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위로(1)
“정말? 그걸로 된다고?”
수현의 얘기를 들은 김윤범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때? 괜찮겠어?”
“얘기만 하는 건데, 어려울 건 없지. 근데, 그게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모르겠네.”
김윤범이 머리를 긁적였다.
수현이 김윤범에게 한 부탁은 간단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에 어떤 일, 물건, 혹은 상황과 행동이 위로가 됐는지.
기억나는 걸 그저 들려달라는 것.
물론 그걸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싶단 얘기도 했다.
전시회에 걸게 될 수 있을 거란 말도 했고.
“민감한 사건까지 구체적으로 말해줄 필욘 없어. 어, 물론 최근의 일은 네가 말해주긴 했지만.”
수현이 덧붙이자 김윤범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난, 음악.”
“음악?”
“응. 음악을 들으면 그 순간엔 부정적인 감정들을 누르기 쉽더라고. 아니, 나쁜 감정이 다른 성격의 감정으로 옮겨간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진정되는 효과가 있었어.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계속 반복해서 들었고.”
“그렇구나.”
“근데, 이건 도움이 안 되지 않을까? 음악을 어떻게 그림으로 그려? 막 음표 같은 걸 그릴 건 아니잖아.”
“하하. 물론 아니지.”
“그러니까. 내 얘긴 별로 네 그림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그건 걱정 마.”
수현이 싱긋 웃었다.
“어떻게 구상하고 이미지로 만들어내느냐는 내 몫인 거니까. 너는 그냥 음악이 너한테 해준 위로가 어떤 거였는지, 당시의 경험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한테 말해주면 돼. 다음은 내가 고민해볼게.”
“그래? 그렇다면야 뭐…….”
김윤범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과 가수, 그리고 그 음악을 알게 된 계기며, 앨범마다 다른 특징, 처음으로 콘서트에 갔던 일 같은 추억들을 잡다하게 풀어놓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로 생각난 것들이 있는지 덧붙이고 거기에 말을 또 이어가는 바람에 나중엔 수현이 그만하면 됐다고 만류해야 할 정도였다.
“정말 이걸로 된 거야?”
“응. 충분해.”
“그래도. 내가 너한테 받은 거에 비하면 너무 시시한 것 같은데?”
“글쎄. 그림을 그려봐야 확실하긴 하겠지만 절대 작지 않을 건데?”
“어?”
“나한테도 큰 도움이 됐다고. 고마워. 네 얘길 들려줘서.”
수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회에 걸어야 할 작품 수를 생각해보면 소재를 포착해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이의 경험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시간이 크게 단축될 수 있다.
게다가,
“수현, 나 오늘 상담 좀 해도 될까?”
“반장, 결국 나 예인대 가는 게 나을 것 같거든. 내신이랑 수능 점수는 얼마나 나와야 안전할까? 상담 조금만 더 해줄 수 있어?”
“한수현. 난 요즘 그림이 갑자기 안 되는데 왜 그러는 거야? 잘 그리던 것도 안 그려져. 슬럼픈가? 이럴 땐 어떡해야 해?”
미술과 애들의 상담 요청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한 명씩, 차례차례 말하자. 그리고, 나도 너희한테 부탁할 게 있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던 상담 요청이 어쩌면 엄청난 소재가 묻힌 금맥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부탁? 뭔데?”
“말만 해! 근데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게 있어?”
“간단해. 그냥 너희 경험을 좀 들려주기만 하면 되거든.”
수현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며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수현은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
상담을 요청한 애들은 본인의 궁금증을 해결한 다음엔, 꽤 진지하게 자기 얘길 들려주었고 수현이 그걸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게 흔쾌히 허락했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그림으로 그리기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지화하기 쉬운 소재가 있는가 하면 추상적인 스토리라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되는 것도 있었으니까.
음악, 친구, 음식, 칭찬, 따뜻한 말 한마디, 꽃, 잠, 불꽃놀이…….
어쨌거나 수집한 소재들은 수현의 스케치북에 차곡차곡 쌓여갔고, 다시 수많은 스케치로 탄생했다.
수현은 천천히 몰입하며 그것들이 어떻게 완성될지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
정물화를 그릴 때, 특히 입시 그림의 경우엔 꼭 바닥에 천을 깔아둔다.
보통은 흰 천, 때론 체크무늬가 들어간 밝은 천을 깔아놓는데, 그로 인해 정물을 좀 더 뚜렷하게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림은 2차원인 종이 위에 3차원인 입체를 나타내는 행위.
그러니 단순히 정물만 묘사하지 않고, 그게 놓인 바닥과 멀리 떨어진 배경을 구분해 함께 그리면 그림에 깊이감을 주기 쉬워진다.
바닥에 깔린 천에 살짝 주름을 잡아 입체감과 생동감을 살리고, 빛을 이용해 하이라이트와 그림자를 표현하고 소실점을 잡아 원근을 나타내는 것도 마찬가지 목적.
모두가 감상자가 그림 속 공간을 실감할 수 있게 쓰는 방법들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들은 한편 작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빛에 대해 풀어보자면, 우리 주변의 물체는 그림 속 정물처럼 한 방향에서만 오는 빛을 받지 않는다.
여러 광원의 영향을 받아 밝고 어두운 부분의 경계가 흐릿하기도 하고 그림자가 여러 방향으로 겹치기도 하고.
‘결국 조명과 공간을 활용하는 이런 방법들도 입체감을 표현하려는 고민 끝에 나온 기술의 하나일 뿐이야. 절대적인 방식은 아니란 거지. 그렇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그 기초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시도해보고 싶은데…….’
수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위로’
첫 전시회 주제로 삼은 ‘위로’ 연작을 기획하면서 수현은 어떻게 하면 각 그림이 하나의 주제로 묶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작품의 배경을 처리하는 방식과 구도에 통일성을 주면 좋겠단 생각을 떠올렸고.
시선이라는 콘셉트에 맞게 각각의 소재는 다른 두 개의 시선으로 그릴 예정이었다.
스티브의 솜사탕의 경우, 솜사탕 그 자체를 그린 그림과 솜사탕을 든 스티브를 그린 그림을 한 쌍으로 묶을 계획이었던 것.
즉, 솜사탕을 바라보는 스티브의 시선과 그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비교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구도는 쉽게 해결됐는데, 배경이 문제였다.
소재와 하나의 인물로 주제가 단순하고 명쾌해지다 보니, 오히려 배경의 역할이 커진 것.
이왕이면 모든 주제에 관통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고, 그러려면 단순히 뭉개고 마는 배경이 아닌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단 욕심이 들었다.
“후우…….”
습작을 그리던 수현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브제가 꽉 찬 풍경을 그릴 땐 비어있는 나머지 공간에 대해 크게 고민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하나의 물체, 즉 주인공만이 돋보이는 그림이 되다 보니 배경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어떤 기운을 드러내는 게 좋을지,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게 좋을지, 공간을 살리는 게 좋을지,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중 어떤 게 시선을 잡기 좋을지.
시선을 완벽하게 뺏는 게 좋을지, 적당하게 흩어지게 하는 게 좋을지…… 많은 부분이 고민이었다.
“한번 볼까.”
수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같은 솜사탕 그림만 벌써 10장째.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많은 부분에 차이가 있었다.
재료와 질감의 표현. 그리고 면적을 사용하는 방식 같은 것들이 저마다 달랐던 것.
머릿속에서 구현된 이미지 중 그럴듯한 걸 몇 개 추려 직접 그려본 건데, 힘들긴 해도 막상 그려놓고 보니 비교가 쉬웠다.
“이건 너무 노골적이네. 좀 더 은근한 느낌이 좋겠어.”
“이건 주제가 잘 안 나타나는 것 같아. 배경의 채도를 조금만 더 떨어뜨려 볼까?”
“확실히 단색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작게라도 변화를 주는 게 밀도감이 있어 보여.”
“수채화도 좋긴 한데, 떨어져서 볼 땐 확실히 아크릴이나 유화 쪽이 눈에 들어오긴 하는구나.”
어떤 것들은 직접 확인하지 않고, 머리로 그려봐도 대충 알 수 있는 것들이긴 했다.
그러나 수현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그려가며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실재가 다르지 않은지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기초가 튼튼해야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고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첫 전시회라는 부담과 책임감이 수현의 자세에 영향을 미쳤던 거다. 그리고,
“밝은 게 좀 더 나을 것 같다.”
마침내 수현이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냈다.
어두운 색감으로 칠해 주제가 핀 조명을 맞은 듯 또렷하게 보이게 하는 배경보다, 밝지만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배경 쪽이 주제인 ‘위로’와 어울려 보였던 거다.
“햇살이 쫙 내리쬐는 따뜻한 공간. 그래, 위로의 기억이면 그런 공간이 어울릴 거야.”
수현이 눈을 감고 이번엔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스티브와 김윤범, 그리고 다른 친구들.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면서, 막상 자신의 기억 속 위로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게 문득 깨달아졌던 거다.
‘나한테도 친구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지. 그래. 애들과 비슷비슷하게 아주 사소한 일들로 위로받았어.’
수현이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어떤 건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사건이었고, 어떤 건 누군가의 웃는 얼굴이었고, 어떤 건 그마저도 흐릿한 색감이었다.
그리우면서도 따뜻하고, 뭉클하면서도 슬픈, 가라앉으면서도 행복한 복잡미묘한 기분들.
그건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어떤 색으로 어떤 터치로 어떤 형태로 붙잡을 수 있을까.
고민은 잠시였다.
스슥. 슥슥. 스스슥.
캔버스에 바짝 다가간 수현이 붓을 들어 무언가를 그려가기 시작했다.
탕. 타탓. 스슥.
붓을 씻고 새로운 물감을 섞어 듬뿍 바른 후, 그걸 다시 캔버스에 올렸다.
휙. 사악-.
빠르게, 부드럽게 속도를 바꿔가면서,
휘릭. 사라락. 사사삭.
큰 붓과 작은 붓을 번갈아 사용했다.
“후우.”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수현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머릿속에 떠올랐던 마지막 이미지를 붙잡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사사삭. 슥슥.
밀도를 올리며, 새로운 색을 섞고, 쌓은 것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명암을 드러내고, 색을 입히고 또 쌓으며 수현은 그리려던 이미지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입으로 휙 뱉어내는 말처럼 그림의 속도는 빠르지 않다. 그러니 몇 시간이나 꼼짝하지 않고 손을 움직이고 나서야 겨우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색감과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수현은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붓을 놓으면 가까스로 따라가던 영감의 끝자락을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아.”
수현은 한쪽 손으로 맞은편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는 다시 손을 들어 휙- 붓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거야.”
수현의 손이 뚝 멈추었다.
“그래, 이거였어.”
수현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친구들의 얘기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들.
수현의 기억 속에 조각으로 남은 감정들.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을 녹여주었던, 가장 쓸쓸하고 외로웠던 순간을 안아주었던 무언가.
이름과 형태가 다른 각각의 위로가 캔버스 안에 완벽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거면 됐어. 드디어 찾았다.”
이젤에서 조금 떨어져 그림을 확인한 수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던 텅 빈 백지는 어느새 수현이 그리려던 것들로 충만해져 있었다.
전시회의 첫 그림이 그렇게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