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109)
043. 아시아를 지참금으로 가져옴(2)
3.
충격에서 벗어나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바그라티온이었다.
“벌써 말이오? 아직 폐하께서는 정정하시거늘.”
그 말에 쿠투조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알고 있잖은가. 폐하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안식과 평온이라는 걸. 게다가 그분의 숙원을 이뤄줄 후계자가 온전히 자리를 잡았으니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겠지.”
“으음. 그것도 그렇군.”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나는 전하께 자네들을 중히 쓰라고 천거할 예정이야. 황태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 많은 게 달라질 테니까.”
이미 제국은 물론이고 유럽 내에서 니콜라이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황태자와 황제란 자리는 엄연히 차이가 있는 법.
오래된 시계를 분해하여 낡은 부품을 교체하고 기름칠하는 것처럼, 이제 러시아는 모든 면에서 바뀔 준비를 마쳐야만 했다.
‘한데 어째서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얘기하는 거지? 그렇다는 건 설마……’
뭔가를 직감한 막심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원수께서도 이미 은퇴를 결심하셨군요.”
“그래. 나는 이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니까.”
원 역사에서 1813년 초에 병으로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다.
그런데 니콜라이의 배려로 거의 5년 가까이 더 살았으니 이 정도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늙어가는 게 느껴지니. 블뤼허 그 노인네처럼 반미치광이로 날뛰는 것보단 제 발로 물러나는 게 모양새가 좋겠지.’
예전에는 게으름 때문에 그랬다곤 하나 요즘은 정말 기력이 달려서 늘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저번에 생도들과 함께 모의 전투를 했을 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쿠투조프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던 바그라티온은 그답지 않게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안타깝게 됐군.”
“그렇다고 당장 모든 걸 그만두고 요양하러 가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열심히 살다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 오히려 더 빨리 늙는다잖은가?”
애써 밝은 척을 했으나 쿠투조프의 음성에는 벌써 지친 기색이 뚝뚝 묻어나왔다.
한때 전장을 함께 누비며 목숨까지 맡겼던 전우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은퇴하다니.
바그라티온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허해졌다.
‘물론 니콜라이 전하께서 나타나기 전까진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상이었지. 하지만 그 이후로는 합이 잘 맞았단 말이지.’
자고로 과거란 미화되기 마련이었으니.
어느새 그의 마음속에는 좋았던 기억, 애절한 순간만이 남아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갑자기 숙연한 분위기가 되자 쿠투조프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누가 보면 내가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은 줄 알겠어? 자네들 승진하는 건 보고 죽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실없기는. 할 얘기는 다 끝났소? 곧 생도들 훈련이 시작될 시간이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음.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바그라티온이 떠나자 쿠투조프는 막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오늘 바로 출발하여 전하께 내가 쓴 편지를 드리도록 해라. 거리가 거리인 만큼 결혼식이 끝난 뒤에 도착하겠지만 적어도 즉위식에는 참석해야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대표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주어라.”
니콜라이와 함께 나폴레옹 시대를 저물게 했던 주역, 쿠투조프.
그 이후에도 러시아는 한창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었으니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나갈 주역을 눈에 담는 순간 그런 미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전하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충신이자 능력도 출중한 인재가 여기 있으니. 나와 수보로프 대원수의 계보를 이어 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리라!’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눈에 담아내던 쿠투조프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연병장에 도착했을 즈음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생도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두 집중! 너희들의 첫 실전이 드디어 결정됐다.”
“오오!”
“그게 어딥니까? 설마 청나랍니까?”
열광적인 반응에 쿠투조프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3년 뒤 청나라를 쳐서 아시아를 손아귀에 넣을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전하께서 내리신 명을 완수하기 위해선 앞으로 부단히 노력해야겠지!”
“우오오오!”
그동안은 관성에 따라 훈련하며 막연한 미래를 꿈꾸는 게 고작이었다.
심지어 동방 원정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어놓긴 했으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막막한 게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3년 뒤 청나라 침공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생기자 의욕이 넘치다 못해 절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쿠투조프는 여기에 아예 기름을 부어버렸다.
“앞으로 너희들은 최소 10만의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을 손발처럼 부리며 지독한 역병을 상대할 준비까지 마쳐야 하지. 자신 있나?”
“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해내겠습니다!”
생도들이 내지르는 결심을 찬찬히 음미하던 쿠투조프는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뭣들 하느냐? 어서 구르지 않고? 구호는 악으로 통일한다. 알아듣겠나?”
“악!”
경구 수액과 수질 정화제를 들고 샤를로테가 준비한 지참금을 회수하러 갈 부대.
그 이름도 위대한 동방 원정군이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4.
샤를로테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여정은 행복 그 자체였다.
내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반려라는 게 이렇게도 든든할 줄이야.
여기에 결혼을 앞둔 신혼부부의 설렘까지 더해지니 일 분 일 초가 알차게 흘러갔다.
“원래 나 혼자 다닐 때는 글이나 쓰는 게 고작이었거든. 심지어 어렸을 땐 막심한테 하도 할 게 없어서 검술까지 배웠다니까? 그래도 어찌나 시간이 안 가던지.”
“어머. 저도 그랬어요. 책을 읽고 악기를 연습하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하지만 이제 당신과 평생 함께할 테니 그럴 걱정은 없겠어. 이렇게 손만 잡고 있어도 기분이 좋은걸?”
“에이, 거짓말. 그거 소설 속 바람둥이들이나 하는 대사잖아요.”
그 말에 나는 앞섶을 풀어 헤치며 달려들었다.
“아니, 진짜라니까. 확인해줄까? 여기 손 좀 가져다 대봐.”
“꺄악! 그런 건 숙소 가서 해요.”
게다가 가는 길목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드는 바람에 심심할 겨를도 없었다.
“저분이 황태자 전하로구나.”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시고 배를 불리게 하며 미래까지 보장해주신 대단한 분이지.”
“오오. 신이시여! 위대하신 성자를 축복하소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샤를로테는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된 것처럼 시종일관 밝은 표정을 지었다.
능력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 이렇게까지 인정받는 군주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으니까.
‘역시 내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어.’
모두의 응원을 뒤로 하고 어느덧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나는 오랜만에 가족과 만남을 가졌다.
“어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녀석! 그간 기별도 없더니 드디어 왔구나.”
말은 험하게 했으나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슬쩍 눈치를 보던 샤를로테는 나와 마리야의 대화가 끊기는 시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황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프로이센에서 온 샤를로테라고 합니다.”
“오오. 네가 니콜라이랑 결혼할 그 아이냐?”
같은 독일계, 프로이센 출신이라 그런지 두 사람은 죽이 제법 잘 맞아 보였다.
한참 대화를 이어 나가던 두 사람은 어느새 나만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앞으로 시댁에서 계속 살아야 할 텐데 시어머니이자 러시아 황실의 큰 어른과 서로 잘 지내면 좋지.’
남자가 섣불리 발을 들이밀기 힘든, 소위 여자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걸 어찌 모르겠나.
그사이 어엿한 성인이 된 안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너 벌써 결혼한다며. 아까 보니까 신부 될 사람 같던데. 예쁘긴 해도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흐흐. 이래 봬도 내가 사람 보는 안목 하나는 끝내주거든? 마음과 능력은 더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그나저나 미하일은 어디로 갔어?”
“아, 그 녀석은 지방에 있는 공장 시찰해본다고 한동안 자리를 비웠지 뭐야. 곧 콘스탄틴 오빠랑 같이 올라온다니까 결혼식은 그때 맞춰서 하는 게 좋겠지?”
격의 없이 자란 두 살 터울의 남매답게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떠들어댔을 즈음.
안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주라. 네 안목이 그렇게 좋다면 나도 덕 좀 보자고.”
“하긴 누나도 슬슬 시집갈 때가 됐구나.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 있어? 유럽 내 군주 가문의 자제라면 아무나 데려와도 상관없는데.”
“응? 정말 그래도 될까?”
“그럼. 당연하지.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어?”
예나 지금이나 국가와 가문 간에 이득을 안겨주는 정략결혼이 대세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소한 것보다는 가족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유럽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이미 내가 꽉 잡아뒀으니 굳이 그런 노력까진 필요 없기도 했지만.
‘물론 검증은 철저하게 해야겠지. 집안에 사람 하나 잘못 들였다가 괜한 분란이 일어나는 것보단 미리 쳐내는 게 나을 테니.’
어지간한 인사청문회 뺨칠 정도로 단단히 준비하리라 마음을 먹은 나는 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무도회라도 열까? 결혼식이 열리기도 전에 각국에서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던데. 어쩌면 그중에서 인연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좋지! 폐하는 지금 바쁘셔서 저녁 늦게나 시간이 될 거야. 그때 열면 딱 좋겠다.”
“알았어. 바로 준비해볼게.”
‘이왕 하는 거 황제의 이름으로 소집하는 게 낫겠지?’
나는 곧바로 시종을 불러 알렉산드르 1세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저녁에 나를 환영하기 위한 무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사방에 퍼졌다.
그리고 무도회장에 막 발을 내디뎠을 때.
가장 먼저 알렉산드르 1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내가 던져놓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몇 년 사이에 폭삭 늙은 얼굴이었다.
오죽 했으면 인사도 다 생략하고 이런 말을 내던졌을까.
“조만간 자리를 물려주겠다. 이젠 나도 좀 쉬고 싶구나. 네 녀석 때문에 하루 내내 업무를 봐도 끝나지를 않아.”
“하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찔리는 게 많았던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런데 혹시 수도원에 은거하실 계획은 아니시지요?”
그 말에 알렉산드르 1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내 집을 놔두고 굳이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
‘휴우. 다행이군.’
거세파나 시초회귀파 같은 사이비 종파에 홀려버리기라도 하면 러시아 황실의 체면은 말도 못 하게 추락할 게 뻔했다.
다행히 구교도를 통제하고 그가 바라던 개혁을 대신 이뤄주는 등 미리 조치해놓은 덕분에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이왕 사람들을 한데 모았는데 흩어지기 전에 황제 즉위식까지 처리해버리도록 하지. 축하는 많이 받을수록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준비를 철저하게 해두겠습니다.”
알렉산드르 1세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무도회장 전체를 둘러보았다.
기쁜 일로 모인 만큼 모두가 밝은 표정이었다.
단 한 사람, 영국의 대사 콜린스만 빼고.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불청객을 미리 쫓아내야겠군. 영국과 매듭을 지어야 할 일도 있고.’
심지어 콜린스의 입가는 당장이라도 무슨 사고를 터트릴 것처럼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넸다.
“콜린스 대사였나? 오랜만이네. 잠시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좀 나누도록 하지.”
“…..!”
계획대로라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를 망쳐버렸어야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콜린스의 얼굴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