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약속
“… 형이 홍수찬 쌤을 어떻게 알아요?”
우영이의 입장에서야 당황스러운 게 당연했다.
댓글을 보기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내가 평화고 출신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우스운 질문이었다.
‘무려 3년을 함께했던 선생님이니까.’
학창 시절만큼은 윤우나 성현이만큼이나 가깝게 지냈던 선생님이었다.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홍수찬 선생님을 모르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연두튜브 댓글에서 봤어.”
“.. 뭘요?”
“우영이 너 평화고 다니지?”
“네. 그런데 그게 왜…”
“나 평화고 졸업생이거든. 홍수찬 선생님 제자고.”
구구절절 길게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우영이는 똑똑한 녀석이니까.
이렇게만 얘기해도 상황 파악은 가능할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영이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와!!”
깜짝이야. 귀청이 떨어질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우영이가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이윽고 녀석은 놀랍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거짓말이 아니었어?”
내 말을 이해하긴 한 거 같은데.
도통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녀석을 향해 되물었다.
“뭐가?”
“제가 얘기했던 거 있잖아요. 홍수찬 선생님이 틈만 나면 저보다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고 얘기한다는 거.”
분명히 우영이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랬지.”
“저는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예고도 아니고 일반고에 저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하, 그래. 저번에 그렇게 말했었잖아.”
“근데 형이라면 이해가 가요.”
“.. 뭐?”
“형이 평화고에 다녔다면 이해가 간다고요. 형도 홍수찬 쌤 제자인 거잖아요.”
“…”
이제야 우영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홍수찬 선생님이 말했던 뛰어난 제자가 나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아니, 말하는 어조를 보면 생각이 아니라 확신을 하고 있다.
‘.. 진짜인가?’
전혀 생각 못 하고 있었는데 우영이 말을 듣고 나니 헷갈리기 시작했다.
홍수찬 선생님이 말한 그 제자가 진짜 나인지.
확실히 학창 시절의 나만 놓고 보면, 객관적으로 뛰어난 축에 속하는 학생이었던 건 사실이다.
각종 미술 공모전에서 수상했고, 학교 강당에 올라가서 상을 탄 적도 여러 번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졸업한 후로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수많은 미대 지망생들이 평화고에 입학하고 졸업했을 테고.
그 많은 학생 중에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이 없었을까?
내가 6년을 통틀어 그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나?
‘우영이만 봐도 이렇게 잘 그리는데.’
솔직히 우영이와 달리 나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영이는 혼자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크크, 홍수찬 쌤 허언증 있으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설마 주원이 형이 그 제자였을 줄이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지금까지 본 우영이의 모습 중에 가장 텐션이 높은 거 같았다.
나는 실소를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홍수찬 쌤이 말한 그 제자가 나라고.”
“당연하죠. 형이랑 저는 상위 0.01퍼의 재능을 갖고 있는데. 형 말고 다른 제자일 리가 없잖아요.”
“…”
더 얘기해 봐야 우영이의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거 같았다.
우영이의 말이 100% 틀렸다고도 볼 수 없는 일이고.
선생님에게 물어봐야 정확히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마침 우영이가 말을 이었다.
“같이 가서 물어보면 되겠네요. 쌤한테.”
“그래. 가능한 한 빨리 찾아뵐 생각이야.”
“형 그럼 졸업 이후로 한 번도 선생님 보러 간 적 없는 거예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꼭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이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그러니 이제라도 제자 노릇을 할 생각인 거고.
어쨌거나 우영이의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맞아.”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제가 홍수찬 쌤 있는 날 미리 연락할게요. 방학 끝나는 대로.”
“.. 방학? 아, 맞다!”
바보같이 깜빡하고 있었다. 지금이 여름방학 시즌이라는 걸.
내가 당황한 걸 눈치챘는지 우영이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요새 방학 엄청 짧아져서 여름방학 곧 끝나거든요.”
“그렇구나. 다행이네.”
“네. 혹시 형 오기 전에 수찬 쌤 봐도 티 안 낼게요.”
“그건 왜?”
“깜짝 방문같은 느낌인 거죠. 6년 만에 애제자와 선생의 재회. 재밌겠다, 흐흐.”
역시 이런 걸 보면 애는 애였다. 뭐, 딱히 상관은 없겠지.
예고를 하고 가든 깜짝 방문이든 의도가 중요한 거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연락 부탁할게.”
이렇게 홍수찬 선생님 깜짝 방문 계획이 세워졌다.
***
최근 들어, 나는 상당히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와 영상 편집을 제외하면 딱히 할 일은 없었으니까.
사실 이것만으로도 그렇게 여유롭다고 하기는 힘든 일정이긴 했다.
원래 아르바이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잉여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그런데.’
학습지 작화에 몰두하느라 바빴던 시기에 익숙해진 탓인지, 비교적 매우 여유롭게 느껴졌다.
그 덕에 연두와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같이 산책을 한다든지, 외식을 한다든지, 놀이터에 간다든지.
하지만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행동반경이 너무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어느덧 8월 중순이고.’
시기상으로는 늦여름에 가까웠다.
문제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여름휴가를 간 적이 없다는 거고.
어디를 가야 할지도 헷갈렸지만, 작화 때문에 시간을 내지 못한 것도 있었다.
나 혼자였다면 그냥 별생각 없이 넘겼을 거다.
딱히 지금껏 여름이라고 휴가를 신경 쓴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허나 이번에는 달랐다.
연두와 함께하는 올해는 이대로 여름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곧 8월이 지나가고 가을이 올 테니, 지금이 휴가를 갈 마지막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쑥쑥 한글완성 2단계!’의 작화에 돌입하게 되면 다시 전처럼 바쁜 일상이 시작될 텐데.
소중한 지금 시기를 그냥 보내는 건 너무 아쉬웠다.
‘어디로 가는 게 좋으려나.’
여름을 즐길 수 있는 장소는 상당히 많았다. 시원한 장소를 생각하면 편하겠지.
편의점 사장님은 외국을 추천했지만, 당장 해외로 갈 여유는 없었다.
국내만 해도 자동차가 없어서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는 느낌이고.
‘굳이 따지면 면허가 없는 게 먼저지만.’
어쨌든 가능한 한 빠르게 최선의 피서지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한편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연두는 옆에서 생긋 웃음 짓고 있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이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나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 연두야?”
“네에!”
“하하, 왜 좋은데?”
“언니 오빠들 만나러 가눈 거 조아여..”
연두의 말대로였다. 나는 지금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대상은 다름 아닌 고딩 녀석들이었다.
매일같이 연두가 보고 싶다며 단톡방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녀석들.
약속을 지키는 게 늦긴 했지만, 드디어 오늘 만나기로 한 참이었다.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고.’
의도치 않게 미뤄진 만큼,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채택한 장소가 이호연 셰프가 운영하는 ‘라원’이었다.
전에 외할머니께 점심을 대접했던 레스토랑.
그때는 런치 코스였지만, 오늘은 디너 코스를 먹어볼 생각이었다.
‘넷은 만나서 같이 오기로 했지.’
어느새 거의 목적지에 도착한 상태였다.
나는 연두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기억나, 연두야?”
“모가여..?”
“오늘 보기로 한 언니 오빠들 이름.”
“네, 기억나여! 주여니 언니, 범재 오빠, 동거니 오빠, 구리고…”
이 셋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범재를 제외하면 꽤 오랜만의 재회긴 했지만, 편의점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있으니까.
그러니 연두의 기억에도 쉽게 잊히지 않을 터였다.
관건은 나머지 한 명이었다. 연두를 본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 보고 싶어 하는 여자애.
실제로 단톡방 채팅의 지분도 그 애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채팅 내용은 거의 연두에 관한 이야기였고.
오늘 약속을 잡은 이유도 그래서였다. 더 미루면 주체가 안 될 거 같았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연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리미 언니..!”
역시 이름을 외우는 것만큼은 암기신동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은 연두였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예림이의 이름까지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예림이 언니가 좋아하겠다. 연두가 이름 알아서.”
“헤헤.. 예리미 언니 궁그매요..”
“이제 보면 되지.”
어느새 레스토랑 건물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나는 연두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
라원에 들어서자 저번에 봤던 종업원이 나와 연두를 반겼다.
당연히 종업원은 우리를 한눈에 알아봤다.
이어서 그녀가 불러온 이호연 셰프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연두를 바라보는 꿀 떨어지는 눈빛과 서글서글한 미소는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그나마 차이점을 꼽자면.’
저번과 같은 투머치토커의 면모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스피드로 연두를 귀여워하다가 순식간에 주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저녁 시간이라 저번과는 달리 손님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잽싼 스피드를 보니 역시 프로는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두도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아.. 요리사님 엄청 빠루다…”
“크크.”
가끔 연두는 이런 뜬금없는 포인트에서 놀라곤 했다.
옆에서 바라보던 직원도 쿡쿡 웃음을 지었다.
그러던 와중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기 봐, 연두야.”
“어디여..?”
“저기.”
내가 가리킨 곳은 레스토랑의 벽면이었다.
벽면에는 사진이 잔뜩 붙어있었다.
유명 연예인을 포함한 셀럽들과 이호연 셰프가 함께 찍은 사진.
‘재미있는 건.’
저 사이에 연두와 함께 찍은 사진도 붙어있다는 점이었다.
저번에 왔을 때 이호연 셰프의 부탁으로 내가 찍어준 사진.
다시 보니 상당히 잘 찍은 사진이었다.
이호연 셰프 특유의 미소와 연두의 상큼한 미소가 어우러져 훈훈함을 자아냈다.
옆에서 종업원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엄청 많이 물어보세요.”
“.. 네?”
“사진 붙은 이후로, 레스토랑 찾으시는 손님분들이 엄청 많이 물어보세요. 저 예쁜 여자아이는 누구냐고.”
“하하, 그런가요?”
“네. 아역배우냐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워낙 연두가 예쁘니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이름을 알 만한 유명 연예인들 틈에서 연두의 사진이 붙어있는 거니까.
무엇보다도 한 번 눈에 들어오면 시선을 돌리기 힘든 외모이기도 하고.
막상 당사자인 연두는 종업원의 말에 굉장히 수줍어하고 있었다.
‘워낙 얼굴이 하얘서인지.’
조금만 수줍어해도 바로 티가 났다.
지금은 꼭 색칠한 것처럼 얼굴이 붉게 물든 상태였다.
연두를 위해서라도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을 듯했다.
종업원의 말이 끝나고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로 가면 될까요?”
“아,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앞장서는 그녀를 따라 걸어갔다.
라원은 두 번째이기도 하고, 팬미팅을 통해 레스토랑을 경험해서인지 이제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도 잘 몰라서 엄청 허둥지둥했는데.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빈 테이블을 보니 아직 녀석들은 오지 않은 거 같았다.
뭐, 어차피 식사할 메뉴는 정해져 있으니 상관없었다.
가격이 세긴 했지만, 이정도는 예상 범위 내였다.
나는 능숙하게 주문을 완료했다.
‘어떠려나.’
디너 코스는 어떤 느낌일지 기대가 됐다.
메뉴와 네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연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자연스레 아까 생각하던 휴가 얘기가 나왔다.
“연두야.”
“네에.”
“연두는 아빠랑 가고 싶은 곳 있어?”
“가고 시픈 곳..?”
“응.”
내 말에 연두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기왕이면 휴가를 가더라도 연두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따라서 말이 나온 김에 연두의 의견을 들을 생각이었다.
이윽고 연두의 입가에 가늘게 미소가 번졌다. 아무래도 가고 싶은 장소를 떠올린 거 같았다.
어떤 장소이길래 말하기 전부터 웃음이 번지는 걸까.
궁금해진 나는 들려올 연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노리..”
“응?”
“연두 물노리 가고 시퍼요…”
재차 들으니까 알 수 있었다. 물놀이를 말하는 거라는 걸.
아무래도 연두는 물놀이를 장소라 생각하는 거 같다.
나는 장난스레 연두를 향해 말했다.
“물노리는 어떻게 가야 하는데, 연두야?”
“모르게써요.. 그런데 유나가 물노리 갔는데 엄청 재미썼대여..!”
“하하, 그래?”
“네. 물이 엄청 마는데 엄청 시워나고 재밌다고 해써요!”
아마 유나가 수영장에 간 걸 물놀이를 갔다고 표현한 모양이다.
수영장에 가본 적 없는 연두는 대충 느낌으로만 유나가 말한 장소를 상상하는 거 같고.
시원하고 재밌다는 얘기에 가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어떤 장소인지도 모르면서.’
그게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여웠다.
확실히 수영장은 여름에 비교적 간단하게 갈 수 있는 피서지였다.
연두가 바라는 장소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연두야. 물놀이는 수영장에서 하는 건데……”
나는 연두에게 수영장이 어떤 공간인지 설명해줬다.
설명을 들을수록 연두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머릿속에 내가 이야기하는 수영장이라는 공간을 그리며 설명을 듣는 거 같았다.
신이 난 나는 한참 동안 내가 아는 수영장의 모습을 설명해줬다.
“……그런 곳이야, 연두야.”
“진짜…”
“응?”
“진짜 가고 시퍼요…!”
아까보다 간절해진 연두의 눈빛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내 설명이 상당히 괜찮았다는 걸. 요즘 들어 설명하는 실력이 는 거 같단 말이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가야지.”
갈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설명도 안 했다.
이번 여름의 피서지는 수영장으로 낙점이었다.
연두의 환한 웃음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연두야!!!”
타이밍 한 번 완벽하네.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지는 세 글자가 귀에 들어왔다.
연두바라기 4인방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