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n obsessed tyrant and a sleeping cat every night RAW novel - Chapter (97)
Chapter 97
정곡을 찔렸으나 킬리언은 태연히 알키오를 응시했다.
“출발이나 해.”
“전하, 이 일에 대해 더 말씀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결혼이라고요! 심지어 이 평화로운 시기에 피르마타 프러포즈라니! 그게 통했다는 거잖아요!”
“당장 윙스턴으로 출발해. 그게 더 급한 일이야.”
“그렇지만 전하께서 결혼을 하신다는 건, 이건 정말……!”
“…….”
킬리언이 고요한 시선을 띤 채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알키오를 쳐다보자, 알키오가 급히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네, 일단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다녀오면 그래도 말씀은 해 주셔야 합니다?”
“글쎄.”
“와……! 전하께서 저보다 먼저 결혼을 하신다니!”
“아, 그게 불만이었나 보지?”
“하! 서, 설마요! 그저 기쁜 마음에! 하하하하! 축하드립니다, 전하! 냉큼 다녀오겠습니다!”
알키오가 퍼뜩 웃음으로 무마하며 말에 올라탔다.
여태껏 여자는 근처에도 두지 않던 킬리언이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하니, 늘 여자에 둘러싸여 지내던 알키오의 입장에선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달려 나가는 알키오의 뒷모습을 확인한 킬리언이 느긋하게 방향을 돌려 발을 옮겼다.
물론 알키오의 말이 옳았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레네트의 조건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년 6월에 혼인 관계 유지에 대해 재고해 주세요. 그게 제 조건이에요.’
“하, 재고……?”
그건 다시 말해 결혼이라는 전략적 동맹을 맺는 데에는 그녀 역시 우호적이지만, 결론적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뜻이었다.
내년에 다시 생각해 보자고?
그건 그가 전혀 고려해 본 적 없는 사안이었다.
평생 곁에 묶어 둘 요량으로 결혼을 말한 것인데, 레네트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공녀의 마음은요? 글쎄요. 공녀께선 낯선 성에 와 단지 익숙한 사람이 전하뿐이라 의지하는 정도? 고마워하는 심리?’
불현듯 알키오가 이죽대며 말하던 모습이 불쾌함을 선사하며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완전히 무시하고 싶지만 그의 말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기에, 그 사실이 몹시 킬리언을 거슬리게 만든 것이다.
“…….”
킬리언은 아직 조명이 환히 켜진 레네트의 방을 올려다보며 본성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어떻게 계산을 하든지 결혼이라는 전제하에 두 사람이 놓이게 된다면, 서로에게 훨씬 더 이득이 될 만한 관계가 형성되는 게 사실이었다.
레네트 역시 충분히 알고 있을 테고.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내년에 다시 생각해 보자는 말을 하는 거지?
“설마…….”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가?
동시에 가슴이 뻐근해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긴, 그 해맑은 얼굴로 못하는 말이 없는 데다가 도통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예상할 수가 없는 레네트였다.
어쩌면 그녀는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혼하자는 말도 그녀만큼이나 예쁜 목소리로 말하면서 말이다.
‘전하, 우리 이혼해요! 네?’
그녀가 네? 라고 말미에 한 번 더 강조해 그를 채근할 때면, 그런 적은 없지만 그게 설령 나쁜 부탁이나 제안일지라도 뭐든지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나 할까.
헤실헤실 웃으며 이혼해 달라 조르는 그녀가 머릿속에 그려지자 대번에 그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헛소리……!
그가 빠르게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레네트를 다른 곳에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군다나 애초에 기간에 제한을 둬야 한다면 결혼이라는 수를 꺼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레네트가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지?
다른 사람을 만나 보고 싶어서?
하나 그녀가 다른 누구를 마음에 품을 만큼의 여유나 시간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
상념에 잠겨 눈살을 찌푸리던 킬리언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저한테 쪼오금 관심이 생겨서? 아님 저를 아주 살짝 좋아하게 돼서?’
가끔 레네트가 했던 질문들과 비슷한 말을 어제도 들었다.
그게 몇 번이나 꺼내 볼 만큼 그녀에겐 그런 게 정말 중요한 거였나.
“…….”
단 한 번도 무게를 두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감정이 레네트에겐 어쩌면 결혼이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어 기분이 묘해졌다.
레네트에겐 그게 왜 중요하지?
그것은 지나치게 무방비하고 아무런 대책조차 세울 수 없는, 너무도 안일하고 사소한 것일 뿐이었다.
물끄러미 레네트의 침실을 바라보는 킬리언의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그의 기준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생각을 가볍게 치부해 넘기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부터 그와 무관한 감정이라 여겼고, 품어선 안 될 쓸데없는 것이라 믿어 온 탓인지 그로선 역시 납득을 하기 쉽지는 않지만.
“……재고라니.”
그 조건을 떠올리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킬리언의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방 조명이 꺼질 때까지 오랫동안 지켜보다 이윽고 성의 전경을 바라봤다.
레네트에게 그게 중요한 것이라면.
이미 그에게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이라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그걸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좀 더 면밀히 알아봐야겠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애초 레네트가 딴생각은 할 수도 없게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결혼을 축하드려요!”
침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귀부인들의 목소리가 폭죽처럼 허공에 울려 퍼졌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들을 바라보다 하젤을 돌아봤다.
“제 말이 맞죠? 두 분이 혼인했다는 소문이 온 성에 파다하게 퍼져 있다니까요?”
하젤이 나에게 작게 속삭이며 큰 눈으로 부인들을 힐긋 가리켰다.
아까 옷을 갈아입는 동안 하젤이 언질을 주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빨리 소문이 퍼질 수 있는 거야?
아직 해가 채 다 뜨지 않은 새벽이나 다름없는 아침인데?
복도엔 온갖 실크의 향연이 벌어진 듯,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방긋 웃으며 그림 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저편의 킬리언의 상황은 여기보다 더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 앞을 서성이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귀족들이 시종이 전하께서 나오실 거라며 문을 열자마자 저마다 축하의 인사를 건네느라 복도가 떠들썩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부터 사흘간 여기 층에 대한 귀족들의 출입을 허가하셨어요. 귀족들이 황태자가 결혼을 선언하면 감축을 드리기 위해 곳곳에서 찾아와야 하니 혼인이 공표되면 으레 이런 시간을 허락해 주시거든요. 다만 이번 경우는 공표보다 먼저 소문이 나 특이한 일이 되었지만 말이에요.”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저 멀리 보이는 집무실 앞 복도를 바라보는데, 하젤이 내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데 이게 이 정도로 큰일이에요? 그냥 지나가면서 축하할 줄 알았는데.”
“공녀님. 한 제국의 황태자께서 결혼을 하신다는 건 단지 아내를 맞이한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온 제국민들에게 위페르의 주인이 곧 바뀔 거라는 걸 시사하는 셈인 거죠.”
“네에?”
나는 나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리며 하젤을 쳐다봤다.
내 놀란 목소리에 무슨 일이냐며 묻는 귀부인들을 향해 어설프게 손을 저어 보인 후 나는 쾅쾅 뛰는 가슴을 꾸욱 눌렀다.
“혼인이라는 건 모든 인간이 한층 더 성장하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는 행사잖아요. 황태자 전하께 해당하는 성장이라는 게 무엇이겠어요. 그건 황좌에 오르는 것이죠.”
하젤의 설명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돌프가 우릴 이 아침부터 호출하는 이유가 단지 소문을 들어서 황당한 마음만이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제 아돌프 황제께서 아들에게 황위를 넘겨주는 수순을 밟으셔야 할 거예요.”
과연 아돌프가 그렇게 해 줄까?
그 순간 킬리언이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잘 잤어?”
아돌프의 집무실로 내려가는 계단이며 복도마다 우리를 기다린 것인지 사람들이 줄을 이어 서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킬리언의 팔짱을 낀 채 입가를 한껏 끌어 올린 인형처럼 화답하며 어색한 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뭐랄까. 분명 그에게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각오를 한 일이었지만 이건 너무 급작스럽게, 갑자기 코앞에 확 들이닥친 기분이었다.
하젤이 보통의 수순과는 다르겠지만 가문에서 반대할 수 없는 혼인을 하더라도, 양 가문에 모두 찾아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확인을 받아야 하고, 인정받은 바가 확인되면 공표가 이뤄질 것이며, 이후에 축하하는 인사가 연일 들려올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가문의 수장을 만나거나 공표를 하기도 전에 소문부터 나 있는 것이다.
“하하, 다들 어떻게 아신 걸까요, 전하?”
감당하기 어려운 축하 세례를 받으며 나는 킬리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현기증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금 이상하지 않으세요?”
“어떤 게?”
“그 잠깐 사이에 이렇게나 퍼져 있다는 게 말이에요.”
모르는 이가 하나도 없는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무도회에서부터 염원하고 있었다며 환희에 가득 차 인사를 건네는가 하면, 어떤 상상에 빠진 건지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인지 몰랐다고 은근한 눈으로 나를 보는 귀부인도 있었다.
아파트에 지내고 있는 귀족들이 많은 탓에 가는 성안은 길목마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편하게 걸어갈 수도 없었다.
궁전에 지내는 황족과 귀족은 물론이거니와 시종부터 정원사, 청소부, 반려동물 하나까지도 우리가 혼인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 넓은 궁전에 소문이 그렇게나 빨리 돈다고?
어젯밤에 서고에 간 것이니 정말 고작 몇 시간 사이였을 텐데?
우리가 결혼한 걸 아는 이는 간밤에 본 사서들뿐이었고, 그들이 그렇게 널리 퍼뜨렸다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킬리언이 내게 가만히 상체를 숙였다.
그의 깔끔한 체향이 내 머리 위에 청량하게 쏟아지고 귓가에 따뜻한 숨결이 맞닿았다.
“입이 가벼운 나의 친우가 부단히 노력한 결과로 보이는군.”
“입이 가벼운 친……우라고요?”
친우인데, 입이 가볍다고?
장난스레 귓가에 속삭인 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기울인 몸을 세우자 나는 저절로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분이 누구신데요?”
“알키오 더웬티.”
킬리언과 가장 가까워 보이던 그 사람?!
“허어, 그분 맞죠? 갈색 머리에 인상이 서글서글하신 분!”
“……머리 색깔까지 기억하는 건가?”
킬리언이 언뜻 비딱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내려다봤다.
“그분 입 되게 무거운 분처럼 보였는데.”
“왜 그렇게 봤던 걸까.”
“의리도 있어 보였는데.”
“꽤 긍정적으로 본 모양이군.”
“당연하잖아요. 전하와 가까운 분이니까. 전하와 친해 보여서 저도 기억하고 있단 말이에요.”
“…….”
내 대답을 들은 킬리언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한쪽 눈썹이 살짝 휘어 올라갔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꿰뚫어 보는 사람처럼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거였군.”
입가에 걸린 미소가 희미하게 꿈틀대는 것 같았지만, 그는 금세 평소의 태연자약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왜 킬리언은 이런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태연해 보이는 것 같지?
“전하께서는 아무렇지 않으세요?”
“어떤 점이?”
“이렇게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거요. 피르미타로 먼저 혼인이 성립되더라도 전하의 위치가 있다 보니 어른들께 알리고, 절차를 밟는 과정이 다 지나고 나서 공표할 거라 알았는데,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막 세상이 달라져 버렸잖아요.”
“……그래서. 싫어?”
그가 살짝 우아한 시선을 내게 내리며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싫을 것까지야 없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이렇게 돼서 놀랍다는 거죠…….”
그와 대화하다 보니 마구 의문을 가질 만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나는 차츰 말미를 흐렸다.
하기야,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겠지만.
뭐랄까, 대비할 겨를도 없이 꽉 막힌 함정에 갇힌 기분이랄까.
몇 주에 걸쳐 서서히 적응하며 풀어갈 줄 알았던 과제가, 갑자기 코앞에 들이닥쳐 빠져나갈 구멍이나 대처할 방법이 없어진 것만 같았다.
나는 왜인지 소문의 근원이 알키오라는 사실과, 킬리언의 태연한 태도가 의심스러워 자꾸만 의문이 커졌다.
“전하. 저는 전하께서 지금 이 상황을 다 의도하시고 알키오란 분에게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맞아요?”
내가 대답을 재촉하듯 그의 소매를 흔들자 킬리언이 헛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놓았다.
“내가 왜 그랬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가 내게 되물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아침 햇살에 반사된 그의 광휘로운 검은 머리칼과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했지만 그의 알 수 없는 눈빛이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어차피 공표하면 겪게 될 일이었어, 레네트. 내가 보기엔 그보다 다른 걸 걱정해야 할 시기인 것 같은데.”
“다른…… 걱정이요? 어, 가령 황제 폐하가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걱정?”
“아니, 그건 그대가 할 게 아니고. 잘 봐.”
킬리언이 내 허리를 감싸며 주변에 늘어선 귀족들을 슬쩍 눈짓한 후 나를 응시했다.
“이제부터 귀부인들이 그대에게 티타임이나 산책, 토론이라는 명목하에 자꾸만 그대를 초대하려고 들 거야.”
“네……?”
“뭐, 어쩌면 작은 토끼, 새 사냥도 하자고 할지도 모르지.”
“어……. 토끼요?”
내가 고양이였을 때 그 비슷한 크기였을 텐데?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그대에 대해 더 집중적으로 물어볼 테고.”
“아하…….”
“물론 그대가 그걸 원하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원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킬리언이 내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짝 잡아당겼다.
“그러니 레네트.”
“네, 전하.”
“앞으로 나와 있는 편이 훨씬 편할 거라 생각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때. 그대도 동의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