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54
154
하이젠베르크 대주교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녕 흑기사는 인간으론 상대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인가?”
성전사를 일격에 쓰러트리는 압도적인 무력.
심지어 파멸의 기사는 거듭 연전을 요구하는 기개를 보였다.
“죽음의 기사 역시 생전엔 인간이었소. 엄연히 죽음을 경험했던 자인만큼, 얼마든지 다시 잠재울 수 있소이다.”
대공의 말에 대주교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아직도 장담할 수 있소? 놈은 벌써 대전사를 넷이나 살해했소! 이제 놈에게 대적할 기회는 한 번뿐이란 말이오!”
“······.”
대공의 고심만큼이나 미간의 주름도 깊어졌다.
“만약 놈이 이대로 결투 재판에서 승리했다간, 절차가 어떻게 되는 거요?”
시도우 대주교가 답했다.
“토드 셰우드에게 기소된 혐의가 모두 무효로 처리되고, 그는 결투에 의한 전리품과 정당한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소.”
머리를 쥐어뜯은 하이젠베르크 대주교가 절규했다.
“그럼 되려 우리가 놈을 인정해주는 꼴이지 않소!”
시도우 대주교 역시 이마를 문질렀다.
선제후만 자그마치 다섯이나 모인 법정이다. 제국 내에서 이보다 권위가 높은 기관도 몇 없을뿐더러, 이단 명목으로 성전을 소집하기엔 교단의 대교구마저 분열된 상황.
결투 재판에서의 패소는 토드를 용인해주는 셈이다.
가뜩이나 사령술사 놈은 교활하게도 혼란스러운 제국 내 정국을 이용하여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여기서 그들이 패배했다간 앞으로 사령술사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단은 마땅치 않았다.
하이젠베르크 대주교가 이를 갈며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이다. 차라리 구금된 흑마법사 놈을 고문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건 어떻소. 그러면 공판 자체를 무위로 돌리고, 기세를 몰아 사령술사와 협력한 공모자들을 모조리 처형하는 거요! 이 불경한 도시를 구주의 이름으로 정화합시다!”
대악마들이 기립박수를 보낼만한 발언에 시도우 대주교조차 기겁했다.
“놈에게 위증을 유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뫼를렌푸르트에서 학살을 저지르자고? 자네 정녕 미쳤나?”
“요한! 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사교도더러 제국에서 마음껏 활개 치라며 친절히 공언까지 해주는 꼴은 볼 수 없어! 이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야!”
하이젠베르크 대주교의 눈동자가 화로 속 불씨처럼 사납게 타올랐다.
“그런 불경한 판결이 선고될 도시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게 낫다. 당초 이곳의 운명은 마귀에게 미끼로 던져줄 곳이었으니, 거룩한 대의에 따라 희생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 아닌가.”
그의 동공은 기이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물끄러미 대주교를 지켜보던 콘라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소이다. 그랬다간 걷잡을 수 없는 오명으로 남을 것이오.”
탁자를 부여잡은 하이젠베르크 대주교가 격앙된 어조로 으르렁거렸다.
─신의 뜻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콘라트?
기이하게도 대주교의 음성은 여인과 남성을 섞어놓은 듯한 고저가 동시에 울렸다. 기백에 압도당한 시도우 대주교는 쩔쩔매며 광륜표를 움켜쥐었다.
콘라트는 눈썹조차 꿈쩍하지 않은 채, 차분히 대꾸했다.
“아직 라이히슈타크가 남아있잖소. 내겐 제국 의회의 지지가 절실하오.”
─그깟 하루살이들의 지지가 그리도 중요하더냐? 네겐 천상의 의지가 닿아있다!
음성만으로 탁자 위의 대접들이 쏟아지고, 촛대와 의자들이 엎어진다.
전신의 체모가 곤두설 정도의 위광에 시도우 대주교가 벌벌 떨었다.
“무력으로 권좌를 쟁취해봤자, 제국의 혼란이 가중되고, 만민의 고통은 계속될 뿐이오. 난 그걸 바라지 않소.”
대공은 대주교의 육신 너머에 도사리는 존재를 또렷이 응시했다.
─위선자 같으니!
호통에 옷자락이 휘날렸다. 콘라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답했다.
“나를 뭐라 매도해도 상관없소. 다만 나는 만민의 갈채를 받으며 권좌에 즉위할 것이외다. 그게 나한테 주어진 사명이고,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있소.”
대주교가 손을 뻗어 그를 규탄했다.
─나는 네놈이 사령술사를 끌어들이려는 알량한 마음에 이미 일을 그르친 걸 알고 있다. 네 오만함은 이미 불확실한 전조의 씨앗을 잉태했노라.
콘라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내 착오를 인정하오. 그 잡도둑이라면 사령술사와 일맥상통하는 면모가 있으리라 여겼거늘, 생각보다 둘은 상이하더군.”
대공 앞으로 날아든 대주교, 혹은 무언가가 낮게 뇌까렸다.
─화신들은 각기 갈라져 나온 파편. 그들은 서로가 담지 못한 일면으로 구성된 존재들이다. 네놈들의 하등한 의식으로 조물주의 안배를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
“설령 여기서 놈이 승소하더라도, 원천적으로 시신에 손댄다는 금기는 변하지 않소. 놈의 명성은 도리어 반대자들을 결집할 명목이 되기에 충분하지.”
─어찌 확신하더냐? 당장 내일의 광채조차 눈에 담지 못하는 필멸자 무지렁이가!
폭풍처럼 휘감기는 언령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웠지만, 대공은 꿋꿋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본디 천상에 속한 존재이니 아득한 천체의 운행에 능통하겠지만, 나는 지상에 속해있잖소. 무지렁이들의 생태라면 그들과 덩달아 뒤엉켜 사는 필멸자가 더 잘 아는 법이지.”
콘라트는 목소리를 짜냈다.
“어차피 권좌에 등극한다면 놈을 제거하는 건 길바닥의 돌멩이를 치우는 것보다 어렵지 않을 거요.”
눈을 가늘게 뜬 대주교가 물러섰다.
─언제까지고 네놈의 실책을 묵과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어린 콘라트.
태양은 신의 눈이요, 그가 천상에 떠 있는 동안 그 권세는 사방에 미치나니.
펄럭!
남겨진 하이젠베르크 대주교는 강렬한 열기에 쬐인 것처럼 전신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제들이 몰려와 황급히 축성된 물을 뿌리고, 향로를 피웠다.
콘라트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변함없이 성미가 급하신 분이군.”
힘겹게 몸을 일으킨 시도우 대주교가 말했다.
“움슈타트 공, 어차피 공판을 내어줄 거라면 전력을 아끼는 게 현명한 판단이지 않겠소이까.”
대주교의 권유에 콘라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나 흑기사는 사령술사의 주요한 권속이오. 법궤를 걸고 맞붙으면 충분히 처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내 꾀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꼴이지.”
여타 권능을 제외하고도 그 기사의 순수한 기량이 이리 대단할 줄은 몰랐다.
하물며 개량된 병기의 위력이 대두되면서 무인들은 점차 도태되는 마당에 그만한 강자는 돌연변이나 다름없었다.
대공은 이를 갈아붙였다.
“지글러 경을 부르겠소이다.”
시도우 대주교가 눈을 치켜떴다.
“···그 검객을?”
대공으로선 가급적 여기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장의 한 수였으나, 최소한 사령술사의 핵심 전력을 이탈시키기 위해 내린 판단이었다.
“설령 강건한 투사라도, 무구의 달인을 장병기로 당해낼 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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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나선 양측 투사들의 극명한 대비에 군중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온통 칠흑빛으로 단단히 무장한 파멸의 기사와 달리, 피고 측 진영에서 걸어 나온 대전사는 순백의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더욱이 겉으로 신체 부위가 전혀 드러나지 않게끔 전신을 판갑으로 단단히 두른 이스라와 달리, 백기사는 주요 관절만을 보호하고 소가죽으로 덧댄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여긴 슬슬 총기가 도입되는 세계관이지. 어떻게 보면 저쪽이 최신 동향을 반영한 스타일이겠네.’
그래도 갑주 결투에서 입고 나오기엔 방어력이 좀 빈약하지 않나?
토드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백기사의 무장을 관찰했다. 이스라 역시 감상이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장검을 겨눈 채 물었다.
【그대의 무장은 지나치게 가벼워 보이는군. 본인의 검을 당해내기엔 부족해 보이는데,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투항하게.】
그러자 백기사가 바이저를 걷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오호,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젊은이!”
투구 속 면면을 확인한 이스라의 안광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백기사의 머리칼은 희끗희끗한 잿빛에 가까웠으며, 굴곡진 주름이 세월의 풍파를 여실히 드러냈다.
【허어. 아무리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더라도, 희생양으로 호호백발의 노구를 내보낼 줄이야. 괘씸한 놈들 같으니.】
이스라의 푸념에 백기사가 장검으로 지면을 두들겼다.
“예끼, 이놈아! 그게 어디 싸우러 나선 상대에게 지껄일 말버릇인고!”
한숨을 흘린 이스라는 장검을 휘어잡았다.
【아무리 봐도 영감은 검보단 지팡이가 어울리는 연세 같군. 본인은 기사도를 추종하는 몸으로서, 노약자의 목숨을 거두고 싶진 않다.】
망자의 눈엔 위태로이 흔들리는 생명의 불꽃이 보였다.
이스라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어차피 본인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어머니께서 거둬가실 목숨. 구태여 명줄을 재촉할 까닭이 있는가?】
백기사는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 보였다.
“흐흐! 고오얀 녀석. 나라고 녹슬어가는 노구를 끌고 쌈박질이나 하고 싶을 성 같더냐.”
【이 결투는 의도부터가 불순하다. 본인의 주인은 마수로부터 도시를 구원했고, 호혜를 베풀었노라.】
이스라는 선제후들이 앉은 쪽을 가리켰다.
【본인은 협잡꾼들의 중상모략으로 말미암은 누명을 걷어내기 위해 싸운다. 그대는 이 싸움에서 어떠한 영광이나 명예도 얻지 못할 것이거늘, 그대는 무엇을 위해 싸우려는 건가?】
어깨를 들썩인 백기사가 답했다.
“이 몸은 세르죠 디 도나치오 그레체 지즐러로다! 제국 사람들은 본좌를 가리켜 백화(白花)의 지글러라고 부르지.”
유려하게 혀를 굴리는 억양을 듣곤 이스라는 대번에 그의 출신지를 파악했다.
‘남쪽 도시국가 출신이로군.’
“보아하니 네놈은 내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만, 나는 이미 숱한 전장에서 충분한 영광과 명예를 거뒀느니라.”
파멸의 기사는 안광을 불태우며 뇌까렸다.
【그렇다면 낡아빠진 훈장에 만족하며 떠나가라. 늙은이. 본인은 정의를 위해 싸우나니, 그대를 벤다 한들 그리 자랑거리가 될 것 같지도 않다.】
이스라의 엄포에 세르지오가 바이저를 내리며 낄낄거렸다.
“아, 명예에 굶주린 젊은이라! 그렇다면 마땅히 검의 길을 걷는 선배로서 한 수 가르침을 주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느뇨!”
이 땅에서 꼭 기사들이나 나름 높은 직책을 해 먹는 인간들은 특유의 완곡어법을 구사하는 경향이 있다.
저렇게 배배 꼬아가며 말하지 않으면 입에 혓바늘이라도 돋는 걸까?
아니, 폐쇄적인 집단에서 권위를 드러내려면 으레 나타나는 특성일지도.
지켜보던 토드조차 진절머리를 냈다.
백기사는 검날의 중간을 거머쥔 채 마치 장창을 세우듯 수평으로 검을 겨눴다.
이스라가 보기엔 다소 생소한 자세였다.
하지만 상대가 미지의 검식을 구사하더라도, 뚫어내면 그만.
파멸의 기사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함성으로 투지를 끓어 올렸다.
【과거의 영광만을 좇다가 망령이 든 게 분명하군! 본인이야말로 교훈을 똑똑히 새겨주지!】
이스라의 신형이 튀어나갔다.
육안으로도 따라가기 힘든 속도!
사선으로 내리그은 장검은 단숨에 늙은 기사의 몸을 으깨버릴 것만 같았다.
채앵!!
토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법궤의 제약이 있는데, 이스라의 검을 쳐냈다고?’
파멸의 기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려베기에서 곧장 뒷날치기로 공세를 이었다.
차앙!
세르지오는 이번에도 받아쳤다.
심지어 한 손으로 검을 잡는 여유까지.
이스라를 위아래로 훑어내린 백기사가 과장된 몸짓을 내보이며 감탄했다.
“오! 라인슈테커 검술이로군? 젊은이답지 않게 꽤 오래된 검식을 사용하는 고로.”
칼자루를 돌린 이스라는 수평치기로 응수했다. 이에 세르지오는 마치 현악기의 줄을 튕기듯, 자유자재로 검날을 부여잡은 손의 위치를 옮기며 검을 돌렸다.
깡!
튕겨 나간 검을 재빨리 회수한 이스라는 정면에서 찔러넣었으나, 물 흐르듯 검을 흘려보낸 세르지오는 가볍게 이스라의 어깨를 타격했다.
어차피 상대의 검격은 얕다.
【마이스터 요하네스께서 저술한 저서에 따르면 라인슈테커식 검술이야말로 공방일체의 극의에 이른 싸움법이다!】
안광을 이글거린 이스라가 소리쳤다.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가!】
이번엔 검날을 감아올리며 근접할 요량이었는데, 어림도 없다는 듯 백기사는 가볍게 발을 놀리며 이스라의 반경에서 잽싸게 빠져나갔다.
‘저 너구리 같은 늙은이가!’
자꾸만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능청스러움에 이스라는 치가 떨렸다.
“호호, 고전도 나름의 고아한 흥취가 있기 마련이지.”
세르지오는 마치 원을 그리듯 일정 거리 내로 이스라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마치 자신의 검로가 읽히는 듯한 상황에 이스라의 안광이 흔들렸다.
“허나! 무릇 검술이란, 당대의 고명한 검객들이 직접 강철로 짓는 연작이라!”
투구 속 느물거리는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검술은 더욱 효과적인 살상법으로 수렴하고!”
카앙, 카앙! 캉!!
폭풍처럼 몰아붙인 이스라의 공세가 좌우, 상단에서 몰아닥쳤으나, 매번 세르지오는 손쉽게 막고, 흘려보냈다.
“이러한 경향에 뒤처지면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뒷굽으로 경쾌하게 바닥을 두드린 백기사가 허리를 숙였다.
몸이 구부러짐과 동시에, 쏜살같이 퉁겨 나오는 칼날.
정확히 투구의 눈가리개 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찌르기에 이스라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터엉!
【크으!】
폴짝 뒤로 물러선 세르지오는 검자루를 꼬나쥔 채 물었다.
“젊은이! 갑주가 제법 튼튼하군!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풋내기에겐 다소 과분한 게 아닌고?”
투구를 바로잡은 이스라가 으르렁거렸다.
【이 갑주는 본인의 정당한 소유물이다. 네놈이 이걸 감히 탐낸다면, 죽음보다 더한 파멸을 안겨주겠다.】
고위 망자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백기사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흐흠. 본좌에게 그런 무거운 갑옷은 필요없느뇨. 거추장스러울 따름이요.”
칼자루를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이스라는 이전처럼 격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더 예리하고,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전신의 감각을 고양시킨다.
카카카캉─!!
이젠 합을 주고받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묘기에 가까운 두 기사의 접전에 군중들이 놀라 수군거렸다.
“뭐, 뭐여! 저게! 무슨 칼자루가 폭풍우 때 풍차처럼 붕붕 돌아가는데?”
“보이긴 하냐? 시부럴, 내 눈엔 그냥 번쩍이는 것밖에 안 보여.”
토드 역시 이스라의 모습에 흥미진진한 상태였다.
‘이스라가 무구의 달인까지 한 발자국을 앞두고 있구나!’
이미 범인은 넘볼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검객들의 싸움이다.
육체로 자아낼 수 있는 정점의 기교다.
다소 투박하지만 견고하고 강맹한 이스라와 유들유들하고 날랜 세르지오의 대결.
정반대의 싸움 방식을 사용하는 검객 간의 공방이라 보는 맛이 있었다.
지친 기색조차 없이 휘파람을 분 세르지오가 말했다.
“젊은이. 그 흑색 갑주가 네놈의 정당한 소유물이라면, 혹여 제대로 된 기원을 알고 있는고?”
【물론이다! 로다빙 대제 때 주조된 중기병들의 갑주가 아닌가!】
검을 부딪치는 와중에 세르지오가 껄껄 웃었다.
“오호! 잘 아는 듯 허이 다행이구먼! 지금 시대엔 그 저주받은 유물을 기꺼이 보관할 정도로 유지가 오래된 가문은 얼마 없지!”
이스라는 사납게 안광을 구기며 장검을 휘둘렀다.
‘이 늙은이··· 대체 속셈이 무엇인가?’
“콘라트가 성화를 부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나섰는데, 이런 곳에서 오래된 인연을 마주칠 줄이야. 실로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이 또한 지엄한 구주께서 안배한 숙명인고.”
세르지오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이스라는 검날을 움켜쥔 채 자루를 내리찍었다.
콰직!
무릎을 얻어맞은 세르지오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아이코야! 비겁하게 어르신 말씀하시는데!”
하지만 동시에 백기사의 칼날도 예리하게 견갑과 흉갑의 이음새를 헤집는다.
안광을 일그러트린 이스라는 덜렁거리는 어깨를 끼워 맞추며 되물었다.
【그대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고 떠드는가. 지글러 경.】
노인의 외형은 속임수다.
칼자루에 얻어맞고도 백기사에게선 골절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좀 전의 비명은 엄살에 불과했다.
“아무렴. 잘 알고야 말고.”
득달같이 달려든 이스라가 수직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의외로 세르지오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카앙!!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검을 맞댄 채, 백기사가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제국에서 저주받은 갑주를 보관하는 혈통은 헤젤슈마흐 쪽이지.”
【······!】
헤젤슈마흐.
얼마 전 자신이 무의식중에 입에 담았던 이름.
그러나 여전히 망각의 저편에 파묻혀 자취조차 더듬기 어려운 희미한 잔상.
바인딩으로 검을 젖히겠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이스라는 용을 쓰며 물었다.
【말해라! 갑주와 헤젤슈마흐에 대해서 뭘 알고 있는가!】
투구 속 노인의 눈동자가 반달을 그렸다.
“흐흐. 그쪽 집안에서 이 갑옷을 입을 만한 재목은 없었지만, 유달리 탐을 내던 아이만큼은 똑똑히 기억하지.”
카가각!
이스라를 밀어낸 세르지오는 머리 위로 높게 검을 치켜든 채 날의 상단과 칼자루를 거머쥐었다.
“비록 갑주 속에 모습을 감추고, 키도 훌쩍 자랐으나, 난 기억 속 네 모습이 선하거늘, 너는 날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느뇨! 라 피꼴라 씨뇨리나(꼬마 아가씨)?”
이스라는 안광을 부릅떴다.
【본인은··· 분명 그대를 모른다. 헌데, 어째서 말미의 호칭은 낯설지 않은가.】
세르지오는 싱긋 웃으며 발을 까딱였다.
“어허, 통재라. 자신이 싸우는 이유는 알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잊어버린 고로.”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순순히 실토하라! 본인을 알아야만 하겠다!】
“그렇다면 나를 꺾어라. 젊은 기사여! 자네가 그토록 바라는 답을 쟁취하고자 한다면, 무인답게 검으로 구하라.”
이스라는 육성 대신 분노의 베기로 화답했다.
달려드는 파멸의 기사를 바라보며 세르지오가 태연히 읊조렸다.
“내가 백화의 지글러라 불리는 까닭을 친히 알려주마.”
남부 도시의 검객, 리베리는 여섯 가지의 베기와 더불어 한 개의 찌르기를 아우르는 일곱 방향의 검결, 「세테 스파다」를 강조했다.
세르지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토드가 급히 의념으로 외쳤다.
‘이스라! 물러서세요! 저건 피할 수 없습니다! 사방, 아니, 모든 방향에서 옵니다!’
“그 누구도 나보다 담대하지 못하나니, 나는 사자가 품은 용기와 같이 누구에게나 맞서노라.”
무구의 달인, 장병기 운용에 있어 달인의 경지를 넘어 극에 달한 존재들.
게임상에선 그래픽 묘사의 한계로 단순히 섬광이 터지면 휘말린 적들이 쓸려나가는 모습으로 간략화되어 표현되곤 한다.
하지만 토드는 늙은 기사가 펼친 초인적 극의를 생생히 목도할 수 있었다.
수직베기, 사선베기, 올려베기, 수평베기와 더불어 양극단의 찌르기가 동시에 들어간다.
저게 마력이나 권능의 보조 없이 순수한 육체의 근육 구조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행동이긴 한 건지 의문이 든다.
허나 진정 경외심을 자아내기에 무구의 달인이라.
이스라의 눈앞에 일곱 갈래의 꽃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