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317)
317
“저는 이게 정말로 필요한 일인가 싶습니다.”
“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그러나, 리벤트로프?”
이 말만 벌써 몇 번째인지 원. 뒷머리가 땡겨오는 것이 스멀스멀 느껴졌지만 일단 설명이나 듣자 싶어 말해보라고 손짓했다.
“중국은 티베트를 자국에 종속시키고자 하는데 우리가 티베트를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면 중국에서 내심 불쾌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 얘기였군.
하기야 리벤트로프 말대로 티베트 지배를 계획 중인 장제스가 독일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예?”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중국이 독일의 우방이기는 하나, 그 관계에서 우리가 중국보다 우위에 있네. 우리가 겨우 티베트 문제를 두고 중국의 눈치를 살필 이유가 있나?”
내가 아는 21세기라면 정확히 반대가 되었겠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지금은 1945년이고, 땅덩어리는 중국이 더 넓지만, 국력 자체로는 독일이 중국보다 몇 배는 더 크다.
중국이 독일의 눈치를 볼지언정, 독일이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다.
독일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승인한 게 불만이어도, 뭐 어떻게 할 건데? 중국이 뭐라고 하든 간에 쌩 까버리면 그만인데. 그리고, 장제스에게 생각이 있으면 ‘겨우’ 티베트 때문에 독일에 안 좋은 소리를 할까?
장제스는 중화주의자이긴 하나 티베트 문제로 독일과 척을 질 정도로 멍청한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아쉬운 건 어디까지나 장제스지 내가 아니기 때문에 속으로 불만이 좀 쌓일지라도 겉으론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일본과 전쟁이 끝나고 공산당도 진작에 박멸되었다고 한들 독일과 관계가 틀어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20년이나 30년이 지나서 중국 시장이 커지면 독일도 중국에 물건을 팔아먹기 위해 눈치를 슬슬 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중국이 독일의 눈치를 더 봤으면 더 봤지 이 관계가 뒤집힐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최소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총통 각하의 말씀이 맞소.”
이의를 제기한 리벤트로프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힘러도 이때다 싶어 참전을 선언했다.
“생각해보시오. 만약 우리가 티베트의 요청을 거절했는데, 독일과 경쟁 관계에 있는 미국이 티베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독일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소? 그리고 이를 본 세계 각국이 뭐라고 생각하겠소? 틀림없이 독일보다 미국에 더 붙으려고 하겠지. 총통 각하,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무엇보다도 티베트인들에게는 아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소. 비록 생긴 것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넓게 보면 티베트인들도 우리 독일인들과 같은 조상을 가진 먼 형제란 말이오. 아리아 민족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하거늘, 아리아인의 피가 흐르는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이를 외면해서야 되겠소?”
….역시 그것 때문에 화난 거였냐.
***
독일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자 독일의 영향권 아래에 놓인 유럽 국가들과 중동,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일제히 티베트를 승인했다.
그러자 미국도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승인했다. 미국을 따르는 국가들이 티베트를 승인한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더해 미국은 티베트에 막대한 양의 원조까지 약속했다.
독일과 미국을 두고 고민 중인 국가들에 보여주기 위해서겠지.
봐라. 우리 미국은 저 독일 놈들보다 통이 더 크다! 우리에게 붙으면 독일에 붙은 것보다 더 막대한 이득을 누릴 수 있다!
독일과 미국 두 초강대국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승인했으니 이제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가 되어 지도에서 사라질 가능성은 원천 차단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의외로 중국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속으론 열불이 나도 중국의 국력이 그에 받쳐주질 못하니 가만히 있기로 결심한 것이리라.
그사이 해가 넘겨 1946년이 되었다.
인도에서의 내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하지만,
역시 쪽수 앞에는 장사 없다고 하던가.
힌두교도들은 무슬림들보다 압도적인 숫자를 내세워 내전에서의 우위를 점했다.
사실 내전이 시작될 때부터, 힌두교도들의 선전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내전 시작 때부터 힌두교도들이 밀린 적이 없었다.
인도와 인접한 이슬람 국가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은 중립을 고수했지만, 그래도 내심 같은 이슬람 형제들의 선전을 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이 인도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때문에 나는 이란과 아프간에 ‘살짝’ 압력을 가했다. 인도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일절 간섭하지 말라고.
이를 어기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눈치 빠른 둘은 철석같이 알아듣고, 인도에서 들려오는 무슬림 형제들의 헬프에도 눈과 귀를 닫고 모른 척을 했다.
그래도 국경을 넘어 망명해오는 무슬림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것 정도는 눈감아줬다. 인도에 남아있으면 힌두교도들에게 깡그리 학살당할 테니.
내전이 길어지면서 힌두교들도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가진 것도 없는데 내전까지 겹치니 삶은 지하로 추락했고 수만 명이 기아로 굶어 죽었다.
1946년을 넘겨 1947년으로 접어들자, 힌두교도들도 무슬림들도 슬슬 타협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네루와 보스의 피나는 노력도 컸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인도인들 모두가 종교를 가릴 것 없이 내전에 진저리를 내서였다.
독립을 쟁취했음에도 영국 식민지 시절보다 삶의 질은 추락했고 매일같이 이어지는 전투와 테러에 인도인들은 지쳐갔다.
지칠 대로 지친 인도인들은 평화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향한 증오는 식지 않았지만, 그러한 증오조차 잊게 할 정도로 인도인들은 내전에 진저리를 쳤다.
마침 우리가 나서서 협상을 종용한 것도 컸다. 나는 괴벨스로 하여금 인도에서 내전이 계속될 경우 영국이 다시 인도에 개입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하며 인도인들의 불안심을 자극했다.
다시 영국 식민지 시절로 돌아갈래? 정말로?
암만 무슬림/힌두교가 미워도 식민지 시절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리고 언제까지 그렇게 치고받으면서 평생 살래?
일단 내전부터 멈추고 보자는 전국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자 힌두교와 이슬람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두 종교는 마침내 공통된 타협안에 도달했다.
분리독립을 포기한 무슬림들에게 힌두교도들은 막대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국가 중대 사항에는 무슬림들의 의견도 반영할 것을 힌두교 지도자들은 약속했고, 이슬람 지도자들도 분리독립하자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인도 내전은 자그마치 600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서야 겨우 끝이 났다.
공교롭게도 인도 내전이 종결된 날은 1947년 8월 15일. 실제 역사에서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이다.
인도 연방 공화국의 총리는 네루, 대통령은 보스였지만 내각은 무슬림과 시크교들이 힌두교도들보다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본격적인 협상이 타결되었음에도 인도 곳곳에선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과격파들이 테러를 벌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또한 서서히 줄어들었다.
참 오래도 걸렸네, 진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과정에 비해 결말만큼은 괜찮게 나왔다고 볼 수 있었다.
인도 내전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나는 중동 국가들과 잇달아 회담을 가졌다.
먼저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한 이집트부터.
신생 이집트 공화국의 대통령 무함마드 나기브는 어학에 관심이 많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히브리어를 할 줄 알아 통역 없이 회담할 수 있었다.
나기브는 이집트의 현대화를 위해 독일의 지원을 부탁했고, 그 대가로 이집트 영토에 있는 수에즈 운하를 독일과 이집트가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나기브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집트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경제적인 지원 자체는 많이 못 해주지만, 군대를 훈련시키고 장교들의 위탁 교육을 받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영국이 손을 뗀 트란스요르단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으로 각각 분리독립했다.
두 국가 모두 독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충성의, 대가로 소정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라크도 마찬가지.
레바논과 시리아는 여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로 남아있지만, 해당 지역에도 독립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페탱은 알제리, 모로코 등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독립만 하지 않으면 막대한 자치권을 주겠다며 레바논과 시리아를 달래야 했다.
처음에 페탱의 유화책에 불만을 가졌던 프랑스인들이었지만, 쿠데타 미수사건으로 군부 내 초강경파와 공산당 세력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으면서 페탱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러나 블롬베르크가 보내온 보고서에는 페탱은 자신의 권력이 강력해진 것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자신의 권력이 강해진 것과 별개로 쿠데타 미수 건으로 독일의 감시가 전보다 더 강화되어서 그런 것이리라.
유럽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이탈리아에서 반파시즘, 반(反)국왕 세력이 늘어나고 있어 왕실과 파시스트당이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라곤 하나, 그건 이탈리아의 일이지 독일의 일이 아니기에 내 알 바 아니다.
무솔리니에 대한 가택 연금은 풀렸지만, 여전히 무솔리니는 자택에서 칩거하며 외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산책하는 게 전부랄까.
국왕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이탈리아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군림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참으로 초라한 모습이 아닐 수 없지만, 실제 역사에서 어떤 꼴이 되었는지 생각하면 오히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으리라.
비록 권력을 잃고 뒷방 늙은이로 전락했다지만 주유소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조롱당하는 신세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나.
애초에 전쟁에 일절 관심 끄고 실제 역사의 프랑코처럼 대응했다면 지금도 권좌에 앉아 이탈리아를 호령했을 테지만.
유럽과 중동의 일이 모두 정리되었으니 나는 그동안 생각만 해왔던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슬슬 아시아에 갔다 올까 하네.”
“아시아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중국? 인도?”
“여러 군데를 돌아보고 올 생각이네. 일일이 독일에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한 번에 쭉 둘러보고 올 거야.”
괴링, 괴벨스, 토트, 슈페어는 독일에 남겼다. 이 친구들은 독일에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특히 괴링은 차기 총통으로 예정된 만큼 지금부터 미리미리 예습에 들어가야 했고.
아시아 순방이 단순한 해외여행이 아닌 엄연한 외교활동이었으므로 리벤트로프는 필요했다.
건강 문제로 직위에서 물러난 브라우히치와 라이헤나우도 그간의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아시아 순방에 포함했다.
브라우히치와 라이헤나우의 직위는 만슈타인과 보크에게 승계되었다.
구데리안은 차기 주력전차를 개발하느라 바쁜 데다 수술 일정도 잡혀 있어서 이번 순방에 함께 할 수 없었다.
대신에 최근 할 일이 없어서 놀고 있던 롬멜을 데려가기로 했다.
“총통 각하, 저도 이번 아시아 순방에 따라가겠습니다.”
“힘러, 왜 그러나? 자네는 독일에서 할 일이 많은데.”
아시아 순방을 며칠 앞두고 힘러가 찾아와 대뜸 자기도 아시아 순방에 끼겠다고 밝혔다.
라이벌인 리벤트로프가 순방에 따라가는 것을 질투해서 그런 건가? 그런데 괴링, 괴벨스도 독일에 남는데?
내가 영문을 몰라 하자 힘러는 자신이 이번 순방에 함께 하고 싶은 이유를 밝혔다.
“아시아 순방에 티베트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네만.”
“아리아인의 기원지일지도 모르는 티베트에 가는데 아리안 역사에 빠삭한 제가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이때가 아니면 언제 총통 각하와 함께 티베트에 가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게 이유였구나.
하여간 컨셉 하나는 확실한 놈이라니까. 징글징글한 녀석.
그래. 전쟁도 끝났고, 역사와 다르게 뻘짓도 안 했으니 데려가지 뭐.
하우서도 힘러가 맡을 일을 자신이 대신 맡는 것에 별생각이 없는 모양이고, 오컬트 덕후인 헤스가 하는 뻘소리를 대신 들어줄 사람도 필요했으니.
***
히틀러가 아시아 일대를 순방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은 긴장했다.
순방을 가장해 독일이 극동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드는 것이 아닐까? 워싱턴 회담에서 히틀러는 극동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히틀러가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킬지 확신이 없던 미국은 히틀러의 방문에 대비해 아시아 일대에서 기강 잡기에 들어갔다.
그와 별개로 히틀러의 방문 소식에 아시아 각국은 일제히 흥분 상태에 돌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히틀러가 온다는데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히틀러가 아시아 순방에 나선다고 하던데.”
“알 바야?”
“어이, 윌 씨. 신경 끄고 일이나 해.”
그러거나 말거나 바깥세상 일에 관심 끄고, 제 할 일에 집중하는 이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패튼.
“아직입니까?”
“아직입니다.”
“오늘도요?”
“오늘도입니다.”
영국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패튼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에 파묻히며 살았다.
영국에서 맛보았던 패배를 잊기 위해 그는 어느 때보다도 일에 열중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맥네어에게 전화를 걸어 전차 개발 현황에 대해 전해 들었다.
매일같이 걸려오는 패튼의 질문을 가장한 독촉에도 맥네어는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드디어! 드디어!”
그리고 마침내 패튼이 그토록 원했던 신형 전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M26 퍼싱에서 차체 장갑을 150mm, 포탑을 190mm로 강화하여 판터 II 이상의 방어력을 확보했다.
그로 인해 50t으로 늘어난 중량을 지탱하기 위해 신형 700마력 컨티넨탈 AV-1790 엔진을 장착했다.
신형 전차의 정식 명칭은 M46으로 정해졌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제리들을 뛰어넘는 전차가 생겼군!”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신형 전차가 나오자, 패튼의 눈에선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전차가 1943년에도 있었더라면……!
M46 외에도 미합중국 병기국은 독일 중전차들과 1:1 대결이 가능한 괴물들을 만들어냈다.
차체 정면 150mm, 포탑 정면 300mm, 측면 200mm에 T53 120mm 전차포를 탑재한 M29 중전차와 M1 240mm 곡사포를 탑재한 M92 자주포까지.
“그런데 중량이 너무 많이 나가는 거 아닙니까?”
“제리들의 전차들과 싸워 이기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셔먼만으론 제리들과 맞상대도 힘들다는 것이 진작에 밝혀지지 않았나.”
전차가 무거워도 너무 무거운 게 아니냐는 지적들이 나왔지만, 독일제 중전차들에 크게 데였던 과거가 모든 우려를 종식시켰다.
수송능력에만 치중한 결과가 전차병들의 희생으로 직결되지 않았는가.
그 누구보다 전차의 기동성을 중시했던 패튼 역시, 기동성을 다소 포기하더라도 적 전차의 직사로부터 완전한 방호를 보장하는 중장갑, 고화력의 전차들이 전장을 지배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