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166
제167화
“도와줄게, 도운아.”
뒤에서 태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계단을 오르는 내 등을 받쳐주듯 편안했다.
그나저나 도와주겠다니.
지금 상황에 태천이가 날 도울 방법이 있긴 한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의문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지익, 지이익!
이무기를 포박한 뿌리들이 끊어지려고 하고 있어서다.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또,
[세계수 어린나무가 순수하고 이질적인 마나를 느꼈습니다.] [이질적인 마나가 증폭하고 있다고 전합니다.]“허억…!”
엄청난 압박이 순식간에 나를 엄습한 것도 이유였다.
버텨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는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 때문일까?
몸 여기저기에서 삐걱하고 닳고 닳은 기계 부품 같은 소리가 났다.
팔이 박살 났던 게 스미르노프 때문이 아니라더니….
그 말이 이해가 됐다.
예상컨대, 태천이가 지금 쓰는 힘은 주변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는 종류의 것이리라.
자기 자신까지 포함해서.
「……!」
당연히 이무기도 영향을 받았다.
콰앙…!
이무기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무래도 덩치가 큰 만큼 압박도 더 심하게 느끼는 듯했다.
세계수의 뿌리를 뿌리치려던 몸부림도 줄어들었다.
그 덕분에 직직거리며 끊어질 것 같은 소릴 내던 세계수의 뿌리들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계수의 뿌리가 끊어질 뻔했으니 당연했다.
더군다나 실드 때문에 이무기를 완벽하게 포박했다고 볼 수도 없었다.
모든 공격을 막았던 실드는 세계수의 뿌리도 차단했으니까.
그 탓에 세계수의 뿌리는 이무기가 아니라 실드를 통째로 붙잡고 있었다.
스미르노프가 그랬었던 것처럼.
“일단, 된 거 같구만….”
태천이 이무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별로 좋지 못한 것을 보니, 이 압박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무기를 제압했는데도 계속 뒤에 있는 걸 보면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흠….”
“왜 그래?”
“이무기 말이야….”
“……?”
“저러고 있으니 번데기 같지 않냐?”
“후우….”
태천이 한숨을 내쉰다.
피로감이 담긴 한숨….
그것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이 압박을 오래도록 유지하지는 못하리라는 걸.
아마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는 걸 거다.
이런 힘을 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은 이유도,
그동안 사용을 자제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테지.
“여유 부리지 말고, 어서 선택이나 해!”
답지 않게 재촉해온다.
태천이는 언제나 태평하고 여유로운 녀석이다.
평소였다면 태천이는 재촉하는 게 아니라 내 농담에 맞장구를 쳤으리라.
“…세계수의 뿌리.”
바로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선택하려면 따스한 손길을 써야 했으니까.
세계수의 뿌리를 일단 풀어야 한다는 소린데….
그럼 이무기가 도망쳐버릴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수의 뿌리와 태천이의 힘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이무기는 아직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날 적대적으로 노려보는 게 그 증거다.
“세계수의 뿌리.”
연거푸 세계수의 뿌리를 썼다.
나무뿌리로 변한 손가락들이 이무기의 실드를 감는다.
열 개의 뿌리가 실드를 감고 나면, 그걸 끊어내고 다시 세계수의 뿌리를 썼다.
새로운 뿌리들이 뻗어 나가 칭칭 감아댄다.
그 행위를 몇 번이고 반복하자, 곧 이무기는 커다란 바위 같은 머리가 달린 번데기로 변모했다.
그런 모습이 되고 나니….
아무리 버스트 모드를 쓴 이무기라도 분노를 형상화한 것 같던 위엄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뭐한 거냐? 귀엽긴 한데.”
태천이가 감상을 말했다.
그 감상대로 이무기의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커다란 바디필로우 같기도 하다.
“보면 알아.”
“보라고 해도, 뭐를…?”
“힘 풀어봐.”
“뭐? 힘을 풀라고?”
“그래, 천천히.”
“…….”
태천이는 힘을 풀었다.
내가 요청한 대로 아주 천천히 풀었다.
몸을 짓누르던 압박이 약해졌다.
땅바닥을 패고 들어간 무릎이 편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펼 수도 있게 됐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탁탁 털었다.
이무기도 압박감이 약해진 것을 느꼈는지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
이무기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놈의 몸 중에 움직이는 부위는 세계수의 뿌리가 감기지 않은 머리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역시….”
“뭐야, 얘 왜 못 움직여?”
태천이 물으면서 내 옆으로 걸어온다.
뒤에 서 있기만 하던 녀석이 힘을 풀자마자 움직였다는 건….
제 자리에 서 있어야만 힘을 쓸 수 있는 건가?
“결국, 이무기는 뱀 같은 거잖아.”
“그래서?”
“몸을 구불거려야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아, 근데 통째로 감겨 있으니….”
태천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은 평소처럼 태평하다.
힘을 쓰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역시, 태천이는 저런 얼굴이 더 잘 어울린다.
“좋아. 그럼, 이제 선택해볼까.”
따스한 손길을 쓰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무기는 포기한 건지 더는 버둥거리지 않았다.
버스트 모드도 풀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좋아.
이제 증표를 보여주면 되겠다.
증표는, 아마 검지를 실드에 갖다 대면 될 거다.
따스한 손길은 항상 그런 식으로 써왔으니까.
실드에 검지를 대기 직전,
「…하지 마라.」
날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말리는 걸까.
실드를 터치하지 않고 태천이를 돌아봤다.
“왜?”
“뭐?”
“뭐? 는 뭐가 뭐야.”
“……?”
태천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흐응? 뭐지?
대화가 안 이어지고 있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방금 네가 하지 말라며.”
“내가?”
“…왜 이래. 방금 나보고 하지 말라면서?”
“뭔 소리야?”
얘가 미쳤나.
갑자기 왜 이상한 장난을 쳐?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찌푸렸다.
태천이도 마찬가지로 눈을 찌푸렸다.
동시에 눈을 찌푸린 그 순간, 우린 서로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
“…….”
“그러니까, 방금 하지 말라고 말한 게-”
“우리가 아니라면….”
스윽….
우린 고개를 돌려 이무기를 바라봤다.
이무기는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 얼굴과 달라서 정확하진 않았지만, 왜인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위그’…. 그대는 늘 극으로 치닫는군.」
위그…?
위그, 위그….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
「디싱 나 토르는 완벽한 존재였는데….」
“오.”
아는 이름이 나왔다.
딱히 좋아하지 않는 양반이지만, 그래도 꼴에 아는 이름이라고 듣게 되니 반갑다.
그런데 ‘완벽한 존재’였다고?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랑 아주 다른걸.
나한텐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하는 성격파탄자 같은 이미지인데.
가지치기 가르쳐 줄 때 고통이 뒤따른다는 걸 숨기기도 했고.
그래놓곤 한다는 말이 뭐?
후배로서 너그러이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 바란다?
깊은 생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열이 뻗친다.
「이번 관리인으로는 나사 빠진 인간을 선택했군그래.」
“뭐, 인마?”
「…….」
“너 사람 그렇게 편견으로 가득 차서 보면 안 돼. 내가 어딜 봐서 나사가 빠진….”
어라?
잠깐만.
나사 빠진 인간을 ‘선택’했다고?
전대 세계수 씨가 날 관리인으로 선택했다는 말이야?
말이 안 되잖아.
[세계수 키우기]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우연히 설치한 게임인데.그걸 1년 동안 계속한 것도 어떤 장대한 목표 따위가 있어서가 아니다.
세계수를 키워 달라고 했으니 언젠가는 자라겠지?
내가 그걸 꼭 보고 만다.
딱 그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고 한 것뿐이었다.
즉, 쓸데없는 오기 때문에 계속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전대 세계수 씨가 나를 선택했다니.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선택하지 마라.」
이무기가 말했다.
그것의 목소리는 마치 머릿속에 울리는 듯했다.
상념이 저절로 끊어졌다.
“…뭐?”
「나는 무엇인가….」
“……!”
「위그가 그 질문을 던졌지?」
그리 말하는 이무기의 목소리는 우울했다.
우울한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이무기의 얼굴은 슬픔에 잠긴 듯이 보였다.
세계수의 뿌리에 칭칭 감긴 모습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뭘 선택할 줄 알고 이렇게 우울해?
「뭘 선택하든 똑같다.」
어라.
속으로 중얼거렸는데 대답하네.
레드 드래곤이 마음을 읽었었던 것처럼 이무기도 생각을 읽을 줄 아는 건가…?
“똑같다고?”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나? ‘용’? 아니면 ‘뱀’?」
“…….”
이무기의 생각이 옳았다.
용(龍)과 뱀(蛇).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대답하려고 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이무기 전승이었으니까.
또 전승을 아는 한국인으로서 내가 선택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용이라고 대답하려 했는데.”
「그렇군….」
“혹시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우문(愚問)이다. 관리인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용을 선택하면 용이 되고, 뱀을 선택하면 용이 되지 못한다…?”
「잘 아는군.」
용이 된다.
그건 즉 이무기가 블루 드래곤이 된다는 뜻이다.
평양의 레드 드래곤처럼, 태평양의 그린 드래곤처럼.
S등급 판정을 받을 몬스터가 되는 것이다.
그런 강력한 존재가 될 수 있는데, 이무기는 왜 선택하지 말라고 하는 걸까.
“뭐야. 그럼 그냥 용이라고 대답하면 되는 거 아니야?”
「…….」
“요?”
이무기가 태천이를 바라봤다.
시선이 닿자 태천이는 뒤늦게 “요”를 붙였다.
쓸데없이 귀여운 거 보소.
“왜 선택하지 말라는 거, 겁니까?”
「존대하든 반말을 하든 하나만 할 수 없겠나, ‘문지기’여.」
“……!”
태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문지기가 뭐기에 저렇게 놀라는 거람.
「그래…. 전락하느니 용이 되는 게 낫긴 하지.」
전락(轉落)…?
표현이 제법 센걸.
아무래도 뱀을 고르면 용이 되지 못하는 것만으로 안 끝나나 보다.
표현한 것에서 유추해보자면 아마 몬스터가 돼버리는 것이 아닐까.
당연히 전대 세계수 씨의 보호도 사라질 테지.
보호가 사라진 이무기….
그 말로가 어떨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반대의 경우도 비슷하겠지.
드래곤이 된다면, 그저 드래곤이 되는 것으로 끝날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기에 용이 되길 거부하는 걸 테지.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우문’이라고 말한 것도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였던 것 같고….
“그러니까 도운이 용이라고 하면 되는 거-”
「내 ‘자유’는?」
이무기가 나를 바라봤다.
자유. 자유라….
그걸 잊고 있었네.
바보같이.
「왜 내가 관리인의 선택에 따라 결정돼야 하지? 어째서 나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빼앗느냔 말이다.」
“…….”
「그러니 선택하지 말아다오. 나는 그저 이무기로 남고 싶으니.」
“흠….”
긁적긁적.
따스한 손길을 쓴 검지로 목을 긁는다.
그저 이무기로 남고 싶다, 라….
“도운아.”
태천이 나를 부른다.
이런 순간에서 태천이가 날 부른다면, 그 이유는 뻔하다.
‘기사 이태천’은 이무기의 뜻을 따라주고 싶으리라.
이무기의 바람대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길 원할 거다.
그런데 난 기사고 뭐고 아니거든.
“그렇다면, 더더욱 선택해야겠는데?”
「…관리인.」
이무기가 사나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날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싸늘한 것이 아무래도 오해를 한 것 같다.
그래, 내가 말이 부족하긴 했지.
“뱀이니 용이니. 그런 건 다 집어치우고.”
「……?」
“이무기. 너는 뭐가 되고 싶지?”
「이미 말했지 않나. 이무기로 남고 싶다고.」
“아니.”
이무기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면서 오른발을 내디뎠다.
“그건 자유롭지 못한 상황 속에서 선택받기 싫어서 고른 거고.”
왼발을 앞으로 내디딘다.
이어 한 걸음을 더 내디뎌 이무기 앞에 선다.
투명한 막, 아니.
투명한 벽을 향해 두 손을 뻗는다.
“그런 거 말고. 네가 정말로 되고 싶은 거. 그게 뭐냐고 묻는 거야.”
「관리인….」
“이무기. 너는 무엇이 되고 싶지?”
「…….」
“응?”
「정말….」
이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심이나 설움이 담긴 숨은 아니었다.
「위그는 왜 이 인간을 관리인으로 선택한 건지….」
또다.
또 선택했다고 말한다.
왜 그리 말하는 걸까.
내가 [세계수 키우기]를 설치한 건.
1년 동안 꾸준히 게임을 한 건.
오로지 나의 선택이었는데.
「예전부터…, 되고 싶었던 것이 있긴 하다.」
“그게 뭔데?”
「관리인….」
관리인?
설마, 지금 세계수 관리인을 말하는 거야?
이게 선 넘네?
그건 안 되지,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