었다.
“무례하시긴. 확실히 달라지셨습니다. 전에는 이토록 악독한 언변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는데요. 역시 사령술이 정신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요?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 참회소로 데려가는 게 맞지 않을까···”
차분하던 분위기가 급격히 무거워진다.
토드는 황급히 얼버무렸다.
“노, 농담이었습니다. 기젤. 누구도 당신을 보면 전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새삼 다시 보니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머리카락과 눈 색 정도겠군요!”
비록 수정체가 얼룩져 탁한 눈동자이지만, 조금 밝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역시 그런가요?”
“예. 예. 정말입니다. 기젤.”
“다행이네요.”
아직 본론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진땀이 빠지는 기분. 토드는 미약하게 한숨을 들이쉬느라 그사이 기젤의 희미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때론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기 마련이지요. 그렇다면 충분합니다.”
“······?”
“손을, 내밀어주세요. 토드.”
아직도 별도의 확인 절차가 남아있는 건가 싶어서, 손을 내어줬더니 기젤은 앙상한 손가락으로 토드의 손바닥을 훑었다.
손끝 너머, 따스한 온기가 전해진다. 괜히 간지러운 기분이 드는데 그녀가 나직이 속삭였다.
“손이 차네요.”
“보다시피 몸이 허약한 편이라, 혈액순환이 잘 안 됩니다.”
빤히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기젤은 돌연 토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은 마치 얼굴의 골격이나 질감을 확인하는 듯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귀나 머리까지 훑는가 싶더니, 돌연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기젤이 뽑아 든 새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흰 머리 한 올쯤이야 날 수도 있죠.”
“아니요. 토드. 저처럼 신위에 도달한 피조물이나 그대와 같은 화신들은 노화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더딥니다.”
그녀는 토드의 손바닥에 새치를 올려놓곤, 영혼 목걸이가 걸려있는 쪽을 바라봤다.
“신들께선 언제나 권능의 대가를 요구하신답니다. 비단 솔마르님 뿐만 아니라, 그대가 모시는 여신께서도요.”
“···어머니께선 관대하실 뿐만 아니라, 나름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여타 악신들처럼 피조물들을 착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으시니까요. 이건 제게 베풀어진 총애입니다.”
토드도 여분의 목숨이 지니는 가치를 알고 있다. 소생 이후에 뒤따르는 부작용이나 스텟 하락 정도면 싼값이라 치부했었다.
“그분이 관장하는 분야를 생각해보세요. 진정 그분이 그대에게 총애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궁극적으로 당신의 신께서 내리실 은혜가 어떤 것인지는.”
죽음의 여신이 하사할 궁극의 은총이라.
토드 스스로가 부리는 힘을 생각해봐도 대강 짐작은 된다.
토드는 히죽 웃었다.
“언젠가 인간은 반드시 죽습니다. 어차피 닥칠 필연일 텐데, 그게 두려워서 총애를 마다하진 않겠습니다. 제 여정을 마무리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닿을 수 있는 곳까진 나아가기 위해선 어떻게든 발버둥 쳐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으신가요?”
사령술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심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도 기대 중입니다. 그 또한 흥미로운 체험의 연장 선상이지 않을까요.”
“내세를 즐거운 경험 정도로 여기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을 겁니다.”
“제겐 사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딱히 제가 죽음에 초연한 것도 아닙니다. 아직 전 죽기 싫습니다. 이 땅엔 아직 제가 체험하지 못한 풍경,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하니까요.”
기젤이 나직이 물었다.
“그건 여전히 이 세상을 유희로 여기는 관점으로부터 비롯된 발상인 걸까요.”
마치 이 세상이 게임 속 배경이었다는 걸 아는 듯한 뉘앙스였다. 크게 놀랍진 않았다. 그녀를 비롯해 카셀미어도 토드를 비롯한 빙의자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직도 이 세상이 허구처럼 느껴지시나요?”
토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런 의심을 접은 건 이미 10년 전 일입니다.”
그는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저는 제가 비롯된 세상과, 이곳은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겐 이곳이 더 생동감 있게 느껴지고, 저는 이 땅에서 살아가며 비로소 살아있는 것만 같더군요.”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들,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꽃들은 이제 희미했다.
오히려 회벽으로 지어진 담벼락, 자갈이 깔린 울퉁불퉁한 길, 밤이 되면 횃불과 마법으로 불을 밝히는 풍경이 더 익숙하다.
“애당초 가짜건, 진짜건, 어차피 크게 상관이 있나요? 그런 쓸데없는 의구심에 제 활력을 쏟을만한 여력도 없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사는 게 마음에 듭니다. 이젠 단순히 살아가는 것만으론 부족하니, 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총력을 쏟고 있고요.”
“그대의 사명은, 분명 흑색 학파의 재건이었죠. 막연히 흥미만으로 수행하기엔 버거운 과업이지 않나요?”
사령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가 산 자들에겐 충분히 신의 자애를 전할지 모르나,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미처 돌보지 못한 이들은 죽어 나가고, 마땅히 인도받지 못한 자들은 자연히 생사의 순환으로부터 이탈하여 지상을 떠돕니다. 저는 그런 불쌍한 영혼들을 보내주며 보람을 느끼지요.”
천직이라고 해야 하나. 가업이 괜히 핏줄에 따라 전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허나 저만으론 분명 부족합니다. 그래서 저는 장차 새로 부상할 흑색 학파가 작금의 교회가 봉착한 한계를 상호보완할 수 있는 집단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토드의 포부를 헤아리던 기젤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녀는 수도복의 끝을 걷곤, 자신의 손목에 걸린 광륜표를 바라봤다.
기젤이 속삭였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속삭임을 마친 기젤이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세요. 토드.”
그녀는 토드를 이끌고 방의 구석으로 향했다.
백광 어린 검을 치켜든 성전사가 용을 처치하는 성화가 벽에 걸려있었는데, 기젤은 이번엔 손목에서 열쇠를 꺼냈다.
‘소매도 없는 옷인데 저런 게 어떻게 들어가 있는 거지.’
이젠 성화 뒤에 열리는 비밀 통로도 진부하다. 오히려 기젤의 수도복이 더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와 더불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드러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에 향로라도 꺼내려던 차에 기젤의 광륜표가 환한 빛을 발했다.
향로에 아무리 피를 바쳐도 불빛이 모닥불만도 못 미치지만, 그녀의 광륜표는 비싼 플래시 라이트처럼 눈이 부실 정도였다.
토드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향로 불이 좀 더 은은하고 운치 있지. 저건 너무 빛이 모여서, 직선으로만 나아가잖아. 정 어두우면 횃불을 켜면 되는 거고.’
그런데 지하의 복도를 거닐던 중, 어째서인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물며 이곳은 수녀원 지하에 있는 공간인데, 이토록 스산한 공기라니 조금 의아했다.
“기젤, 이곳은?”
기젤이 벽면을 향해 광륜표를 비추자, 수도복을 입은 백골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여긴 카타콤입니다. 수녀원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 일대가 모두 매장지였고요.”
“굳이 지하 묘지 위에 수녀원을 세운 까닭이 있습니까?”
묵직한 철창 앞에 이르러, 재차 기젤은 자물쇠를 풀어냈다. 이곳은 경전의 구절을 적은 인장이 사방에 가득했다.
철컹···!
“이곳에 묻힌 분들은 대다수가 성인들이십니다. 그분들의 힘을 빌어 억누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억누른다면··· 무엇을요?”
기젤은 철창 너머 드러난 공간을 비췄다.
“그간 징벌했던 적들로부터 얻은 노획품들이었죠. 미천한 피조물들의 힘으론 감히 파괴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여 불가피하게 이곳에 보관할 수밖에 없었고요.”
선반에는 온갖 유물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놓여 있었다.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마법 검, 외신의 형상을 빚은 조각상, 탯줄에 목맨 신의 사산아, 광륜표의 빛마저 빨아들이는 엇쌍각뿔 등.
어지간하면 흔들리지 않는 토드조차 정신이 아득해지는 흉물들이었다.
기젤의 발걸음도 부쩍 빨라졌다.
그녀는 가장 깊은 곳으로 토드를 이끌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대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도 있었습니다.”
기젤이 직접적으로 광륜표를 비추지 않아도, 토드는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잔재를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소리의 서?”
소실된 서책의 책장이 다름 아닌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23년 전 토벌했던 흑마법사 잔당들로부터 노획한 물건입니다. 이걸 전해주기 위해 그대를 부른 겁니다.”
천사···!
사령술사는 진심으로 감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