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15
115
거룩한 도시라는 이름답게 아덴티아 포스텔룸은 판가우와는 상이했다.
길바닥은 석괴를 기반으로 자갈과 사암을 촘촘하게 깔아놔서 깔끔했고, 오물의 자취나 지린내를 풍기지도 않았다.
담벼락마다 몸을 기댄 주정꾼도 없거니와, 길거리에서 호객하는 거지나 좀도둑도 없었다.
‘아쉽네. 세련됐지만, 참 정감이 없는 도시야.’
사람 냄새가 안 난다. 토드로선 박한 평가를 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로컬스러운 분위기보단 잘 꾸며진 테마 파크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도리어 깨끗한 공기가 마치 낯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어느 한적한 돌 아치 밑에 이르러, 주교후는 비로소 발걸음을 멈췄다.
아치의 한가운데엔 눈을 뜬 손바닥이 음각되어 있었다. 섭리의 눈을 상징하는 장식이다.
때마침 떠오른 정오의 태양이 절묘하게 아치 위에 겹쳐져, 눈 뒤로 빛무리가 은은히 번져나간다. 주교후는 이윽고 토드를 바라봤다.
“우리는 여기까지다.”
“예하께선 저와 더불어 들어가지 않으시련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를 데려오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 그분이 전하실 전언은 오롯이 너만을 향해 있다.”
카셀미어가 손을 모은 채 뇌까렸다.
“나는 뫼를렌푸르트에서 신학을 수학하고, 사제로서 서임한 이래, 한 번도 구주께서 내게 내린 사명을 의심한 바 없었다. 허나 불신자, 그것도 죽은 자를 부리는 마법사를 데려오라니 의심이 깃들었지.”
주교후는 자신의 목에 걸린 광륜표를 매만지려다가, 옷자락을 가다듬곤 손을 내렸다.
“···그러나 이제 의심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시선에 내내 깃들어 있던 적대감, 불신은 여전히 한 줌 남았더라도, 상대적으로 희석된 뒤였다.
그는 아치 너머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비켜섰다. 토드가 짧게 목례하고 지나치려던 중, 카셀미어는 나직이 속삭였다.
“셰우드. 비록 기젤라님이 직접 너를 불러들이셨으나, 한때 사교도들의 악몽이라 불리셨던 분이다. 언동에 신중해라.”
그의 충고를 전해 들은 토드가 짤막이 답했다.
“살펴 가시지요.”
주교후를 뒤로 하고, 아치 너머엔 잘 손질된 안뜰이 있었다.
허브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풍긴다.
정원을 돌아본 이스라가 중얼거렸다.
【이곳은 마치 미로 같은 곳이군. 담장은 없으나 허락받지 못한 이가 함부로 들어설 순 없겠어.】
그녀의 안광이 세차게 타올랐다.
【묘하게 몸이 무거워진 듯한 기분일세. 본인의 착각인가?】
마르커스가 대꾸했다.
【착각이 아니다. 여긴 신성한 대지다. 우리같이 영락한 존재들은 거부되는 공간이다.】
자세를 굽혀 땅을 훑어본 토드가 중얼거렸다.
“풀이 따뜻하군요.”
유독 이곳만큼은 햇살이 더 강하게 내리쬐는 것 같다. 그때,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허리춤에 방울을 매단 사내가 토드 일행을 향해 유유히 걸어왔다. 기이하게도 그의 눈에는 초점이 맺혀있지 않고 흐릿했는데, 토드가 있는 위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프라이헤어 셰우드, 그라워볼프 양, 이스라 경, 그리고 마르커스 수사.”
사내는 공손한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로이니스라고 합니다. 성 힐데가르트 수녀원에 오신 걸 구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로이니스.”
빙긋 웃은 로이니스가 일행을 돌아보더니 자신이 달고 있는 것과 동일한 방울과 허리끈을 꺼내 들었다.
“수녀원은 본디 금남의 구역인지라, 이곳을 오가는 분들은 방울을 차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셔야 합니다. 번거로움을 끼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초대를 받은 객인인데, 마땅히 이곳의 도리를 따라야죠.”
토드가 자진해서 방울을 받아들자, 마르커스도 뒤따라 방울을 동여맸다. 문득 일행을 돌아보던 로이니스는 이스라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똑딱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흘리는 게 아닌가.
‘뭐지?’
자세히 보니 혓바닥으로 입천장을 차는 것이었다.
“거기 계신 키 큰 기사분이 이스라 경이신가요?”
【그렇소만···.】
“거추장스러우시겠지만, 부디. 저를 비롯해 이곳에 계신 수녀님들은 앞이 보이질 않는답니다. 하여 불가피하게 이리 방울을 달아 피하게끔 하는 것이고요.”
‘방금 그게 일종의 반향정위였나. 어쩐지 눈에 초점이 맞질 않더라니.’
그런데 이스라는 안광을 깜빡이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본인이 그걸 왜 차야 하는가?】
“예?”
미소로 일관하던 로이니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재빨리 토드가 헛기침을 하자, 허리에 매달린 방울이 흔들린다.
딸랑, 딸랑.
그러곤 토드는 넌지시 산시아 쪽을 향해 눈짓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맹하던 투구 속 안광이 세차게 흔들린다.
【아, 방울! 물론 본인도 차야지! 비록 본인은 죽은 몸이지만, 엄연히 사내니 말이네! 하, 하! 하.】
여전히 이스라는 허술한 구석이 다분했다. 그나마 눈치라도 있어서 망정이었다.
살짝 흔들렸던 로이니스의 얼굴에 다시금 온화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실까요.”
4명이나 방울을 차고 정원을 거닐자니, 고요하던 장소가 소음으로 가득했다.
이스라는 방정맞게 흔들리는 방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신세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로군.】
“어쩔 수 없지요. 그게 이곳의 법도라니까요.”
수녀원치곤 제법 규모가 있었음에도 멀리서 방울 소리를 듣고 피한 것인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본 이스라는 괜히 어깨를 꼼지락대더니 치를 떨었다.
【토드, 여긴 정말 괴이한 곳일세. 분명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마치 사방에서 훔쳐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네. 어디서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니 기분이 나쁘군···.】
토드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볕이 따갑다.
“아마 위쪽일 겁니다.”
파멸의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
정원을 지나니 대리석으로 지은 회랑이 펼쳐졌다. 로이니스는 끄트머리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셰우드 님 외에 다른 일행분들은 휴게실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거긴 볕이 들지 않으니 그나마 괜찮으실 겁니다.”
이스라가 낮게 속삭였다.
【또 자네만 보내라니. 괜히 불안하군.】
“설마 별일 있겠습니까.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는데요.”
그녀가 안광을 좁히며 주변을 두리번댔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있어 이곳은 적진의 심장부나 다름없지 않나. 마냥 낙관하기엔 그간 교회의 종복이라던 자들이 우리에게 보였던 태도도 그렇고.】
“어쩌면 이번 만남이 그간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둘의 말에 귀 기울이던 로이니스가 나직이 답했다.
“안심하시지요. 이곳은 지성소로 지정된 봉역이니, 일체의 무력 행위가 금지되어 있답니다. 적어도 아빠티사께선 여러분과 대화할 의향이 있으십니다.”
적대할 의도가 없다는 말이나, 그게 일시적일지, 계속 이어질진 저 너머에 기다리는 이와 이야기를 해봐야 알겠지.
“여기서 기다리세요.”
토드의 지시에 침음을 흘린 파멸의 기사는 허리춤을 두드렸다.
【일말의 수상한 낌새라도 보였다간, 이곳의 고요가 영영 깨질 것이네. 본인이 섬기는 자를 각별히 대우하게나.】
이스라의 엄포에 로이니스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주의하겠습니다. 프라이헤어 셰우드께선 이쪽으로.”
휴게실의 문이 닫히고, 로이니스는 토드를 회랑의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긴 복도의 양옆에는 거룩한 성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성화, 신의 발현, 사도들이 나팔을 불고 천상의 전령들이 강림하는 기적 등을 표현한 조소로 가득했다.
앞서 걷던 로이니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유달리 충성심이 각별한 기사님이시군요.”
토드는 쓴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워낙 우여곡절이 많았던지라.”
“이 땅의 피조물들은 각기 다른 사정에 놓여 있지요. 맞닥뜨린 난관을 헤쳐나가는 방식도 천차만별이고요. 특히 셰우드 님과 저 기사분이 겪었던 서사는 가히 무용담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무용담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겐 그저 유랑 중에 거쳐 가는 일들이었을 뿐.”
사뿐사뿐 거닐던 로이니스의 발걸음이 차차 느려졌다.
“셰우드 님은 보기 드물게 겸양으로 가득하신 분이군요.”
“제가 사령술사로 살아가면서 익힌 처세술에 불과합니다.”
로이니스는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속삭였다.
“보통 어두운 권능을 부리는 이들은 열망에 차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힘이 가져다주는 자신감에 취해있고, 만사에 불손하더군요. 얼핏 셰우드 님은 말씀하시는 게 저희와 더 가까워 보입니다.”
“흠, 그거. 다른 분들이 들으면 신성 모독이거나, 이단이라고 문제 삼을 법한 발언 같습니다만.”
토드의 지적에 어깨를 들썩인 로이니스는 주변을 가리켰다.
“그자들이 몰라서 그리 지껄이는 것이겠지요.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범인들은 헤아리지 못하는 구도의 길을 걷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
회랑의 안쪽을 지날수록, 과거가 아닌 비교적 근래의 시대를 그린 미술품들이 늘어난다.
그런데 유독 토드에게 낯익은 것들이 많았다.
녹슨 창칼과 무수한 주검 위로, 청록색 철퇴를 치켜든 거한이 울부짖는다.
‘쇠퇴한 군주, 발라그리모스. 이때 힐 장판을 중첩시키면 최대 체력 이상으로 체력이 뻥튀기되는 글리치가 있다는 걸 알아내서 쪼렙 성전사를 데리고 손실 없이 50레벨짜리를 잡았었지.’
광륜표 깃발을 내건 성전사들은 앳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괴물들의 주검이 산처럼 쌓인 것과 대조적으로, 성전사 진영은 부상자조차 없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역행하는 티치타쿠아. 지금 내가 쓰는 노화보다도 더한 급속 노화 디버프를 광역으로 뿌려대는 놈이라 애를 먹었는데.’
티치타쿠아의 급속 노화는 무려 최대 체력을 영구히 감소시키는 데다가, 고정 피해 도트뎀까지 들어오는, 말도 안 되는 놈이었다.
마침 주변에 계곡이 있어 남아있는 성수는 죄다 쏟아붓고, 댐을 만들어 물을 가뒀다가 놈을 유인해서 성수에 절어진 폭포수로 냉수 샤워를 시켜주니 좋아 죽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종언의 대악마, 앙갈라툼···. 고위 계급 악마답게 쉽지 않은 놈이었어. 이 자식이랑 도저히 맞다이는 안 되겠다 싶어서 성전군을 선포하고, 천사까지 강림시켜서 협공했는데.’
인게임에서 플레이어로서 쌓은 명성과 인맥, 꼼수를 총동원한 싸움이었다. 오로지 버프 몰빵에만 특화된 성가대를 조직하여 자신을 보조하고, 성전사단은 앙갈라툼을 호위하는 잡몹 패턴에 동원했다.
엄밀히 앙갈라툼은 아직 게임이 얼리 액세스였던 시절, 잡지 말라고 만들어놓은 보스였다.
지옥은 악마들이 기거하는 본거지라, 본연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 가뜩이나 물질계에 강림한 악마들도 만만치 않은데, 하물며 지옥에 머무르는 개체라면 난이도가 몇 갑절 이상 널뛰기한다.
그럼에도 토드는 지상에 기어 나오지 않고 지옥에서 얌전히 있던 놈의 앞마당까지 기어코 찾아가 머리의 뿔을 잘라냈다.
이미 성전사로 만렙을 달성한 와중에, 남들과는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업적을 세우기 위한 기행이었다.
특별히 앙가툼은 대악마답지 않게 이게 가능한 일이냐며 하소연하는 컷씬이 있어 인상 깊었다.
거대한 초상화에는 쓰러진 대악마의 사체 위에서 T자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성전사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땐 베스트 게시판 인증샷을 위해 일부러 웃긴 포즈를 취했는데, 여기선 거룩한 형상으로 묘사되어 묘한 간극이 있었다.
‘그게 안톤을 플레이하면서 마지막으로 잡은 보스였던가.’
이후의 행적이 묘사된 예술품은 없었다.
어느덧 긴 회랑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로이니스가 문을 가리켰다.
“아빠티사께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때 당신과 이 모든 여정을 함께하셨던 분이시죠.”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던 토드가 그를 향해 물었다.
“어찌 제가 그와 동일 인물이라 확신하십니까? 보아하니 카셀미어 주교후도 어느 정돈 알고 있는 눈치던데요.”
그는 말없이 웃고는, 침묵을 고수했다.
직접 들어가서 이야기해보라는 건가.
하여간 이 게임은 옛날부터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을 고수하더니, 진짜 세상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다.
그그긍―···!
묵직한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안쪽에서 도르래가 돌아가는 듯한 쇳소리가 들렸다.
대체 뭘 꽁꽁 감춰놨길래 이리 문을 걸어 잠근 건가 싶었다.
미간을 좁힌 토드는 천천히 암실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유리로 된 천장으로부터 빛이 새어 들어와 한 곳만을 밝히고 있었다.
빛 아래 있는 것을 목격한 토드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화려한 금실로 치장된 관에 백발의 여인이 누워 있다. 그 아래 붉은 끈으로 눈을 동여맨 수녀들이 하염없이 기도문을 읊조리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향로 때문에 숨을 쉬기도 곤란할 지경이었는데,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여인이 눈을 떴다.
스스로 몸을 일으키기에도 버거운지, 엎드려 있던 수녀들이 그녀를 부축한다.
텅 빈 공허한 동공은 정확히 토드를 응시했다.
그녀가 담담히 읊조렸다.
“당신께 구주의 평화가 깃들길. 토드 셰우드.”
포근한 기운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원래 기셀라는 성당에서 마주치면 플레이어에게 회복 주문을 걸어주는 캐릭터였다.
성전사를 플레이하면 튜토리얼 때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엔 막연히 수녀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동료로 영입한 동기는 순전히 변덕이었다.
『 ‘거룩한 진노’, ‘대수녀원장’, 아퀼리사의 기젤라: Lv.99 』
칭호만 2개. 게다가 이름을 표기하는 글귀는 찬란한 금색으로 치장되어 화려하게 번쩍인다.
그녀는 토드가 과거에 남긴 편린이나, 현재 힘의 격차는 명확하다.
비록 생명력이 꺼져가는 것처럼 보이나, 눈앞에 있는 자는 반신에 가까운 초월자.
그럼에도 토드는 흑색 학파의 수장으로서, 당당히 그녀를 마주했다.
“오르카사의 충복이 솔마르의 복된 자녀를 뵙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