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9
019
부름은 닿았다. 관건은 언제 도착하느냐인데···.
토드를 예의주시하던 부사관이 중얼거렸다.
“네놈이 여기서 뭘 꾸몄는지 몰라도, 살아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한 걸음 물러선 토드가 자신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오, 여기서 죽고 싶진 않은데요. 아직 하고 싶은게 많은 창창한 인생인지라.”
토드를 몰아세운 부사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냅다 달려든 그가 장검을 휘둘렀다.
후웅-!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섬찟하다.
황급히 몸을 굴러 피한 토드는 허겁지겁 달아났다.
‘돌겠네, 진짜.’
보통 소환물을 부리는 클래스들은 1:1 대인전에서 취약한데, 그중 사령술사는 최약체다.
하물며 마법사처럼 방어막이나 점멸과 같은 유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원체 저질스러운 육체 능력치 때문에 갑옷을 입고 돌아다니기도 어렵다. 그랬다간 어깨가 빠진다.
다수의 망자를 운용하면서 토드도 적지 않은 정신력을 소모한 상황.
현기증 때문에 머리가 핑핑 돌고, 귀에는 이명이 윙윙 울린다.
황급히 주변에 쌓인 상자를 넘어트렸지만, 부사관은 몸으로 뚫어내며 달려왔다.
점점 입에서 단내가 올라온다.
사방이 온통 불길에 망자들까지 돌아다니고 있어 난장판이었다.
당장 바로 옆에서 살점을 탐하는 망자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무차별적으로 일으킨 놈들이라 제 주인도 못 알아볼 가능성이 높았는데.
【쩝, 쩝. 으으?】
아, 눈 마주쳤다.
이런 상황에서 순발력과 거리가 한참 먼 토드였다.
【캬악!】
급기야 발목을 붙잡힌 토드가 요란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눈앞에서 불똥이 튀기는가 싶더니, 오른쪽 발목이 돌아갔다.
집요하게 뒤를 쫓아온 부사관은 달려드는 망자의 가슴팍에 칼을 꽂아넣었다.
허물어지는 시신을 발로 걷어찬 그가 중얼거렸다.
“시체들이 갑자기 땅밑에서 솟아올랐지. 변경백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도 있었고.”
바닥을 기어가는 토드를 돌아본 부사관이 검을 다잡았다.
“하필 전투 중에 수상한 놈이 여기 숨어있었다니. 얼추 아귀가 들어맞지 않나?”
가뜩이나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가신 토드가 입가를 이죽댔다.
“대단하신 관찰력입니다. 칭찬해드릴까요?”
부사관의 시선이 말뚝에 묶여 안절부절 못하는 짐말에 닿았다.
“네놈은 어떻게든 살려서 데려가야겠다. 대신 다리는 필요없겠지.”
“이런, 평생 기어다니는건 사양인데.”
끝까지 나불대는게 흑마술 나부랭이가 틀림없다.
부사관이 힘껏 장검을 치켜들었다.
【받-아-랏―!】
“······?!”
콰드득-
육중한 형체가 그대로 부사관을 들이받았다.
저 멀리 나가떨어진 부사관은 구겨진 채로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어디서 끌고왔는진 몰라도, 덩치큰 군마의 고삐를 쥐고 있는 건 다름아닌 이스라였다.
【하, 하. 하!! 수련이 부족한고로! 무릇 단련된 사내라면 군마 쯤이야 기백으로 받아넘겨야지!】
“평범한 사람은 말한테 치이면 죽습니다. 이스라.”
【쯧쯧, 그게 다 허약해서 그런 거네. 사령술사. 기사도 전집에 이르길, ‘오뚝이 오스발트 경’은 하루에 기병돌격을 9번이나 맞고도 일어났다고 하더군!】
그게 가능한 건가?
【비록 다음날 뇌진탕으로 돌아가셨다고 전해지네만, 사소한 후일담일세! 목 근육을 좀 더 단련했다면 생존했을 것을!】
음.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게 분명하다.
【흠흠! 어쨌거나 기사도 전집에 이름 한 줄 올렸으니,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그 또한 명예로웠으리라-!】
과연 고인도 그렇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기사들의 마음가짐이 대체로 그렇다면야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능숙하게 말에서 내려왔다.
【어쨌거나 구하러 왔네, 토드! 저런 잔챙이에게 휘둘리다니!】
“저는 신체 능력이 미진해서 말입니다.”
【역시 허약한 사령술사답군! 이 또한 유약한 주인을 섬기는 호위 기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겠지! 한껏 감사해도 좋네.】
“아주 시기적절했습니다. 그나저나 이스라, 등에 불이 붙었는데요.”
호탕하게 웃는 이스라의 등에는 여전히 불티가 붙어 있었다. 영락없이 지옥에서 올라온 멸망의 기수 같은 모습이었다.
죽음의 기사는 태연히 어깨에 옮겨붙은 잔불을 털어냈다.
【아, 그 자네가 말한 요술쟁이의 불꽃이 제법 화끈하더군! 물론 그래봤자 전투를 향한 본인의 정열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하, 하! 하.】
카리나의 주문은 결코 기백으로 견딜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토드는 대강 이스라의 갑주가 심상치않은 물건임을 눈치챘다.
보아하니 정작 소유주는 모르는 것 같지만.
그제서야 토드의 상태를 파악한 이스라가 허리를 굽혔다.
【이런, 발목이 나갔군! 걸을 순 있겠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계속 주저앉아 있을 이유가 없지요.”
【하긴! 그렇지. 난 또 자네가 이곳의 흥취를 감상하고 있는 줄 알았네. 정신나간 흑마법사의 심미안이라면 피와 비명으로 가득한 전장이 감미롭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
“저도 비교적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습, 갸아악!”
빠각!!
우악스럽게 토드의 발목을 비튼 이스라는 이리저리 뼈를 맞췄다.
【후후, 다행히 본인은 기사도 전집을 수도 없이 완독했다네!! 거기서 배운 응급 처치술이 비로소 빛을 발하는군. 평소 틈틈이 서적을 탐독하는 것 또한 기사의 소양이지!】
이쯤되면 대체 그놈의 기사도 전집에 안 들어있는 내용이 뭔지 궁금해진다.
사실상 뼈를 맞췄다기보단 어긋난 자리를 깎아낸 느낌이었지만, 절뚝거린 토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배회하던 망자 몇 구가 달려들었지만, 이스라가 가볍게 제압했다.
【그나저나 사방에 자네가 풀어놓은 놈들이 가득하군. 이걸 다 진정시키려면 애 좀 먹겠어.】
토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둑하던 주변이 군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들은 조만간 와해될 겁니다. 전황은 어떻습니까?”
어깨를 으쓱인 이스라가 칼날을 각반에 문댔다.
【우리의 완전한 승리일세! 성채에 들어온 놈들은 모조리 전멸했고, 밖에 있던 잔존병들은 변경백의 병사들이 패퇴시켰다네.】
요행으로 거둔 승리다.
보통 적진에 마법사가 있으면 산개진을 펼치는게 당연한 상식이지만, 망자들에게 대응하려면 어쩔 수 없이 대형을 밀집시켜야만 한다.
토드는 그 딜레마를 잘 파고들었고, 이리공은 걸려들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적진 한가운데에 숨어있을 줄은 몰랐군. 유약한 사령술사답지 않게 대단한 배짱이네! 하, 하! 하.】
“운이 좋았습니다. 제 마력을 탐지할 자가 없더군요.”
토드로선 조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마을을 전소시켰던 건 마법의 불꽃이었다. 분명 이리공 휘하에도 마법사, 혹은 비슷한 권능을 부리는 자가 있다는 뜻인데, 그는 평원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가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가 자신을 찾아냈다면, 어차피 목걸이도 있으니 동귀어진할 생각이었는데.
유일한 불안 요소가 있다면 그놈 뿐이다.
망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패잔병들을 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스라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제 소문이 널리 퍼지겠군. 죽은 자를 일으키는 마법사가 있노라고.】
“그러겠지요.”
어깨를 들썩인 죽음의 기사가 눈을 번뜩였다.
【그가 휘하에 무시무시한 투사를 두고 있다는 것도 덩달아 알려지겠지! 얼마나 강맹한 자들이 도전할 것인가! 장차 다가올 전투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는군!!】
이스라의 심장은 멈춘 지 오래다.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더라도, 일종의 심리적인 착각에 불과하다.
죽음의 기사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은 강렬한 집념이다. 사령술사의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하수인은 종래에 조작이 용이한 인형으로 전락할 뿐, 필연적으로 한계가 온다.
그래서 피의 업으로 복속한 하수인은 소생 자체가 용이할진 몰라도, 성장하지 못하고.
눈물의 업으로 일으켜 세운 하수인은 동기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업을 삼키며 격을 쌓아올릴 수 있다.
망자에게도 생자처럼 동기가 필요하다니.
토드 자신의 존재만큼이나 우스운 역설이다.
“진정한 무인다운 기개입니다. 이스라.”
토드의 맞장구에 이스라가 의기양양하게 군마를 쓸어내렸다.
지친 말은 힘겹게 투레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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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리공을 비롯한 적의 지휘부는 진작에 전장을 이탈했지만, 동이 틀 때까지 곳곳에서 산발적인 교전은 이어졌다.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줄기도 그치고, 밤의 장막을 걷어낸 여명이 성채의 전경을 비춘다.
투쟁의 열기가 사그라든 전장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악에 받쳐 배회하던 망자들도 하나둘씩 힘을 잃고 고꾸라졌다.
【과연. 죽은 자들은 광명 아래 활보할 수 없는 건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로다.】
“당신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로입니다.”
【음. 그래도 햇살이 좀 따갑게 느껴지는군.】
망자는 낮에 잠들고, 밤에 움직인다. 이스라도 망자인 이상 햇빛이 조금 버거운 모양이었다.
들판을 누비던 토드는 웬 말뚝을 발견했다.
땅에는 황소들이 끌고온 바퀴 자국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명백히 드워프 포병대의 흔적이다.
눈을 가늘게 뜬 토드가 중얼거렸다.
“이게, 대포···?”
【화포라기보단, 야장들이 단조할 때나 쓸 법한 물건같군.】
숫제 통짜 쇳덩어리나 다름없는 물건의 표면은 널찍했다. 그 위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한 걸로 보아 전투 중에 이걸 신나게 두들겨댔다는건 분명했다.
【요술의 자취가 느껴지는군. 자네는 뭔지 알겠나?】
“글쎄요. 저도 드워프들의 룬에는 무지한지라.”
이걸 노획해봤자 그리 쓸모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드워프 일족의 전통 공예에 가까운 기술이라.
문득 이스라가 턱짓했다.
【저들은 뭔가? 사령술사.】
고개를 돌려보니 전투의 상흔이 역력한 병사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된 싸움이었는지 성한 곳이 없었지만, 그들은 꿋꿋이 서 있었다.
“전투는 끝났습니다. 불굴의 투사들이여. 그대들의 무위에 경의를 표합니다.”
해골 병사가 그리 강한 망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절반이 지난밤의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아침 햇살을 등진 그들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고개 숙인 토드가 고했다.
“안식을 취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달그락.
【이리공···.】
안와에 맺힌 불꽃이 선명하게 번뜩인다.
달그락.
【그자의 목을,】
달그락.
【취할 때까진,】
달그락.
【이대로-】
해골 병사들 전원이 합창하듯 읊조렸다.
【잠들 수 없다.】
【우리를-】
【계속, 싸우게 해주시오.】
생물은 삶에 대한 욕구에 기반하여 약동한다. 그것마저 박탈당한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선명한 악의, 혹은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지독한 집념.
그래서 영가는 구천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승을 방양한다.
그리고 사령술사의 본분은 이를 이루어주는 데 있으니.
토드의 입꼬리가 승천하기 직전이었다.
딸랑.
“승낙하겠노라. 그대들은 맹세를 이행하겠는가?”
【이리공에게, 죽음을.】
열다섯의 망자들이 일제히 무릎 꿇었다.
여명에 비친 육신이 용해를 멈추고, 당당히 태양 아래 바로 선다.
서약은 완료되었다.
그들을 훑어보던 이스라가 흡족해했다.
【훌륭한 전사들이로군. 가혹한 신들은 저들을 외면했으나, 자네가 두 번째 기회를 베푼 셈이니.】
“맹세를 이행할 때까진 저를 충실히 따를 테죠.”
피로 강제한 망자들은 생전의 기량이 저하되는 패널티를 받지만, 눈물로 계약한 망자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더욱이 저들은 ‘해골 서약병’으로 거듭났으므로, 대략 3~5레벨 정도의 보너스를 받는다.
앞으로 토드의 마력을 상시 점유할테니, 당분간 그가 부릴 수 있는 망자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서약병과 일반적인 망자 사이에는 상비군과 모집병의 수준에 준하는 간극이 있었다.
한시적으로 부리는 고기방패가 아니라, 상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생긴 셈이다.
【그나저나 저 녀석들을 이끌고 다녔다간 주변의 이목을 끌겠군. 한눈에 봐도 산 자들이 껄끄러워할테니.】
서약병으로 승급하면서 해골 병사들이 풍기는 기세가 묵직해졌다.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당분간 변경백의 마법사로 종군할테니까요.”
【그건 희소식일세! 그래봤자 그가 언제까지 자네의 뒷배를 봐줄 지는 모를 일이다만.】
토드는 마른 입술을 훑었다.
“앞으로도 상황을 예의주시해야겠지요.”
이어지는 토드의 행동에 이스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헌데, 자네··· 뭐하나?】
삽을 든 토드는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그가 태연히 대꾸했다.
“전사자들의 장례를 치러줘야죠. 넋을 달래주지 않으면 다음 보름달에 이 일대가 온통 저주받은 터가 될 겁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삽질에 매진하는 모습에 이스라가 혀를 내둘렀다.
졸지에 엉거주춤 서 있던 서약병들도 토드를 도와 시신들을 매장하는 작업을 도왔다.
‘이거 하나하나가 업을 주는데. 절대 못 참지.’
티끌모아 태산이다. 게다가 서약병들과 계약하느라 적지 않은 눈물의 업을 소모했다. 이스라의 활약 덕에 피의 업은 충분히 모였지만, 눈물의 경우 바닥이 드러났다.
어차피 레벨을 올리려면 양쪽 업의 균형을 신경써야 하니, 사령술사도 어지간히 까다로운 클래스였다.
게다가 얄팍한 위선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편안한 숙면을 위해서라도 토드가 의례처럼 행하는 일이었다.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이 나뒹구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꼭 그날은 잠을 이루기가 어렵다.
이젠 익숙하다.
【정말 살아서 고생이라는 말이 적절하군. 본인은 죽은 몸이라 이해 못하는 처지다만.】
뼈가 있는 농담이었다.
시신을 옮기는데 여념이 없던 차에, 일련의 무리가 다가왔다.
호위병을 대동한 변경백이었다.
토드는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각하. 승전을 경하드립니다.”
허탈한 미소를 흘린 변경백이 입에 대고 있던 손수건을 떼며 대꾸했다.
“내가 승리를 축하받을 입장은 아닌 듯하군.”
그는 토드 주변에 호위대처럼 기립한 서약병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자네가 부린 마술은 정말 대단하지만, 한편으론 이 모든 걸 이끌어낸 그대의 계책 또한 인상적이었네. 땅밑에서의 급습이라니··· 저들이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걸세.”
일전에 집무실에서의 때와 달리, 그의 눈빛과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내린 최선의 임기응변이었을 뿐이죠. 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두 번 다시 당해 주진 않을 겁니다.”
변경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허나 그대의 계책이 적을 궤멸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여태 우리는 이렇다 할 승리가 없었고, 패전의 연속이었으니. 너무 겸양 떨 필요 없네.”
“이제 앞으로의 계획은 어찌 되십니까?”
변경백은 디트마흐가 달아난 평원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마음같아서는 패주하는 놈들을 모조리 산 채로 붙잡아 갈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다만,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걸 알고 있네. 일단 급한 대로 이리놈이 주둔지에 버려두고 간 보급품으로 굶주린 병사들을 먹이겠다만, 요코프와 휴그를 마냥 기다려야겠지.”
“적지로 들어가 현지에서 충당하는 건 어떻습니까?”
토드의 제안에 변경백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수확철은 한참 지났네. 밭에 마땅히 걷을 곡식도 없고. 그렇다고 민초들의 곳간에 남은 지푸라기를 털어봤자 좋을게 없지. 전쟁은 순전히 다스리는 자들의 일이네.”
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백은 다혈질적인 성미가 강해 보였는데, 의외로 정신머리는 박혀있는 제후였다.
나름 전쟁 이후의 상황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이게 정상적인 통치자의 사고방식이다. 뒤가 없는 것처럼 불사지르는 이리공이 워낙 별난 경우였고.
“하지만 이번 승리만으로 그들이 각하의 신민이 되리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쾨흘링 지방에 인접한 뵐케 주는 약탈을 시도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에 변경백은 헛기침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사방에서 풍기는 시취를 견디기 어려웠던지, 그는 시종이 건넨 새 손수건을 코에 덮은 채로 답했다.
“그게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네. 본래 디트마흐놈이 점유하고 있는 뵐케 주는 내 사촌의 권역령이었네. 그래서 내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땅이지. 반대로 쾨흘링 땅 역시 그놈의 핏줄이 엮여 있어서 계승을 주장하고 있고. 서로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는 토지이기에, 섣불리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건드릴 수 없는 거라네. 어차피 통치해야 할 영토이니, 민심과 안정화 문제도 신경 써야 하지.”
‘애초에 분쟁이 진작에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동네였구나.’
토드는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존의 뼈대 있는 세습 귀족이나 새로이 봉분을 받은 나으리들 간의 복잡한 개족보야, 워낙 흔하면서 머리 아픈 얘기였다. 그 문제 때문에 제국의 지도가 걸레짝처럼 난장판이 되지 않았던가.
토드 역시 지금은 전용 마스크를 끼고 있지 않았기에, 유독한 암모니아 냄새에 기침을 했다.
시종이 ‘그쪽도?’라는 표정으로 손수건을 내밀었으나, 토드는 정중히 거절했다.
어차피 작업은 거의 끝났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일단은 증원을 기다리면서 앞으로의 진군 방향을 논의하는 게 최선이겠고요.”
“그렇다네. 전투 직후 곧바로 척후를 보냈으니, 머지않아 소식이 올걸세.”
거기서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서약병들이 묵묵히 시신을 나르는 가운데, 변경백은 아직도 뭔가 할 말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였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변경백이 재차 헛기침했다.
“어흠, 증원군이 도착하면, 그들이 가져온 짐에 나의 인장과 서류 작성에 필요한 물품들도 있을 걸세. 아무리 우리가 약식으로 계약을 맺긴 했어도, 추후 조건에 대하여 정식으로 문서화해두려 하네.”
정식 스카우트 제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