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59)
559화. 글쎄요
자신감은 충분했다.
달리기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하는 편도 아니었으니까.
굳이 따지면 잘하는 쪽에 속한다.
학창 시절에는 계주의 자리를 위협한 적도 있고.
‘뭐, 겁만 준 정도지만.’
결국 계주는 못 했다는 소리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핵심은 연두가 지켜보고 있는 이 자리에서 어느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지니까.
함께 뛰게 될 아버님들을 보고 확신했다.
‘.. 질 수가 없어.’
딱히 겉모습을 보고 무시하거나 한 게 아니다.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순발력이 필요한 분야에 있어서 젊다는 건 커다란 무기라 볼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아버님들은 그다지 승부욕도 없어 보였다.
“허허, 거참.”
“언제 마지막으로 달려봤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걱정이네요.”
“살살 해 주세요, 연두 아버님.”
대화에서 느껴지지 않는가.
이길 생각보다는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대화다.
허나 나는 달랐다.
‘항상 그랬어.’
학창 시절의 나는 우영이 못지않게 승부욕이 강했다.
굳이 나서서 경쟁을 즐기지는 않지만, 막상 뛰어들고 나면 반드시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렸지.
학교에 와서일까.
다시 그 젊은 날의 이주원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피가 끓었다.
“.. 후.”
긴장을 놓지는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잘 달리는 아버님이 있을 수 있으니.
자세를 잡고 대기하며 좌우를 바라봤다.
‘.. 뭐지?’
표정이 변해있었다.
서글서글하게 웃던 아버님들의 표정이 돌변한 상태다.
눈빛은 마치 매를 연상케 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 그 속에서 휘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탓!
동시에 지면을 딛고 있던 내 발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완벽한 스타트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정확히는 현실감이 없었다.
‘.. 왜 내 앞에 이렇게 발이 많은 거지?’
말 그대로였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의 발이 앞에서 달리고 있다.
내가 선두가 아니라는 거다.
‘왜 이렇게 빠른 건데!’
과거가 떠오른다.
연두와 지혜씨와 한강에 갔을 때, 2인승 자전거를 헥헥거리며 탔다는 이유로 하체에 대해 의심을 받았던 기억.
다시 말하지만 그건 하체보다는 자전거에 대한 숙련도 문제였다.
이번에는 무슨 변명을 하려고 밑밥을 까냐고?
아니, 변명이 아니다.
‘말이 안 돼.’
나는 느리지 않았다.
현재의 나는 가능한 수준에서 최상의 퍼포먼스를 내고 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빠르다는 게 문제였다.
‘한 명이면 이해라도 하지.’
납득이 안 간다.
그 상황 속에서 정신을 차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였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달리는 수밖에.
파바밧!
자세가 흐트러지든 말든 상관없이 나는 발을 앞으로 뻗었다.
금방 결승선에 도달했다.
이건 마라톤이 아닌 단거리 달리기였으니까.
“헉.. 헉..”
몰랐다.
이토록 치열한 싸움이 될 줄은.
정신없이 달려서 몇 등인지도 감이 오지 않는다.
눈앞에 드리우는 그림자.
스윽.
고개를 드니 보이는 건 연두였다.
“… 아빠!”
예상과는 달리 환하게 웃고 있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서 그게 표정에 묻어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잠깐만. 설마 나 1등 한 건가?
‘마지막 스퍼트가 반전을..?’
크게 차이가 벌어진 건 아니다.
마지막에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렸으니 역전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내 실낱같은 희망은 곧바로 사라졌다.
콕.
연두가 손등 위에 찍어준 도장.
그곳에는 적혀있었다.
4라는 숫자가.
***
망연자실한 채로 손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유, 다들 잘 달리시네요.”
“아버님이야말로 보통이 아니시던데요? 따라붙어 보려 했는데 얼마나 날쌔신지. 역부족이더라고요, 역부족. 하하!”
“이거 참, 3등은 명함도 못 내밀겠군요.”
흘러나오는 실소.
그런 와중 한 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특유의 서글서글한 얼굴로 말을 걸어온다.
“근데 이게 다 연두 아버님이 살살해 주신 덕이죠.”
“…”
치욕스럽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느껴져서 더더욱 그랬다.
하기야 앞에서 달리셨으니 뒤에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며 달리는 내 표정을 볼 수 없었겠지.
원래 뒤에는 시선을 주지 않는 법이니까.
“아닙니다. 저 최선을 다해 달렸습니다.”
“에이, 겸손하시긴..”
“정말입니다.”
“그렇게 말 안 하셔도 다 압니다. 덕분에 우리 하연이가 찍어주는……”
제발 믿어주세요.
차라리 ‘젊은 친구가 이렇게 느리면 어떡해.’ 같은 반응이면 그나마 더 나을 거 같다.
오히려 이런 반응이 내게는 내상이 더 컸다.
그나저나 하연이 아버님이셨구나.
‘지금 보니까 되게 탄탄하시네.’
아까는 얼굴밖에 못 봤는데 정면에 서니 전체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큰 체구와 벌어진 어깨.
특히나 반바지를 입으셨는데 하체가 장난이 아니다.
옆에는 아빠가 좋은 등수를 받아서 기쁜 건지, 하연이가 꼭 붙어서 웃고 있다.
‘.. 그래. 이럼 된 거지.’
합리화하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었다.
아빠의 선전에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하연이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졌으니까.
그와 별개로 외치고 싶긴 했다.
‘대체 정체가 뭐냐고.’
생각이 달라진 건 없다.
세 분 모두 나이가 40은 넘어 보이는데 말도 안 되게 빠르다.
이게 아버지의 힘인가?
아니지. 그렇게 치면 나도 아버지잖아.
“저기, 그런데……”
궁금한 건 못 참는 편이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잘 달리세요?”
차례대로 답하는 아버님들.
그에 따라 나는 충격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글쎄요. 조기축구회 회장을 오래 한 게 좀 영향이 있었으려나요.”
“.. 조기축구회 회장이요?”
“네.”
“얼마나 하셨는데요?”
“축구는 어렸을 때부터 했고, 조기축구는 취직하고 나서부터 쭉 했지요.”
“…”
뭐야, 그게!
조기축구는 반칙이지!
자연히 다음 순번은 하연이의 아버님에게로 넘어갔다.
“글쎄요..”
또 글쎄요로 시작한다.
이번에는 옆에서 하연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 아빠는 군인이에요…”
“군인?”
“네.”
그렇다.
하연이 아버님은 직업군인이란다.
그래서인지 거주하는 아파트도 군인아파트라는 모양이고.
속으로 나는 울부짖었다.
‘.. 이게 뭐냐고!’
역시 반칙이다.
조기축구회 회장과 오랜 생활 군에 몸담은 직업군인을 무슨 수로 이기란 말인가.
나는 어쩌다 이런 조에 배정된 거지.
“우아.. 군인아저씨…”
연두도 감탄사를 내뱉는다. 감탄의 이유가 나와 다른 거 같기는 하지만.
이제 마지막이었다.
대망의 1등을 차지한, 처음에 약한 소리를 하셨던 힘을 숨긴 아버님.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지.
‘언제 마지막으로 달려봤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걱정이네요.’
거짓말이다.
사람의 말을 거짓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도무지 그런 말을 뱉은 사람이 보일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조기축구회 회장과 직업군인, 그리고 주사인 볼트를 제칠 정도라니.
…… 그건 괴물이잖아!
“글쎄요..”
노이로제가 걸릴 거 같다.
또 글쎄요다.
이건 뭐 세계관 최강자들의 입버릇이라도 되는 건가.
“육상을 좀 했던 것 때문일까요.”
뭐? 유욱상?
장난이 아니라 이건 진짜로 반칙이잖아!
연관이 된 것도 아니고 그냥 단거리 달리기 그 자체가 육상이니까.
“워낙 오래돼서 가물가물하긴 한데 고등학교 때까지 육상을 했거든요. 부상을 당해서 그만두긴 했지만. 그 후로는 딱히 달려본 기억이 없는데 아직 몸에 남아있었나 보네요. 이거 참, 허허.”
“…”
심지어 거짓말은 안 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달려봤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걱정이네요.’
진실이다.
육상을 했다는 걸 얘기하지 않았을 뿐.
서로를 보며 멋쩍게 웃는 괴물, 아니 아버님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생각했다.
‘장하다, 내 다리.’
4등을 차지한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
“헤헤..”
내 손을 보며 배시시 웃는 연두를 향해 물었다.
“괜찮아, 연두야?”
“.. 으응?”
“기대했을 텐데. 아빠 4등밖에 못했는데 괜찮아?”
그 말에 연두는 내 손 옆으로 자그마한 손을 내밀어 겹쳤다.
그렇게 겹친 두 손등.
“좋았는데……”
“응?”
“연두도 4등이고 아빠도 4등이니까.. 연두는 좋았어요. 그리고 아빠, 엄청 열심히 달려서 멋있었으니까……”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등수가 같다는 걸.
두 손등에는 나란히 숫자 4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아까 도장을 찍어주면서 그렇게 환하게 웃었던 거구나.
재차 연두가 입을 연다.
“아빠는 싫어요..?”
생각해보니 실수였다.
‘4등밖에’라는 표현은 연두가 노력을 통해 이룬 결실도 격하시키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래. 순위는 의미가 없었다.
“아니.”
자랑스럽게 손등을 펼치며 말했다.
“아빠도 좋아. 연두랑 같은 4등이라서. 연두가 열심히 노력해서 받은 4등이잖아.”
“진짜여..?”
“그럼. 내년에는 꼭 아빠랑 1등 받자. 이제부터는 아빠도 연두랑 같이 연습할 거니까.”
“히히, 좋아요!”
다행이다.
이렇게 등수와 관계없이 순수하게 기뻐해 주는 딸이 있어서.
마침 다가온 세연씨가 말했다.
“그래요. 앞에 있는 분들이랑 별로 차이도 안 났는걸요.”
“그랬나요?”
“네.”
“혹시 아까 대화로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저 진짜 최선을 다해서 달린 거예요.”
“흐흣, 알아요. 그래 보였어요.”
그렇구나.
하기야 지켜봤다면 모를 수가 없었겠지.
우영이도 한마디 보탠다.
“실망하지 마요, 형. 그림으로는 이기잖아요.”
“… 고맙다.”
전혀 위로가 안 된다.
기승전 미술인 건 여전하구나.
그래도 방금 연두와의 대화로 인해, 1등을 하지 못한 데서 오는 실망감은 깨끗이 사라진 거 같다.
‘1등을 했어도 기뻐해줬겠지만.’
느끼지 못했을 거다.
손등을 맞대고 배시시 웃던 연두의 표정에서 드러난 애틋한 감정은.
오히려 다행이다.
나란히 4등을 해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게.
‘내년에는.. 1이 적힌 손등을 맞댈 수 있었으면 좋겠네.’
아니, 그렇게 만들 거다.
그런 다짐 속에서 귓가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자, 다음은 어머님들 차례입니다! 모두 앞으로 나와주세요!”
“.. 헉!”
세연씨가 외마디 소리를 내뱉는다.
“나 진짜 못 달리는데.”
“괜찮아요. 그래 봐야 4등밖에 더하겠어요.”
손등을 보이며 능청스레 말했다.
근거는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세연씨 역시 상대적으로 젊은 축에 속했다.
아까 그 근거가 부실함을 몸소 증명하긴 했지만.
설마 세연씨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지는 않을 거 아냐.
내 말에 자신감을 얻은 듯 그녀는 말했다.
“그, 그렇겠죠? 그럼 엄마 다녀올게, 시은아!”
“응, 잘 다녀와.”
바로 시작된 달리기.
시은이는 도장을 들고 결승선에 섰다.
카메라로 세연씨의 모습을 담던 나는 실소를 내뱉었다.
“하하..”
확실히 나와는 달랐다.
괴물 아버님들과 접전을 펼친 나와 달리 세연씨는 순수하게 느렸다.
엄청 열심히 달리는 게 느껴지는데도.
그렇게 도달한 결승선.
“허억.. 헉…”
혼이 나간 표정.
설마 스스로도 이렇게 느릴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다.
시은이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도장을 찍어줬다.
쿡.
손등에 새겨진 숫자는 5였다.
나는 후회했다.
‘그래 봐야 4등밖에 더하겠어요.’
그 말 하지 말걸.
엄마의 달리기 실력을 알고 있었는지 시은이는 기대조차 안 한 표정이다.
그저 쿨하게 한 마디를 건넨다.
“잘했어, 엄마.”
그러자 세연씨는 울상이 된 채로 입을 뗐다.
“.. 시은아.”
“응.”
“미안해. 엄마가 부끄럽지?”
“아니.”
시은이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엄마는 느려도 괜찮아. 내가 빠르니까.”
“시은아……”
감동 받은 표정.
역시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쉽게 삐지거나 토라지지만, 풀리는 건 그보다 쉽다.
나도 슬쩍 말을 보탰다.
“앞으로는 세연씨도 같이 해야겠네요.”
“.. 네?”
“달리기 연습이요.”
“저, 저도요?”
“네. 저도 하기로 했는데 세연씨만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반칙이죠. 내년에는 시은이랑 나란히 1등 하면 좋잖아요. 시은이도 그렇지?”
흠칫 몸을 떤 시은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종지부를 찍은 건 연두였다.
“그럼 내년에는… 우리 다 1등이에요..!”
“하하, 그렇지.”
뒤늦게 세연씨가 주먹을 불끈 쥐고 반응했다.
“.. 좋았어!”
“응?”
“내년에는 우리 다 1등 하는 거야! 준비됐죠, 주원씨? 연두랑 시은이도 준비됐지?”
“물론이죠.”
“네!”
그렇게 맺어졌다.
내년 운동회를 목표로 한 1등 동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