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espised Granddaughter of the Powerful Martial Arts Family RAW novel - Chapter (275)
275화
툭, 투둑, 툭.
덧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음들이 한겹 막이 쌓인 듯 멀게 느껴졌다.
야율의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똑같이 볕 아래에서 수련해도 야율은 도통 타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창백한 뺨이 내 손등에 기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일까?
나를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에 우월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이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맞아. 그랬지. 그 약속 나도 기억해.”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차라리 잘됐다. 언젠가는 한번 꺼내야 할 이야기였다.
“10년도 더 전에, 네가 천산염제의 제자도 아니었을 때.”
······.”
“우리 미래가 이렇게 될 줄 몰랐을 때.”
“······.”
“그때와 지금은 달라.”
이미 그때의 약속은 의미 없어졌다.
“나는 이미 널 지켜 주지 못했으니까.”
야율이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네가 한 모든 일이 다 날 위해 한 일이랬지?”
야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거듭 알리듯 말했다.
“정말이야.”
“그래서 문제야. 네가 벌인 일이 모두 다 내 책임이니까.”
“······.”
“몰랐다는 게 면죄부가 될 수 없어. 네가 내 옆에 있을 거라면.”
내가 야율을 지켜 주겠다고 말한 것에는 야율이 벌인 행동을 모두 책임지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함께 하고 싶다면 그 모든 행동을 책임져야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내가 지켜 주겠다고, 책임지겠다고 했던 아이는 이제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네가 벌인 일을······.”
나는 숨을 살짝 들이마시고 마저 내뱉었다.
“······책임질 생각이 없어.”
그리고 야율은 눈치 빠른 아이니 내가 한 말에 담긴 거절을 알아들었으리라.
검붉은 눈동자가 갈대처럼 흔들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조이듯 아팠다. 이런 대답을 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네가 나를 위해서 벌였다는 일들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너를 위해서지.”
야율이 쥐고 있던 내 손을 꽉 쥐었다.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꽉 붙들린 손에 시선을 두었다.
“갑자기가 아니야. 진작 말했어야 했어······.”
“그럼 화났어? 미안해. 내가 네게 말하지 않고 멋대로 굴어서 그래? 내가 네게 계획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아서?”
야율이 잠시 말을 멈추고 인상을 찡그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게 네 어머니에 대해서, 천마지보에 대해서 미리 알려 줬다고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거야. 네가 우승하지 못했더라도 천마지보를······.”
나는 야율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설명할 필요 없어. 그것 때문이 아니야.”
“하지만 비무 대회의 일 때문에 이러는 거 맞잖아.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왜······!”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율이 내게 이렇게 감정을 내보이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아니면 내가 널······ 죽여서 그래? 아직도 그걸 신경쓰고 있었어?”
나는 살짝 인상을 쓰고 야율을 보았다.
“‘아직도’ 라니. 그 말은 네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
야율이 내 목을 날리던 순간을 어떻게 잊을까.
“하지만 그것때문도 아니야.”
모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기 마련이다. 더는 목이 잘리는 꿈을 꾸지 않고, 지금 야율과 이렇게 손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날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지었던 야율의 표정.
하지만 그의 행동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의도를 모를때에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답이 나오는 법이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든 따라오는 남궁류청의 시선.
야율도 똑같았다.
어린 시절 내 뒤를 따라다니던 새카만 눈빛. 이제는 정말 묻어야 할 때였다.
“어릴쩍 약속에 매여 있지 말고, 너도 이제 그만 네 삶을 살아.”
나는 야율이 잡고 있던 손을 뺐다.
꽉 붙잡고 있던 것과 달리 쉽게 빠진다 싶었을 때 야율이 다시 붙잡아 왔다.
“싫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을 천천히 생각해 봐.”
“싫어.”
“야······ 왜 그래?”
야율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
뭔가 이상했다. 워낙 피부가 창백해 눈치채지 못했지만, 야율의 안색이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감정 때문에 격해진 게 아닐까 싶던 진기의 흐름이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마치 주인의 몸을 터트릴 것처럼 역류하는······.
쿨럭.
다급히 고개를 비튼 야율이 갑자기 피를 토했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야율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내가 네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내 팔을 부서질 듯이 부여잡고 있던 야율의 손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야······!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
* * *
무림맹 본단.
사람들이 본단 입구에 나란히 펼쳐진 막사 앞으로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지나 본단 입구로 비슷한 차림새와 비슷한 기도를 지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서고 나오길 반복했다.
비무 대회가 끝났으니 사람이 줄어들었을 만도 하건만 비무 대회를 준비할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도 있었다.
가라앉은 거리의 분위기. 그리고 여유없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러했다.
본단 안쪽에서 나온 이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포권했다.
“월성문 분들이시군요.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따라 들어오시면 됩니다.”
본단 안은 골조만 앙상하게 남도록 새카맣게 불탄 건물들이 아직도 매캐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수습하려는 시도도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한쪽에서는 무림맹 무사로 보이는 이가 다급히 소리쳤다.
“본맹 내에서는 함부로 검을 뽑아 드시면 안 됩니다!”
불탄 건물들, 지원을 온 백도 문파들과 돈 되는 싸움이라면 흑백 관련없이 끼어드는 낭인들.
“정신이 하나도 없군.”
“이런 오합지졸들로 과연 얼마나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발목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요. 마교 또한 재물로 흑도들을 모으고 있다 하니 우리도······.”
10여 년 전 무림맹을 습격한 이후로 정마 대전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오히려 마교는 그대로 다시 은거에 들어갔다.
그 뒤로 소규모 국지전같은 전투는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마교 본대와 충돌한 것이 아니라 마교의 지원을 받은 흑도, 혹은 기회를 봐서 세력을 넓히려던 사파들과의 충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 정마 대전이었다.
본단 총사부 회의실의 공손 총사가 말했다.
“백리연이 마교의 천라지망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후우. 그건 다행이구려.”
“천라지망을 혼자의 힘으로 빠져나가다니. 대체 어떻게······.”
안도와 의문이 뒤섞인 회의실의 대화를 들으며 공손방은 제갈화무와의 일을 떠올렸다.
천마지보를 탈취당하고 한바탕있었던 혼란을 간신히 수습한 후, 태고 진인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제갈 세가의 전각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혼란이 벌어진 비무장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었다.
비무장을 습격한 인원과 비교할만한 인원이 제갈 세가의 전각을 습격한 모습이었다. 전각을 불에 태워 버리려다 실패한 자국도 있었다.
-이건 대체······? –
푸학!
유일하게 살아 있던 흑의인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제갈화무는 내의에 간신히 장포만 걸친 차림새였다.
-제갈 세가주,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
그와 태고 진인을 바라본 제갈화무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살아 있는 게 누군가에게 무척 거슬리는 모양입니다. –
-역시 마교 놈들입니까? –
-아마도.-
제갈화무가 검을 대충 포석 위로 집어 던졌다. 집어 던진 검부터 얇은 옷자락까지 모두 피에 젖어 있었다.
-그게 아니면 저 같은 걸 누가 죽이려 들겠습니까? 내버려 둬도 얼마 남지 않았거늘.-
공손방은 다소 안도했다.
처음 천마지보를 이용하지고 말을 꺼낸 것은 제갈 세가주였다. 그리고 제갈 세가주는 백리연과 연이 깊었다.
당연히 배신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마교가 혼란을 틈 타 죽이려는 모습을 보아 마교와 손을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어느 정도 불식할 수 있었다.
물론 해명은 필요했다.
태고 진인이 말했다.
-자네는 알고 있었지? 천마지보가 이렇게 될 줄.-
-예. 그러게 제가 말씀드릴 때 미리 주셨다면, 이리 소란이 커질 일 없지 않았습니까?-
– ······. –
-지금 이 상황이 태고 진인의 탓이란 말이오? 자네가 제대로 우리에게 알렸더라면······! –
제갈화무가 나른하게 말했다.
-설득하기까진 피곤한지라. –
공손방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기가 막히는군. 자네는 진실을 숨긴 것에 대해 백리 소저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는가?-
제갈화무는 재미있는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피투성이인 채로 웃는 모습은 광인과도 닮아 있었다.
제갈화무가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누가 보면 총사가 연이편이라도 들어 준 것 같습니다? 태고 진인이 연이를 공격하시는 걸 구경만 하실 땐 언제고.-
-······.-
-변죽은 그만 울리고 본론으로 가죠.-
제갈 세가주의 노복이 어디선가 의자를 가지고 왔다.
제갈 세가주가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늘진 눈가는 병색이 깊었다. 적어도 그의 병은 진짜였다.
-천마지보에 담긴 천마의 무공과 의념도 중요하지만······ 가지고 있어 봤자 애물단지일 뿐이죠. 어차피 그걸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아, 물론 태고 진인은 달랐던가? 뭐, 어쨌든 지금껏 천마지보를 없애려고 여러 방법을 시도해보지 않았습니까? 실패했지만.-
공손방은 순간 흠칫 떨었다.
-설마 자네······ 천마의 혈육이 천마지보를 흡수하여 없앨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었단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