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52)
흑기사 데일
* * *
마법이라는 힘은 신비롭기 그지없지만, 그 나름의 규칙은 존재하다.
우선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주문 구결을 입으로 읊조려야 한다.
영창이라 불리는 이 작업을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하는지는, 마법사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다.
하지만 눈앞의 어린 마법사는 그 과정을 생략해버렸다.
‘이게 말이 되나?’
더 놀라운 건 엘레나가 부린 마법의 종류다.
보통 마법사는 하나의 계열만을 다룬다.
번개면 번개. 불이면 불.
죽을 때까지 한 우물만 파도 그 끝에 다다를 수 없는 게 바로 마법이라는 학문의 심오함이다.
데일도 마법사 캐릭터를 키워봤기에 잘 안다.
마법 하나를 배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이미 어린 나이에 두 가지 계열의 마법을 수준급으로 다뤘다.
단순히 뛰어난 재능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선을 넘었다.
핏줄에 내려오는 힘일까?
지금껏 데일이 마주친 존재 중, 이런 게 가능한 이들은 하나뿐이었다.
악마.
‘괜히 마탑에서 잡아가려고 안달인 게 아니었군.’
악마에 비견될 재능이라니.
엉덩이 무거운 마탑에서 직접 빈민가를 뒤엎는 것도 이해가 갔다.
마법은 오래 유지되지 못 했다.
공중을 날아다니던 수룡은 어느 순간 형체를 잃더니, 바닥에 떨어져 물웅덩이가 되었다.
아직 어린 엘레나는 마법적 재능에 비해 마력이 부족한 듯했다.
엘레나는 조금 기대하는 표정으로 데일에게 물었다.
“어, 어떤가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유하는 물’에 ‘전격 부여’ 주문을 응용한 건가? 훌륭한 솜씨다.”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마법인지 바로 알아보다니……. 마법에 조예가 있으신가요?”
“조금은.”
“놀랍네요. 기사들은 마법에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당장 프라우 경은 마법을 보여줘도 별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눈에 띄니 마법을 자제하라는 말만 하고요.”
지금도 프라우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엘프는 강자를 동경하지만, 그 강함은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능력에 관한 것뿐이다.
그들에게 마법은 비겁한 편법에 불과하다.
프라우가 단호히 말했다.
“공주님. 지금도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괜히 시선을 끌 테니 마법은 자제해주십시오.”
엘레나는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평소의 프라우는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는 걸 엄격하게 금지하는 모양이었다.
데일은 엘레나가 마법을 부리며 즐거워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주위의 시선 탓에 자기 재능을 제대로 갈고닦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엘레나를 보며, 데일의 안에서 일전에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마법사.’
탐이 난다.
한스 같은 얼간이 마법사보다도 훨씬 탐이 났다.
이대로 엘레나가 마법을 갈고 닦아 본인의 재능을 완전히 개화한다면.
그렇다면 악마라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데일은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니.’
엘레나는 아직 어리다.
전쟁 마법사로서 훈련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
뛰어난 마법사가 모두 뛰어난 전쟁 마법사가 되는 건 아니다.
훗날이면 몰라도, 지금 당장 큰 도움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만약 그럴 기회가 생기면, 빚을 지어두어서 손해 볼 일은 없겠군.’
간단한 대화를 마친 데일과 프라우는 방을 나섰다.
프라우는 방 앞을 지키고 선 용병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이곳은 내가 지킬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나게.”
용병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게…….”
“저희도 가란드 님께 명령받은 거라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내가 지키겠다고 하지 않나. 칼 맞고 싶지 않다면,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말게.”
말을 참 이쁘게 하는 엘프를 보며 두 용병은 얼굴을 찡그렸다.
마침 그때 아이렉이 계단을 올라왔다.
그는 계단을 오르며 대화를 들었는지, 프라우에게 핀잔을 주었다.
“지금 공주님은 가란드가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네. 용병들이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그리고 경의 몸 꼬라지를 보게. 그 몸으로 무얼 할 수 있겠나. 검이나 제대로 들 수 있겠나?”
프라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몸 곳곳에 붕대를 칭칭 감은 데다, 팔이 부러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시무룩해진 프라우는 더 떼쓰지 않았다.
“알았네…….”
데일은 아이렉에게 물었다.
“재판 준비는 잘 되고 있소?”
“순조롭네. 최대한 이곳저곳에 소문을 내서 재판에 대한 주목도를 올리고 있네. 벌써 재판의 결과로 내기를 거는 자들도 있을 정도지.”
아이렉은 적극적으로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이유는 하나. 바로 마탑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평소였다면 그냥 마탑의 힘으로 평의원들을 압박해, 유죄 판결을 받아냈을 거다.
야만적인 구석이 있는 이 세계의 법체계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엘레나의 고귀한 신분. 게다가 이번 사건은 화제성이 너무 크다.
여러 사람이 주목하는 상황에서는 대놓고 그리할 수가 없었다.
그럴듯한 증거도 없이 왕족에게 유죄를 선고하면, 평의원들의 평판이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판결을 내려야 했다.
이쪽이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
그래서인지 아이렉은 제법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사실상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어. 지켜봐 주게. 그 주문쟁이 놈들의 콧대를 눌러줄 테니.”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날까?
데일은 자신만만한 아이렉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행운을 비오.”
* * *
일을 마친 데일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 안은 고요했다.
카일라는 일이 있는지 어딘가로 사라졌고, 하켄은 진작에 곯아떨어졌다.
1층의 넓은 홀에는 데일 혼자 앉았다. 익숙한 고독함이 찾아왔다.
데일은 멍하니 화로에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엘레나.’
엘레나의 재능은 분명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마법은 너무 뛰어난 나머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게임에서나 볼 일을 직접 마주친 느낌이라 해야 할까? 이미 이런 세상에, 이런 몸뚱이로 떨어진 순간부터 이 무슨 새삼스러운 생각이냐는 느낌도 들지만…….
그리고 그 신선한 충격은 데일의 안쪽에 가라앉아 있던 한 가지 주제를 되살아나게 했다.
이 세상은 대체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
처음 데일이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데일은 본인이 꿈이라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이 몸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새하얀 눈을 만졌을 때의 싸늘함도. 저 멀리에 떠 있는 태양이 전해주는 포근함도. 통증도. 간지럼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기분.
그저 보고, 들을 수만 있는 육체.
그런 육체를 가진다는 건 마치 게임하는 기분과도 비슷했다.
사람은 모니터 너머로 캐릭터가 움직이는 걸 보고,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캐릭터가 어떤 감각을 느끼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 않나.
게다가 이 세계의 배경은 게임과 똑같다. 구분할 수 없다.
그렇기에 데일이 처음 이 세상에서 맞서야 했던 건 지독한 비현실감이었다.
모든 건 허상에 불과하며 자기는 질 나쁜 악몽을 꾸고 있을 뿐이라는 의심.
한때는 스스로의 생을 끊으려고 했던 적도 있다.
그렇게 하면 이 꿈에서 깨어나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 직후에 있던 하이엘프들과의 유쾌하지 못한 만남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계에 대한 현실감을 선사해주었지만…….
기껏 다잡은 불안정한 현실감이 오늘 엘레나의 마법을 보면서 또다시 흔들린다.
“…….”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꿈을 꾸는지 확인하려고, 으레 자기 뺨을 때리던가?
데일은 멍하니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건틀릿. 데일은 그 건틀릿을 화로 안에 집어넣었다.
치이이이이.
화로의 불이 건틀릿을 핥았다.
여전히 고통은 없다.
이럴수록 비현실감만 커진다는 걸, 데일은 알았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데일 경. 혹시 손이 시리십니까? 이거 장갑이라도 하나 선물해드려야겠군요.”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가란드가 여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그는 익살스러운 얼굴로 화로에 들어간 건틀렛을 가리켰다.
그제야 데일은 화로에서 손을 뺐다.
‘문 여는 걸 알아채지도 못하다니.’
어지간히도 집중했던 것 같다.
데일은 가란드에게 물었다.
“직접 찾아오다니. 꽤 중요한 일인가 보오.”
“내일 있을 재판에 대한 얘기입니다.”
잠시 멈칫한 데일이 말했다.
“말해보시오.”
“사실, 아이렉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일 재판은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습니다.”
데일은 그게 무슨 소리냐 물었다.
가란드는 한참을 설명했다.
그 모든 설명을 다 들은 데일은 조용히 화로를 바라보았다.
가란드도 데일이 충분히 생각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데일이 툭 물었다.
“가란드. 이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것이오. 그대는 내가 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하지 않았소.”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글쎄요. 뭐라 해야 할까…….”
잠시 말을 고른 가란드가 입을 열었다.
“제 윗사람들이 데일 경을 시험해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중간관리직이니 뭐.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
“데일 경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경의 자유입니다.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을 하시길.”
그 말을 남긴 가란드는 여관을 나서려 했다.
데일은 그런 가란드의 등에 대고 물었다.
“그 윗사람이 누구요.”
가란드는 흘끗 뒤를 본 뒤, 대답 없이 미소만 짓고 사라졌다.
* * *
망국의 공주를 심판하는 재판이 열렸다.
그 화제성 탓에 재판장에는 방청객이 가득 찼다.
데일도 그중 하나로서 조용히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일곱 평의원이 모두 들어서고, 마탑의 마법사들과 엘레나, 변호를 맡은 아이렉이 각자의 자리에 섰다.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지루한 공방이 오갔다.
마법사들은 빈민가에 있었던 네크로맨서나, 악어 떼를 푼 미치광이 여인.
그 밖에 도시에 행해진 위협행위를 열거했으며, 거기에 엘레나가 엮여 있다고 주장했다.
아이렉은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며, 앞선 사건들과 엘레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변호했다.
이 비슷한 공방이 몇 차례나 오고갔다.
흐름 자체는 순조로웠다.
마법사들은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계속해서 엘레나에게 갖다 대려 했지만, 아이렉이 훌륭히 방어해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이 컸다.
방청객들이 소곤거렸다.
“이대로라면 공주 쪽이 이기겠는데.”
“아무리 마탑이라도, 이번 재판을 억지로 이겼다가는 뒷말이 나올 거야.”
사람들은 엘레나가 이길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미 이 재판의 결과를 아는 데일은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방청객 중에 유독 몸이 다부지고, 얼굴이 잘생긴 사내가 있었다.
사내도 시선을 느낀 걸까?
뒤를 돌아본 사내와 데일의 눈이 마주쳤다.
“…….”
순간,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단지 눈빛만 보아도 많은 걸 알 수 있는 법.
데일은 사내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저놈인가.’
그 역시 무언갈 느낀 것인지. 데일을 향해 씨익 웃은 사내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데일도 다시 시선을 옮겼다.
여러 차례의 공방 이후. 평의원들이 긴 시간을 상의하며 판결을 고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었다.
결과가 나올 시간이다.
첫 번째 순서는 대장장이 길드장이었다.
“음. 뭐, 그럴듯한 증거도 없는데 무죄로 해야 하지 않나?”
방청객이 한차례 웅성거렸다.
예상대로의 결과에 ‘그럼 그렇지’ 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다음 순서는 조피스 가주였다.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충분히 의심할만한 상황이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특히, 얼마 전 도시를 습격한 여인이 사용하던 유물 지팡이가 조금 의심스럽지 않나 싶은데요. 마법으로 유명한 바이만 왕국과 무언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피스 가주는 궁색한 이유를 들며 조심스레 유죄를 선언했다.
그럴 수밖에.
남작위이자, 상위 구역의 귀족들과도 연이 있는 그는 카달과 더불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평의원이다.
타국의 왕족.
그것도 빈민가에서 자기만의 세력을 꾸리는(정확히는 아이렉의 세력이지만) 이는 좋게 보기 힘들었다.
계속해서 평의원들의 판결이 내려졌다.
무죄. 유죄. 무죄. 유죄.
판결이 나올 때마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렸다.
아이렉의 표정도 썩어들어갔다.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다.
아이렉은 이를 뿌득 갈았다.
‘젠장. 마탑 이 새끼들이 기어코……!’
그리고 마지막 순서가 왔다.
마지막은 가란드다. 그의 말 한마디에, 이번 재판의 향방이 결정된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란드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가란드는 그 시선을 음미하듯, 말을 끌며 뜸을 들였다.
“저는…….”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는 너무 어려운 문제군요. 기권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이제까지보다 더 큰 소란이 일었다.
“뭐?”
“뭐라고?”
“잠깐.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유죄 셋. 무죄 셋. 기권하나.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어제, 가란드가 귀띔해준 그대로의 전개다.
그리고 그 순간에 맞춰, 마탑의 마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재판으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군요. 유감입니다.”
전혀 유감인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몇 번인가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지혜롭게 대처하셨지요.”
아이렉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말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한발 빨랐다.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이 판단하지 못 하는 일은 신께 판단을 맡길 뿐. 저희는 결투 재판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경! 나오시오!”
그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던 잘생긴 금발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온몸을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는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뿌려댔다.
그 얼굴을 본 방청객인지 바람잡이인지 모를 이가 중얼거렸다.
“크, 크리스틴 경이다!”
“크리스틴?”
“황실 기사단의 입단을 앞둔 기사라고!”
황실 기사단. 황제를 따르는 가장 강력한 기사들의 집단.
그곳에 입단이 예정되어있다는 건, 저 사내가 그만큼 괴물 같은 작자라는 걸 의미한다.
이 갑작스러운 흐름에 방청객들이 흥분했다.
결투. 그것도 이름 있는 기사의 결투다.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류의 그런 사건.
아이렉은 당황했다. 마탑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처,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이번 재판에서 그들이 마탑을 상대로 맞설 수 있었던 건, 바로 재판의 화제성 덕분이었다.
많은 이가 지켜보니 마탑도 허투루 행동할 수 없는 거다.
그래서 마탑은 화제를 화제로 덮는 수를 사용했다.
결투가 선언된 순간, 재판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결투로 쏠릴 것이기 때문.
명예로운 결투를 통해 판가름을 낸다면, 마탑이 치사하고 더러운 짓을 했다는 사실도 많이 희석될 것이다.
‘좋지 않군.’
상황이 좋지 않다.
여기서 결투를 거부했다가는 그건 그것대로 시민들의 빈축을 살 것이다.
왕족이라는 자가 명예로운 결투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 터.
그러면 끝장이다. 다시 재판을 벌여도 패배할 것이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상대가 준비한 건 무려 황실 기사단을 앞둔 기사다. 저런 괴물을 상대할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내가! 내가 나가겠다!”
“겨, 경. 진정하세요.”
프라우가 아이렉의 부하들에게 사로잡혀 버둥거렸다. 부상을 심하게 입은 그는 지금 크리스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니. 만전의 상태라 해도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죽음이다.’
여기서 누가 나서든,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 마법사들의 함정은 치명적이었다.
그 안에 고스란히 걸려든 순간, 승산은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이렉에게 조피스 가주가 물었다.
“피고 측은 결투 재판을 받아들일 건가요? 만약 결투를 받아들인다면 대전사를 내세워도 좋습니다. 그럴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이렉은 입을 다물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었다.
마치 축제라도 벌어지는 듯한 분위기. 데일은 그런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심하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겁에 질린 엘레나의 모습이다.
표정은 억지로 다잡고 있지만, 손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지금 저 자리에 있는 건 고귀한 왕족도 아니고, 마법의 천재도 아니다.
그저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일 뿐.
그 반대편에 선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침내 성공했다는 듯, 환희하고 있다.
마치 원하는 장난감을 얻게 된 소년처럼 순수한 미소다.
방청객들은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것에 단순히 즐거워한다.
결투로 인한 엘레나의 처우 같은 건 전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평의원들은 마탑의 압력에 굴복한 지금의 상황이 민망해, 괜스레 헛기침만 했다.
조부의 말이 옳았다. 세상에는 개자식들이 너무 많다.
‘눈 뜨고 못 봐주겠군.’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덩치의 흑기사는 어디서나 눈에 띈다. 순식간에 시선이 데일에게 몰렸다.
재판장 내에 거짓말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
데일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일전의 상념을 다시 떠올렸다.
데일을 괴롭히는 지독한 비현실감. 현실과 게임. 꿈과 가짜. 불안정한 자아. 흐릿한 경계.
모든 게 불안정하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았다 뜨면, 이 꿈에서 깨어날 것만 같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가 없다.
하지만 데일은 찾아냈다.
그 혼돈 속에서도 확고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한 가지를 찾아냈다.
‘나.’
데일은 사람이다. 사람이고 싶다.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
모든 게 불분명해도, 그 의지만큼은 선명하다.
그렇기에 데일은 스스로가 사람임을 계속해 증명해나갈 생각이다.
이건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이 멋대로 보내는 시선과 기대는 데일에게 중요치 않다.
적의를 보이는 시민들이나 우상으로 숭배하는 밤의 신도들. 도와주길 원하는 아이렉이나 가만히 있길 바라는 가란드.
모두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할 뿐이다.
데일의 행동에 그런 것들은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밤의 신도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진 지금.
데일의 결정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데일은 다시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상관없다. 데일은 가죽 주머니를 뒤져, 깃털 펜을 하나 꺼냈다.
그 싸구려 깃털 펜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래. 어쩌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을 수도 있겠군.’
그러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이미 한번 마주했다.
꿈 많던 노움 부부의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데일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정적을 끊어내며,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차갑고 무덤덤한 목소리가 재판장을 울렸다.
“내가 나가겠다.”
“뭐…….”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마법사 중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데일에게 외쳤다.
“네가 뭔데!”
데일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답했다.
“흑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