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04
제104화
26. 한 판의 놀음 (4)
“윤가호 헌터! 지,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엉겁결에 나를 따라 달리던 이강토가 내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지도까지 만드셨다더니. 모르시겠습니까? 천요궁입니다.”
“거긴 왕이 있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가는 겁니다.”
손바닥 위, 상궁이 준 호박 단추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여길 뜨더라도 주어진 카드는 전부 써야지 않겠습니까.”
호위들이 쓰러진 것은 여섯째 공주가 수습해 주겠다 약속했으니 아주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시선을 피해 지붕 위로 올라갔다.
“약간의 불쾌함은 감수해야겠지만 이 단추만 있으면 프리패스로 왕에게 갈 수 있습니다.”
상궁과의 대화를 설명하지도 않았건만 이강토는 찰떡같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 자신은 은신 망토를 쓰고 따라오겠다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도 휘, 휘파람 부시면 주변 놈들 다 정리해 드릴게요.”
“그럴 일이 안 생겨야 할 텐데 말입니다.”
“시중드는 척 접근해서 정보를 캐낼 생각이신 거죠?”
“예. 정말 왕이 역병에 걸렸는지도 좀 보고요.”
공주가 본 것이 맞다면 왕은 특수한 기술이나 아이템을 이용해 역병꽃을 감추고 있으리라. 탐색자의 눈으로 보면 어렵지 않게 수법을 알 수 있겠지.
‘모르겠다 싶으면 모노클로 칼리아를 부르면 되고.’
모노클 생각을 하니 절로 공주가 끼고 있던 반지가 떠올랐다.
어떻게든 해 주고 왔음 좋았을 텐데. 그 붉은 마력의 주인에게 들키지 않게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기에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지붕을 내려가려는데 이강토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하, 한 번 더 써먹어 보는 거 어때요?”
“말을 할 때는 주어를 넣어 주세요, 이강토 헌터.”
“현대인의 소양 작전이요!”
공주에게 했던 것처럼 왕한테도 거짓말을 하자는 건가? 갓난쟁이였던 딸을 강에 버린 자이니 그런 얘기엔 눈 하나 꿈쩍 안 할 것 같은데.
내가 거절할 걸 알아챘는지 이강토가 냅다 내 입을 막았다.
“완전히 똑같이 하진 말고요. 이번엔 3탄.”
“빨리 그 손 떼! 까만 김 서방한테 나쁜 기운 옮을라!”
“그, 그쪽도 협조하세요.”
갑자기 호명된 도깨비가 콧등을 찡그렸다. 그 모습이 차태양과 쏙 빼닮아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흥! 내가 왜 김 서방이랑 한편을 먹어야 하는데?”
“저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TPO에 맞는 옷이 필요해서 전략적 동맹을 제안하는 거라고요. 협조하세요!”
말하는 걸 보니 도깨비의 재주를 이용하려는 것 같은데. 저렇게 앞뒤를 다 잘라 먹으니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게 작전을 설명하다 말고 도깨비와의 설전으로 샌 이강토의 팔을 툭툭 쳤다. 이제 슬슬 숨을 쉬기도 불편한데.
“앗, 죄, 죄송해요!”
“본론으로 돌아옵시다. 그 3탄이라는 게 뭐기에 재주까지 가져다 쓰려는 겁니까?”
“제가 어제 낮에 왕 놀음을 봤다고 했잖아요.”
“예, 그러셨죠.”
돌연 양손을 기도하듯 모은 이강토가 무서울 정도로 눈을 빛냈다. 근거 있는 불안감이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괴짜,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저희는 저승사자 놀음 한 판 해보죠!”
신기하게도 우리가 처한 상황이 저가 본 가면극과 똑 닮았단다. 운명이다 생각하고 그 극을 재현해보자며 이강토가 내게 매달렸다.
“놓으세요. 무겁습니다.”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지만 임무에서 사심을 채우려는 게 투명하게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일관성 있기도 쉽지 않은데.
‘하긴 어둠침침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 저승사자도 좋아하겠지.’
약간의 어이없음과 괘씸함만 제하면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지금까지 들은 바에 의하면 온의 왕은 욕심이 많고 욕망에 약하다. 이런 부류들은 으레 자기가 가진 것은 절대 놓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삶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그런 이가 역병에 걸렸으니 내색은 안 해도 얼마나 벌벌 떨고 있을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의원을 끌어모으는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분위기만 잘 조성되면 껌벅 속아 넘어갈 확률이 높아.’
내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단 걸 귀신같이 눈치챈 이강토가 자진해서 인벤토리를 털기 시작했다. 이건 회색 안개 구슬, 저건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인간용 마따따비, 또 이건……. 온갖 잡동사니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좋습니다. 이강토 헌터의 그 작전, 채용하죠.”
“정말요?”
“예. 괜찮을 것 같네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소리?”
“김 서방 부탁인데 그 정도야 뭐!”
내가 저의 아이템 공세 때문에 허락한 거라고 생각한 건지 이강토가 자꾸 무언가를 내놓으려 들었다. 저기에 초를 치는 건 좀 미안하지만.
“저승사자 행세는 저만 하는 걸로 하죠.”
“예에에?”
“날조와 선동을 하려면 그편이 낫습니다.”
“왜 또, 또 저만 빼놓으시는 거예요? 윤가호 헌터 저 싫어하세요?”
어, 음.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없는데. 어째서 바로 대답하지 못하냐며 소리치면서도 이강토의 눈썹은 숫제 울 듯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모습을 보니 더더욱 그는 빼고 작전을 실행해야겠다 다짐하게 되었다. 그도 그런 게…….
“저승사자 흉내를 내기에 이강토 헌터는 너무 생기가 넘칩니다.”
“그런 이유라고요?”
“인상도 너무 유하고요. 한심한 짓만 하지만 엄연히 한 나라의 왕입니다. 거기다 대고 사기를 치려면 정말 제대로 해야 해요.”
이강토가 아무리 분위기를 잡는대도 저 얼굴이어서야 정말 ‘놀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 기껏 시도한 작전도 다 무용해지고.
“그 재주로 어, 얼굴은 못 바꾸나요?”
“못 해! 할 수 있어도 안 해 줄 거다!”
“쳇, 무능력하기는.”
“뭐어?”
금방 다시 싸우려기에 둘 사이를 막아섰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된다니깐. 입을 잔뜩 내민 이강토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얼렀다.
“저승사자 놀음 같은 것보다 더 흥미로운 일이 생길 예정입니다. 그때는 꼭 함께하죠.”
“이, 이것보다 더요?”
욕망에 솔직한 이강토가 꼴깍 침을 삼켰다.
그래, 넘어올 줄 알았지. 의미심장하게 보이길 바라며 눈을 휘어 웃었다.
“예, 훨씬요.”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지잉-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까 생각하던 찰나, 헌터워치가 울렸다. 신주는 보내자마자 답장했으니 이건 차태양이 보낸 메시지인 듯했다.
“잠시만요.”
[- 발신인 : 차태양네! 한번 시도해 봐요(ง •_•)ง
앗 그래도 소리한텐 아직 비밀이에요!]
산은 해가 더 빨리 지는데도 아직 안 잤구나. 애가 닳은 이강토의 시선을 즐기며 천천히 답을 보냈다.
“그래서 어떤 아름다운 일인데요? 예?”
“갑자기 말씀드릴 수 없게 되었네요. 죄송하지만 아직 비밀입니다.”
“그런 법이 어딨어요! 불공평해요!”
“원래 인생은 불공평한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강토의 우선순위는 한참 뒤였다. 이 판의 조커가 싫다는데 어쩔 수 있나.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이곤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계속 거기 계실 겁니까?”
“……가요!”
그래도 미끼를 던진 보람이 있는지 이강토는 고분고분하게 내 뒤를 따라왔다. 천요궁이 가까워지니 알아서 은신 아이템도 착용하고.
“뉘십니까.”
“이걸 보여 드리면 된다 들었습니다만.”
천요궁의 궁인들은 아닌 밤중에 튀어나온 사람을 경계하였으나, 단추를 보여 주자 단번에 나를 안쪽으로 들였다. 환대하는 기미까지 보이니 내게 이걸 준 상궁이 꽤나 높은 사람이었나 싶었다.
“때마침 전하께서 술시중을 들 이를 찾으니 빠르게 채비하고 나오시지요.”
본래는 복잡한 절차가 여럿 있으나, 공주를 알현하며 약식 절차는 모두 밟았으니 단장이나 좀 하고 나오란다.
‘아니, 그래도 왕을 만나는 건데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하나같이 두툼했던 겨울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내내 생각했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왕의 목을 따러 온 살수라면 어쩌려고…….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보지.’
방 천장에서 그림자 무사가 숨어 있다든가, 사실 왕이 금강불괴의 체질을 타고났다든가. 근거 없는 상상을 하며 성의 없이 화장품을 찍어 바르는데 옆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사람들의 말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저 여자 아니었음 큰일 날 뻔했어. 원하는 걸 제때 가져다드리지 않으면 바로 칼부림이 나잖아. 애먼 칼에 죽은 애가 몇인지 생각도 안 나.”
각성자의 귀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npc들은 조심성 없이 떠들어 댔다.
“눈은 또 얼마나 높으시고? 거기다 한 번 손을 댄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기까지 하니. 매일 시중들 여인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니까.”
“그래도 플레이어는 좀…….”
“어후, 걱정은. 두 시진 내내 술을 내오라 하셨으니 사람이 아니라 개를 들이민대도 못 알아보실걸?”
“줄줄이 역병에 역정까지 바람 잘 날이 없다니깐. 빨리 궐에서 나가든지 해야지, 정말.”
음, 만취 상태일 거라고? 이처럼 반가운 소식이 없었다. 연기에 자신은 없었지만 이 정도로 상황이 깔리면 할만했다.
“잘만 하면 오늘 일을 꿈이라 얼버무릴 수도 있겠고.”
이 대화로 어쩐지 이상하던 궁인들의 태도도 어느 정도 납득가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왕의 구미에 맞는 여자를 찾기 힘든 상황에 내가 짠 나타나 줬으니 반가울 수밖에.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매일 왕의 패악질을 보아온 사람들이니 충심도 없을 거고. 어떻게든 오늘 하루도 무사히 업무를 넘기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생각하는 거다.
“궁내에 저런 이들뿐이라면 괜히 얼쩡거리는 사람과 마주쳐서 귀찮아지는 일도 없겠네.”
일이 아주 술술 풀릴 것 같단 좋은 예감이 들었다.